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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첫만남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던 게 박사였다. 


아마 그때가 켈시의 주선으로 성사된 로도스와 에기르의 첫 미팅 자리였었지, 아마? 



박사님, 저는 로도스 에기르 부문 책임자로 임명된 글래디아라고 합니다. 앞으로 일 관련으로 관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저에 대해서는 부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아직 박사님의 신뢰는 받을 수 없으니까요.’ 



글래디아의 자기소개에, 박사는 대답했다. 



‘나도 만나서 반갑긴 한데, 널 어떻게 생각할지는 내가 정하고 싶어. 다른 오퍼레이터들한테 했던 것처럼. 괜찮을까?’  


‘지휘관으로서 나름대로 하급자를 평가하겠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아집의 발로입니까. 이런 게 육지의 방식인 걸까요, 흥미롭군요.’ 


‘...아집? 헤, 재밌네. 말을 되게 빙빙 돌려서 듣는 재주가 있구나? 지휘관이고 뭐고, 그냥 너라는 사람이 어떤 족속인지 내가 알아서 파악하겠다는 소린데.’ 


‘흠, 적어도 육지의 예의를 갖추어 주시죠. 설마 한 조직의 지휘관씩이나 되시는 분이, 자존심 부릴 때와 참아야 할 때도 구별 못 하는 겁니까?’  

 

‘그쪽이야말로 첫만남부터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라느니, 신뢰받을 수 없다느니…참견질이 지나치네. 그게 에기르의 예의야? 몰랐네, 다음부터 참고할게.’ 



차디찬 냉소를 뱉으며 박사를 노려보는 글래디아. 


그리고 그런 글래디아의 말투를 흉내내며 피식 웃는 박사. 


급속도로 냉각되는 분위기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가득 떠올랐다. 


한 명은 어비설 헌터의 대대장이자, 현 에기르의 대표자. 


다른 한 명은 로도스 최고의 미친놈. 


욕 한 마디 없이 싸늘하게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사장인 아미야도. 



‘어, 어떡하죠…?’ 



입사 이래 쭉 박사의 비서를 맡아 온 사리아도. 



‘뭘 어떡해. 빨리 켈시부터 데려와라.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박사는 내가 지킬 테니.’ 



시선을 박사와 글래디아에게 고정한 채, 작은 속삭임을 주고받으며 해결책을 강구할 뿐이었다.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너는 뭐 하자는 거냐?’    


‘전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뚝뚝 묻어나는 저열함을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지는군요.’ 



그때의 글래디아는 박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 


그저 평범하게 자기소개를 한 뒤, 끝마디에 개인적인 단상을 붙였을 뿐이고. 


스스로 판단하고 싶다는 박사의 말에 약간의 호기심을 표현했을 뿐이다. 


육지 기준으로 예의없어 보였을 수는 있겠지만, 뭐 어떤가. 


자신은 가장 위대한 문명의 일원인데. 


저급한 육지인의 눈치를 봐 가며 일일히 비위를 맞춰 줄 필요는 없을 터다. 


그런데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우연이네. 나도 니 오만한 태도 보니까 갑자기 대화하기 싫어졌는데. 육지의 예의가 안 익숙하면, 통역이라도 구해 줄까?’ 



박사 또한 글래디아를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오만하게 구는 걸까. 


에기르의 대변인이라길래, 간만에 예의를 갖춰서 대하려고 했는데. 


‘나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라’라는 말도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꾹꾹 눌러참고 정중하게 대답했는데. 


그걸 놓고 아집이니 뭐니 비꼬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거만해도 너무 거만하다. 


입은 좀 거칠어도 성격 자체는 무던한 박사였지만, 린수 가시마냥 입 안을 쿡쿡 찌르는 그녀의 오만함이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통역도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건설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는군요. 맞습니까?’


‘그렇게 보이셨구나. 판단이 굉장히 빠르시네. 뭐, 그냥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쇼. 어차피 댁이나 나나, 피차 신뢰하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하, 진짜.’ 



글래디아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에기르에서도 이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는데. 

 

결국 글래디아는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굼벵이가 잘 구르는 것도 재주라고 친다면, 이 남자에게도 재주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바로 사람을 화나게 하는 능력이었다. 



