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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쓴 글을 소설로 각색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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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러치 일병!!"

"ㄴ, 네 넵!!(s, sir, sir! yes sir!!)"


일병 클러치는 소대장의 호통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자네를 몇번이나 부른 지 알고는 있나!! 상부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이 주둔지를 버리고 대피한다고 하지 않았나?! 망할 디셉티콘한테 대공 사격을 해서 우리의 대피 시간을 벌어줄 계획이라면 난 말리지 않겠다!!"


"아, 아닙니다!! 바로 군장 결속을 실시하겠습니다!!"


또 일어나고 말았다. 클러치 일병은 몇 사이클 째 같은 증상이 비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중이다. 지난 전투 때도 참호 속에서 사격 도중 멍해지는 탓에 그대로 올스파크로 돌아갈 뻔했다. 그가 동료들의 절반 키밖에 안되는 미니봇이어서 총알은 운좋게 피할 수 있었다.


그는 포탄 쇼크를 앓고 있다. 

그는 총 다섯번의 격전에 참여했고, 3번째 격전에서 폭격 탓에 브레인 모듈의 회로 몇개가 끊어지고 말았다. 

에너존 순환과 활동에 지장을 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잘못 표현했다. 방금도 지장을 주지 않았는가.

군의관에게 진료받는다면 금방 납땜하여 나아질 수 있는 작은 오류다.

그러나 그는 입대 후 단 한번도 군의관을 만나지 못했다.


잽싸게 관물대를 열고 원통형 캡슐에 보급품을 넣었다. 두세번 손으로 쓸면 담길만큼 양도 별로 없었다. 블래스터 용 전지, 고형 에너존 조각들, 스크래플렛 퇴치제. 이게 끝이었다. 울적해질 때 보는 잡지 홀로그램은 무게만 차지하니 그대로 쳐박아두기로 했다. 

등을 열고 캡슐을 넣은 후 알트 모드로 변해 병사들의 뒤를 쫓아, 겨우 탈출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는 시커즈가 주둔지를 박살내는 모습이 순식간에 점 하나가 되어 멀어진다.


붉은 조명과 덜컹거리는 실내.

병사들은 신음 소리조차 못내며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이미 다들 지친지 오래다. 손가락 한둘 없는건 기본이었다.

전투 중에도 멍해지는건 오히려 양반인 수준이었다. 

팔 하나가 통째로 없어졌는데도 아예 기계 팔을 어설프게 만들어 총으로 쓰는 병사도 있었다.

돌아봤자 비참할 뿐이다.


클러치 일병은 다시 멍해졌다.

보통 이 상태는 완전히 사고가 정지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세번째 폭격을 맞기 전 그는 오버로드와 대치했었다.

그래, 그 덩치 크고 미친 놈.

상하체가 탱크와 전투기로 나뉘는 육중한 크기에, 그 각각의 알트 모드가 인격이 따로 있는지 떨어졌다 합쳐질 때마다 인격이 바뀌었다. 하나는 각진 메크의 얼굴, 하나는 갸름한 펨봇의 얼굴이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 인격이 각각 기가와 메가라는 별도의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느 쪽이 기가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비록 포탄 쇼크를 얻었지만, 그때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코앞까지 다가온 오버로드에게 어떤 '놀이'를 당했을지 모른다. 에너존 튜브 한 가닥만 남긴채 상하체가 뜯겼을까? 사지가 하나하나 짓밟혔을까? 아니면 디셉티콘들에게 던져져 뜯기며 에너존을 빨아먹혔을까? 알 수 없다.

지금은 가루가 되었을 터인 주둔지의 취침 시간에 병사들과 떠든 이야기가 지나간다.

오토봇 과학자 브레인스톰이 개발한 헤드마스터 기술은 목이 떨어져 변신한다는 황당한 것이었지만, 그가 개조한 하드헤드와 하이브로우가 전방에서 공을 세우고 있다는 얘기에 너도나도 감탄하며 우리에게도 그 시술을 받을 기회가 올지 떠들었다.

그 직후, 헤드마스터 얘기를 한 병사가 말하길, 그 기술을 모방하기 위해 디셉티콘의 거대한 괴물 과학자 스콜포녹이 오토봇 포로들의 머리를 따며 어떻게든 헤드마스터 기술을 모방하려 연구 중이라고 한다.