‘가서 켈시랑 얘기해. 난 너랑은 도저히 대화 못 하겠다.’ 



반면 박사도 그녀의 성품에 백기를 든 상태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육지 혐오와 선민의식. 


혐오도 적당히 해야 화가 나지, 저 정도면 진지하게 내가 하등한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수준이다. 



‘그래야겠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글래디아가 차갑게 몸을 일으킴과 함께, 두 사람의 첫만남은 끝장이 났다. 


아마 박사는 아직도 모를 것이다. 


그때 바다로 돌아가려는 글래디아를 만류하기 위해 켈시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무튼 켈시와 수 차례의 교섭을 거친 끝에, 그녀는 로도스의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로서 정식으로 입사했다. 


당연히 로도스 전술지휘관인 박사와도 빈번하게 마주쳤고.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는 일은 없었다. 



‘씨발, 유넥티스야. 다 좋은데, 거못무 꺼졌다고 5초 기절하는 게 말이나 되냐?’ 


‘어쩌라고! 대제사장이 늙어빠져서 현자타임 오래가는 게 내 잘못이야?’


‘...썅, 됐다. 그냥 제조소로 꺼져. 두 번 다시 니 데리고 작전 나가나 봐라.’ 



글래디아가 보기에, 박사는 첫만남 때 봤던 것보다 아득히 천박하고 무례한 남자였고. 



‘아, 염병. 라이터 놓고 왔네. 첼리니아야, 나 불 좀 빌려주라.’ 


‘...씁, 나도 가스 다 썼는데. 이리 와 봐.’ 


‘오. 담배키스?’ 


‘시라쿠사 마피아들은 늘상 이렇게 해. 이상한 의미부여 하지 마.’   


‘앙칼진wwww’ 



훅 불면 날아갈 듯 가볍기 그지없는 인간 말종이었다. 


그런 박사와는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역겨웠기에, 글래디아는 항상 단독행동을 일삼았다.


그의 지시는 물론이고, 허접한 주제에 전사를 참칭하는 다른 오퍼레이터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도 불쾌했기 때문. 


박사 또한 포기한 건지 그런 글래디아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과는 나름 괜찮았기에, 두 사람 모두 현 상황에 대해서 별다른 말 없이 지냈다. 


그런 건조한 관계에 변화를 만든 건. 



‘좋은 아침이에요오오오오오오!’ 


‘야, 야! 로렌티나! 잠깐만! 거긴 위험하다고!’



박사도 글래디아도 아닌, 로렌티나였다. 


어느 날, 글래디아와 로렌티나가 단 둘이서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 



‘괜찮답니다, 박사님.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예요.’ 


‘아니 씨발 그게 아니라-’ 


‘저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단 말이죠!’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는 감염 생물들을 앞에 두고, 폭주한 로렌티나가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묵직한 회전톱을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적을 썰어재끼는 그녀의 모습에, 글래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함을 느꼈더랬다. 


보고 있습니까, 박사. 


이게 저희 어비설 헌터들의 진정한 힘입니다. 


저희의 전장은 무도회처럼 우아해야 하며, 또한 압도적이어야 해요. 


당신 같은 저급한 사람의 지시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입장 상 참아 드리고 있지만, 앞으로 저는 물론 제 부하에게도 멋대로 명령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돌아가면 확실히 의사표현을 해야겠군요.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하, 씨발. 오케이. 예상했어.’ 



자조 어린 박사의 중얼거림과 함께. 


전장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


‘잠깐, 저건….’ 



그건 거대한 원석충이었다. 


온 몸이 시커멓게 탄화되고, 등짝에 짊어진 덩어리에서 끈적한 용암을 뿜어내는. 


놈이 내뿜는 열기에 저도 모르게 목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글래디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어비설 헌터즈는 거대한 시테러들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덩치 큰 적을 쓰러트리는 것 정도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이쪽은 둘이니, 눈 깜짝할 새에 끝낼 수 있을 터. 



‘상어, 엄호하세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 글래디아가 무기를 고쳐잡은 찰나. 


놈이 펄펄 끓는 화염을 토해내기 시작함과 함께, 적들의 두 번째 공세가 시작되었다. 


산성액을 토해내는 폭발 원석충. 


지긋지긋한 의태 투척자와 표류체 무리. 


그리고 또 하나의 거대 원석충. 


미처 글래디아가 반응할 새도 없이, 최전선에서 싸우던 로렌티나의 옷과 피부가 녹아내리고. 



‘이, 런-’ 



숙련된 전사인 그녀의 표정에 일말의 고통이 스쳐지나갔다. 


이를 악문 글래디아가 로렌티나를 돕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이…!’ 



사방을 점하고 쏟아지는 불꽃의 유탄이, 그녀의 발을 가로막았다. 


웬만큼 빠른 공격에는 스치지도 않을 만큼 빠른 글래디아였으나,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포격을 전부 피할 도리는 없었다. 


눈먼 불덩이가 어깻죽지를 스치자, 뇌리에 화끈한 통증이 내달린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상처를 돌볼 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어비설 헌터의 재생 능력을 믿고,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회피할 뿐. 



‘...큭!’ 



로렌티나의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전면에서 쏟아지는 표류체와 의태 투척자의 공격을 그대로 얻어맞으며,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더없이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글래디아가 몸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로렌티나를 지원하려 할 때. 



‘내가 뭐랬냐, 상어야. 퇴각해.’ 



인터컴을 통해 박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요, 그럼 여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까다롭긴 한데, 대비는 해 뒀어. 그러니까 안심하고 돌아오라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박사님.’ 


‘사과하지 마. 거기서 니가 죽기라도 하면 그게 진짜 죄송한 일이니까. 빨리 와.’ 



그렇게 로렌티나가 검은 그림자만 남긴 채 전장에서 모습을 감추고. 


흔치 않게 진지함이 깃든 박사의 목소리가, 인터컴을 통해 전해져 온다. 



‘에피, 먼저 나가서 8시 방향에 자리잡아. ‘화산의 메아리’ 아츠 준비되면 보고해 주는데, 라플란드 체력 반 이하로 떨어지면 보고 안 하고 바로 써도 돼.’


‘네, 선배!’ 


‘라플란드는 11시. 폭발 원석충 나오는 샛길 틀어막아줘.’ 


‘아하하하하하! 몽땅 밀푀유로 만들면 되지?’ 



조곤조곤한 그의 지시와 함께, 로도스의 문장을 어깨에 걸친 오퍼레이터들이 속속들이 전장에 뛰어들고. 



‘페데리코는 에피 옆 언덕에서 제압사격. 엔시오데스는 아츠 켜서 두 칸 앞 타일에서 표류체들 공격 받아주고.’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인터컴을 손으로 꼭 누른 채 박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본대가 자리를 잡으면, 특특…아니, 첼리니아랑 야토. 너희들이 번갈아 가면서 1시 방향 폼페이.’


‘응. 최대한 버텨 볼게.’ 


‘그리고 제이가 5시 방향을 맡아 줘. 한 번에 죽이면 좋지만, 무리는 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대장.’ 


‘마지막…사리아.’ 



당당하게 방패를 치켜든 와이번 여성이 담담한 걸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끝으로, 모든 오퍼레이터들의 배치가 완료되었다.  



‘알고 있다.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들이 실패할 경우, 칼슘화로 적의 발을 묶으면서 재배치 시간을 벌면 되는 거지?’ 


‘응. 항상 믿고 있어.’  


‘고맙다.’



일사불란하게 도열한 채, 한 점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전장을 오시하는 로도스의 전사들.


한때 글래디아가 하등하다 무시했던 이들이었다. 



‘오케이. 해보자, 얘들아. 긴급 수화상용이 뭐 별거냐.’ 


‘라져!’ 



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무기를 치켜드는 오퍼레이터들. 


그렇게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씨발.’



5분도 안 돼서 끝났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패배로. 


처음의 투지는 분명 좋았지만, 기세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싸움은 분명 있었다. 


그나마 사망자가 안 나온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하등한 육지생물 치고는 나름 노력했다는 게 보였다.


완전히 얕잡아 보고 있었던 로도스의 전투 수행 능력 수준을 조금은 상향조정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채 복귀한 오퍼레이터들을 본 박사의 첫 마디는 이랬다.