메가트론의 측근이라는 쇼크웨이브의 잔혹한 실험 얘기만으로도 무서운데, 그런 놈이 둘이나 된다니 공포가 따로 없었다.


다른 얘기도 있었다.

디셉티콘의 첫 반란 당시, 크리스탈 시티를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컴바이너 데바스테이터에 대항하기 위해 오토봇 공군이 컴바이너 훈련을 실시했고, 마침내 슈페리온으로 합체하는데 성공해 훈련의 성과가 성공적이었다는 얘기였다.


돌아보면 참으로 희망찬 얘기들이었다.

스프링어의 레커즈가 빌어먹을 시커즈들을 걷어차고 전략적 요충지를 탈환했다는 얘기.

전설적인 노병 컵의 무용담을 실제로 오일집에서 들었다던 얘기.

스타 세이버, 다이 아틀라스, 울트라 매그너스같은 사령관들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얘기.

그리고 그 모든 얘기들 중 우리가 직접 본 것은 없었다.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주둔지에서 다 떨어져가는 에너존으로 겨우 버티며 전선을 조금이라도 더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리고 우리는...주둔지조차 지키지 못하고 사이버트론을 벗어나고 있다.


상부의 명령은 이러했다.

사이버트론에서 후퇴.

이는 우리가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폭격을 피해 안전한 사이버트론 외부로 대피한 후 금방 복귀하는 작전이라고 한다.

이게 바보같은 거짓말이라는걸 모르는 병사는 없었다.

그저 명령이니 따를 뿐이다.

'잠시 대피'를 한참 떨어진 유기물 행성으로 한다니.

이름도 기가 막힌다. 땅(earth)이다. 그냥, 땅.


클러치 일병은 멍때림이 멎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외부 자극 없이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좌석 건너편에 앉은 병사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슬픈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콘적스 엔듀라가 준 부적이었다.


아무래도 그 부적이 엉터리였나보다.

어쩐지 덜컹거림이 점점 심해지더라니.

그 병사가 있던 벽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구멍이 뚫리고, 탈출선 내 공기들이 강한 압력으로 빠져나갔다.

클러치 일병은 겨우 쥔 좌석의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푸른 행성을 등지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좋아, 이게 내 이야기야."

바람이 선선히 부는 잔디 언덕에 노을이 지고 있다.

클러치는 소년에게 하던 이야기를 대강 마무리하였다.

"어...정리하자면, 너는 저기 머나먼 금속 행성에서 전쟁을 하는 병사고, 좋은 녀석이고, 나쁜 놈들이 언젠가 지구로 올 수 있다는 거지?"

"정확히는, 왔었지."

"하지만 너가 끝장냈잖아."

"알렉스, 전쟁이란 그렇게 쉬운 게 아냐. 그 제트기 녀석이 분명 죽기 전에 지구의 위치를 보고했을 거야. 그럼 더 많은 놈들이 올거고."

소년은 그 말에 놀라 겁먹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걱정 마. 너는 내가 지킬 거니까."

"저기..클러치."

 "왜?"

"그...왜 나를 구해주는 거야? 너는 사이버..뭐시기고 나는 인간인데. 나는 너보다 훨씬 작잖아. 마치 개미처럼"

클러치는 그 말에 자세를 고쳐, 무릎과 손으로 땅을 짚으며 얼굴을 낮춰 눈높이를 소년에게 맞췄다.

"생명에게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 알렉스.

모든 지성체는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프라임의 말씀이지.

나는 너의 자유를 지켜줄거야. 이 마을 모든 사람의 자유를.

살아간다는 자유를 위해서 말야."

그 말에 소년은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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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클러치인 이유는 우연이긴 한데, 크로스컷의 드론이랑 이름이 같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크로스컷하고 만난 적 있는데, 그때 크로스컷이 드론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버려 동료들이 웃어버리는 사건이 있었다-그만큼 흔하고 별 뜻 없는 이름이라는 의미로 클러치라고 지었습니다.


얘는 범블비나 그런 캐릭터들만큼 활약하지 못하는 정말 쩌리인 캐릭터입니다.

그런 이름없는 병사이기에, 오히려 더 가치있는 캐릭터면 좋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