‘...미안하다.’ 


‘왜 사과를 하는 거지, 박사. 미안해야 할 건 우리인데.’ 


‘아냐. 내가 야식 사먹을 재화 아껴서 니들 정예화만 해 줬어도 이길 만 했는데.’ 


‘아니에요, 선배. 제가 아츠를 좀 더 일찍 켰어야 했는데….’ 


‘진짜 죄송함다, 대장. 제가 칼질 한 번만 더 했으면 확실히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검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저는 대장 사과 받을 자격 없슴다.’ 



박사는 연신 자책하고, 오퍼레이터들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그 광경을 보며, 글래디아는 조금이나마 올라갔던 로도스에 대한 평가가 다시 훅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공이 있는 사람은 확실히 칭찬하고, 과가 있는 사람은 제대로 문책하는 게 군문의 기본인데. 


이 두루뭉술한 분위기는 도대체 뭘까. 


이러니까 하등한 육지인은 안 되는 거다. 


그녀가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선수를 친 건 박사였다. 



‘...이거 뭐, 서로 사과만 하다가 날 새겠네. 그냥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우리 피차 미안해하지 말자. 너희도 나도 최선을 다해서 진 거니까. 그렇잖아.’ 


‘네 말대로다, 맹우여.’ 


‘박사님 말씀대로입니다. 전술에 오차는 없었고, 저희 또한 쓸 수 있는 화력을 전부 쏟아부었습니다. 귀책사유는 전장 그 자체에 있습니다.’ 

 

‘맞다. 전장이 너무 좆같았어. 시발 그 불 쏘는 달팽이 새끼가 두 마리나 튀어나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오케이. 그럼 일단 해산. 다친 사람은 의료부 가서 치료받고. 21시쯤에 오늘 전투 돌려보면서 반성회 할 건데, 올 사람은 와. 다들 고생 많았다.’ 


‘응, 박사. 이따 담배나 같이 피러 가자. 고생했어.’ 


‘나 또한 나름대로 개선할 점을 생각해 보겠다. 피곤하다면 반성회는 내가 주관해도 괜찮으니, 푹 쉬도록.’ 


‘식사 시간 때쯤 다시 오지, 박사. 실패한 뒤에는 맛있는 걸 먹으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라인 랩의 전통이다. 너도 어울려라. 내가 사는 거니까, 거절은 거절하겠다.’  


‘사리아 씨, 저도 같이 먹어도 될까요?’ 


‘앗, 나도 낄게.’ 


‘텍사스가 가는 거라면 나도!’ 


 

그렇게 글래디아가 말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왁자하게 떠들던 오퍼레이터들은 그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휘센터에 남겨진 건 박사와 글래디아, 그리고 로렌티나뿐. 


방금 전의 어수선한 풍경 탓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글래디아가 다시금 입을 열려던 찰나.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로렌티나가 박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저, 박사님.’ 


‘어, 상어야. 너도 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냐?’ 


‘죄송해요. 제가 폭주하지만 않았어도….’  



지휘센터 전등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원석충의 산성액에 머리카락 곳곳이 탔고, 몸에 걸친 의복 역시 누더기가 다 된 상태. 


무엇보다 피부 곳곳에 짓무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박사가 픽 웃었다. 



‘괜찮다고 1933218번 말했다, 인마.’ 


‘...그래도.’ 


‘뭘 시무룩해져 있고 그래. 빨리 치료나 받으러 가. 흉지겠다.’ 


‘......’


‘너 내가 뭐라 해도 안 갈 거지?’ 


‘......’


‘됐다, 앉아 봐.’     



코트를 벗어 로렌티나에게 걸쳐 준 뒤, 캐비넷에서 구급상자를 꺼낸 박사는 투덜대며 로렌티나에게 약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인마, 상어야. 내가 너 센 걸 모르겠냐. 너랑 나랑 손발 맞추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


‘그래도 시발, 나도 나름 머리 터져라 고민해서 너희들 배치하는 거라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괜찮은데, 가끔은 내 생각도 좀 물어봐주라.’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박사님.’ 


‘아니, 괜찮다니까 그러네.’ 



마치 글래디아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한 그 태도에, 그녀는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박사보다 더욱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은 로렌티나였다. 


어비설 헌터로서의 긍지는 어디다가 팔아먹고. 


평범한 소녀처럼 박사의 말 몇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로렌티나의 모습은, 글래디아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금방이라도 그 둘을 떼어 놓은 다음, 박사의 목을 움켜쥐고 을러메고 싶었다.


당장 내 부하에게서 그 더러운 손 치우라고. 


당신이 함부로 건드려도 되는 아이도 아니거니와, 그 역겨운 세 치 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라고. 



‘기운 내, 상어야. 내가 너만큼 믿는 사람 몇 명 없다. 이 정도로 너한테 실망하고 그러진 않아.’


‘아아, 박사님….’



그러나 발도 입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지에 돌을 매단 채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듯, 온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전투의 피로 때문일까.


아니다. 


어비설 헌터가 이런 하잘것없는 전투로 피곤을 느낀다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그럼 왜 이러는 걸까. 



‘감사해요, 박사님. 두 번 다시 이런 실수 저지르지 않을게요.’  



아아, 그랬다. 


로렌티나의 표정 때문이다. 


저까짓 남자의 말이 뭐라고. 


에기르에서는 취급도 안 할 저질 약품이 뭐라고. 


그의 말이 귓가를 스치고, 그의 손에 발라진 연고가 몸에 와 닿을 때마다. 


황홀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반짝이는 저 아이의 표정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겁니까, 로렌티나. 


당신 또한 에기르인이잖아요. 


지금 저 남자가 당신에게 하는 짓이 얼마나 급 떨어지는 짓인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실수해도 돼. 뭐, 어비설 헌터는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가끔은 사냥감 앞에서 쫄기도 하고, 빗맞추기도 하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부정하세요, 로렌티나. 


헌터는 실수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고고하고 우아하게, 에기르의 적을 모두 섬멸해야 하잖아요. 



‘에헤헤, 네. 기다림도 일종의 예술이라는 말씀이시죠?’ 



그게 아니잖습니까. 


기다림은 뒤처짐의 동의어일 뿐이에요. 


그 어느 도시보다 진보한 곳에서 태어난 당신이, 어떻게 그 단어의 의미를 착각할 수 있습니까. 



‘뭐냐. 오랜만에 스펙터식 화법이네.’ 


‘어머, 의도한 건 아닌데요.’ 


‘아무튼, 이따 같이 밥이나 먹자. 다른 애들이랑 같이.’  

 

‘피자도 있나요?’ 


‘부탁해 볼게. 분명 클로저네 구매센터에 냉동 피자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말에 기뻐하지 마세요. 


그까짓 피자 한 판이 뭐라고. 


다시 에기르를 되찾을 그 때까지, 우리는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일직선으로 나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빈껍데기뿐인 육지인의 말에 그렇게 활짝 웃지 마세요. 


당신은 에기르인이에요. 


지상을 영도해야 할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도리어 이 저속한 세상에 물들기라도 할 셈인가요. 


로렌티나. 


로렌티나!



‘...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 턱 밑까지 들어차고. 


그것들의 아우성에,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짧은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그 작은 소리에,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박사와 로렌티나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머, 대장? 계셨어요?’ 


‘뭐 하냐, 거기서.’ 



토끼눈을 뜬 로렌티나와, 덤덤한 시선으로 글래디아를 바라보는 박사. 


어째서인지, 그 시선에 입 안이 바짝 마르고 목 뒤가 따끔거렸다. 


너무도 건조한 이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디고 있기가 힘들었다. 


마른침을 삼킨 글래디아는, 성큼성큼 다가가 로렌티나의 팔목을 붙잡았다. 



‘글래디아 대장? 왜, 왜 이러세요?’


‘돌아가죠, 상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따 보자, 상어야. 그리고 너, 애 데려가는 건 상관없는데 치료는 제대로 받게 해 줘라.’ 


‘닥치세요. 당신에게 참견해도 된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는 그녀를 질질 끌고 지휘센터를 나서는 길. 


불현듯 로렌티나가 글래디아의 손을 뿌리쳤다. 


어찌나 세게 뿌리쳤던지,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였다. 



‘왜 이러시냐고요, 대장. 설명은 해 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로렌티나.’ 



그 순간, 로렌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붉은 동공에는 진심으로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 시선에, 글래디아의 머릿속에서 수천 가지 대답이 물거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왜 이러냐고요?


그걸 말해 줘야 압니까, 로렌티나.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벌써 당신에게 수백 번쯤 말했을 텐데요. 


품위를 지켜야죠. 


육지인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에기르의 고상함을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에기르의 유일한 대표자인 이상, 저들이 먼저 다가와 고개를 조아릴 만한 품격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뭘. 


품격을 보이기는 커녕.


우리가 이끌어야 할 하층민, 그 중에서도 가장 질 떨어지는 사람과 시시덕거리기나 하고. 


적절한 대답을 고르기 위해 글래디아가 고민하는 사이, 로렌티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세요, 대장.’ 

 

‘네?’


‘이곳 사람들이 하등하니, 에기르인으로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느니…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고요.’ 


‘.......’ 



글래디아가 말을 잃은 사이. 


로렌티나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시잖아요, 글래디아 대장. 제가 심해 교단에게 잡혀, 척추에 오리지늄을 주입당한 이후…어떤 삶을 살았는지.’ 


‘......’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때 저는 에기르의 고상함을 체현하기는커녕 웬만한 육지인조차 못한 상태였어요. 모두가 꺼려하고 무서워하는 광인. 너무도 순수해서, 모든 소통을 거부하는 고인 물.’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정신나갔다고 깔보는 사람도,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걱정하고 보살펴주려고 하는 사람도 정말 많았어요.’  


‘......’ 


‘그 중에서도 박사님은…저를 가장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분이란 말이에요. 저를 끊임없이 이해하려 하시고, 항상 제게 말을 걸어 주셨어요. 입은 좀 험하지만, 정말 좋은 분이에요.’ 


‘...상어, 당신.’



나쁜 물이 단단히 들었군요. 


라고 말하려던 글래디아였지만, 로렌티나의 표정을 본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도 육지가 마음에 안 들 때 많아요. 제 방의 인테리어를 볼 때마다 전부 박살낸 다음 새로 짜고 싶고, 이 함선을 볼 때마다 빈약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근데 좀 빈약하면 어때요. 좀 허술하면 어떻고, 좀 불완전하면 어떠냐구요. 자기보다 불완전하다고 타인을 깔봐도 되는 거면, 대장 눈 앞에서 육지인들이 ‘스펙터’에게 욕하고 돌을 던져도 뭐라 못 하셨겠네요?’   


‘...그건.’


‘하지만 육지 사람들은, 박사님은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제게 있을 곳을 주시고, 저를 치료해주시고, 제가 로렌티나와 스펙터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셨잖아요. 그런 좋은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뭐가 나쁜 건데요.’ 



날렵한 눈매에는 금방이라도 울 듯 서글픈 기색이 서려 있었지만.


입가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팽팽하게 경직되어 있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항명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로렌티나의 기세에, 글래디아가 멈칫한 사이. 



‘부탁드려요, 대장. 이제 그만해 주세요.’ 


‘뭘, 말입니까.’ 


‘에기르의 덧없는 이름에 목을 매는 거, 그만하시라구요. 저희는 이제 저희 도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


‘그냥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시면 안 될까요.’



에기르어로 중얼거린 그녀의 마지막 말에, 글래디아는 숨을 삼켰다. 


구슬픈 운율에 담긴 그 짧은 문장에 담긴 무수한 의미들이, 고막을 통해 그녀의 뇌리로 스며든다. 


네, 에기르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죠. 


하지만 이 땅 위에도 생명이 피어나고,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요. 


나약하고 야만적일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 거잖아요. 


따지고 보면 에기르라고 전부 완전한 것도 아니고요. 


대장이 어떤 생각으로 뭍을 밟았는지, 저는 잘 몰라요.


하지만 더 이상 대장이 고립되지 않았으면 해요. 


원한다면, 저희는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냥 눈꺼풀에 씌인 편견을 조금 덜어내기만 하면 돼요. 


그 목소리에, 글래디아는 피가 나도록 입 안을 짓씹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한순간 설득당할 뻔 했을 정도로. 



‘...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대장.’ 



하지만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안 됩니다. 에기르인은 에기르인답게 고고해야 해요. 당신 말대로, 저희는 에기르를 잃어버렸죠.’ 


‘그렇다면….’


‘아니, 그래서입니다. 저희의 태도가 이 세상에 비치는 에기르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기에, 더더욱 타협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하물며 그 박사와 사이 좋게 어울린다니, 언어도단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지금 글래디아의 태도는 망해버린 나라의 후광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짓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누군가는 아니꼽게 볼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우러러볼 수도 있지. 


그런 건 처음부터 상관없었다.  


옛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에기르는 글래디아의 모든 것이었다. 



‘얌전히 따라오세요, 상어. 오늘부터 박사와의 사적인 관계는 엄금하겠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지 않고, 에기르의 품위에도 반하는 일이에요.’ 


‘...그, 런가요.’ 


‘네. 그리고 지금 바로 방금 전의 전투에 대한 피드백을 하겠습니다. 환복하고 5분 뒤에 훈련장으로 내려오세요.’ 



오히려 더욱 의지를 다지며 로렌티나를 향해 손을 뻗는 글래디아. 


하지만 로렌티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싫어요.’


‘뭐라고요?’ 


‘저는 박사님과 함께 식사할 거예요. 21시에 다른 분들과 같이 반성회를 할 거고요. 그 뒤에도 박사님이랑 좀 더 이야기하다가, 잠드실 때가 되면 자장가를 불러 드릴 거예요.’


‘상어, 당신.’ 


‘죄송해요, 대장. 제가 가장 힘들어할 때, 박사님은 제 곁에 있어 주셨어요. 그러니까 저도 그렇게 해 드리고 싶어요.’ 



뜻밖의 항명에, 손을 내민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글래디아.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움직여 규정을 읊는 것 뿐이었다.


이제는 판단할 법원도, 집행할 기관도 없는 공허한 규정을. 



‘군법상 사유가 없는 항명은 즉결처형입니다, 로렌티나.’ 


‘네, 하세요. 대장이 에기르를 위해 변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저도 박사님을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공허함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씁쓸한 미소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돌아서는 로렌티나. 


글래디아는 그저 그녀의 살랑거리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잡아야 하는데. 


자신의 부하가 이 이상 망가지게 둬서는 안 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글래디아의 귓가에서, 박사를 위해서 법조차 무시할 수 있다는 로렌티나의 말이 몇 번이고 메아리치고. 


그 어떤 강대한 적을 마주했을 때도 담담히 물을 가르던 두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호흡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육지의 건조한 공기가, 폐를 건조하게 긁어댔다. 



‘로렌티나….’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조금 거칠고 난폭할지언정, 로렌티나는 훌륭한 어비설 헌터이자 에기르인이었다. 


그런데 고작 육지에 잠깐 있었다고 저렇게까지 변해버리다니. 


헌터라면 에기르를 위해 살며 에기르를 위해 죽는 게 당연하거늘. 


에기르 이외의 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 선언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하등하고 저급한 육지 인간 하나를 위해.



‘...박사.’



그래, 그 인간 때문이다. 


그 하찮은 인간이 감히 자신의 부하를 세뇌하고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 바꾸어놓았다.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줬다고? 

아니, 오히려 그 남자 때문에 로렌티나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거다. 


꽉 쥔 주먹에서 푸른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오고. 


부서져라 이를 악문 글래디아가 허공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그 남자를 천 갈래로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로렌티나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바. 


그래, 당장은 곁에서 지켜보자. 


그 남자가 어떤 간악한 술수로 자신의 부하를 타락시킨 것인지 자세히 파악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놈의 수법을 완전히 파악하면, 그걸 빌미로 로렌티나를 일깨우는 거다. 


놈의 눈 앞에서 로렌티나에게 박사의 추악한 진실을 낱낱이 까발리면서, 다시금 가르쳐 줘야겠지.


어비설 헌터는 바다에서 태어났으니, 마땅히 바다로 돌아가야 함을. 


그리하면 다시금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