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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으로....나한테 온 거죠?"


반사적으로 손님맞이를 하던 대답과는 다르게, 레드 씨와 박사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태도가 바뀌어버렸다.

나가라던가, 쫓아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위협만 하는 것처럼 나직이 물었다.


시선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본모습을 드러낸다고 꺼려질까, 하는 걱정이 살며시 든 건,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사정을 털어놔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손님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대답하며 웃옷을 대충 옷걸이에 걸며 대답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있어? 로도스 아일랜드의 이발사....아니 미용사인가? 어쨌든 머리 잘라주는 아가씨."


"....미용사."


그 말을 곱씹자니 머리가 아팠다.

분명 나는 그때 이 손님을 죽일 작정이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겁도 없이.

아니면 나를 그냥 '미용사'로만 보고 온 걸까?


"오늘은 좀 불편했을까? 친구들하고 시간 보내고 있는데 쳐들어와서. 아까 보니 박사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실례할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태평한 걸까.


이발천을 둘러주는 척 목을 졸라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안 하는 걸까?

가위를 바꿔 잡고 관자놀이를 찍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안 하는 걸까?

최소한 약이라도 오르라고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릴 거란 생각도 안 하는 걸까?


"....어떻게 잘라드리면 될까요."


목소리가, 앞치마를 두르는 손이 떨린다.


"옆머리랑 뒤쪽이 많이 자라서, 4~5센티미터만 잘라줄 수 있을까? 모양이 유지되는 선에서."


커다란 모닝빵을 보는 것 같은 머리스타일이다. 

이 사람이 말하는 대로 좀 길어져서, 무게 탓에 맛있게 부풀지 않은 모양새일 뿐이다.


....그래.

믿고 머리를 맡겨주는 거니까.


아마 내 가게를 열었다면 이런 사람을 맞아야 할 때도 있었겠지.

먹고살려면 이런 사람의 머리 정리도 해 줘야 할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때에 비하면 조금 더 쉽게 감정이 억눌러졌다.


이발천을 평범하게 둘러주고, 머리빗으로 얇은 백금빛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사락사락 하고 머리빗으로 전해지는 감촉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다.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지내는 건 좀 어때?"


아마 여기에 먼저 들어와서 살고 있는 입장에서 평범하게 묻는 안부인사일 것이다.

예전에 일했던 공장에서도 일주일쯤 지났을 때 먼저 와 있던 선배 같은 사람이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 사람은 보름 후에 광석병이 심해져서 그만두었다고 들었지만.


"....잘 지내고 있어요. 같이 들어온 사람들도 있고, 어쨌든....일하고 있고. 어떻게 오늘 밥을 해결하지, 하는 문제도 없고."


"그건 나하고 비슷하네. 나도 여기 오자마자 가장 만족스러웠던 게 세 끼 밥 먹는 거였으니까."


"당신도 리유니온이었어요? 거기 있으면서 본 적은 없던 것 같은데."


"그렇진 않아. 그냥 손기술로 하루하루 먹고 사는 좀도둑이었지. 감염자가 되고서 일자리도 딱히 없었고, 머물러 사는 데도 따로 없었고. 어떻게 길에서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나네."


빗어내린 머리카락의 전반적인 길이를 눈어림으로 재고, 이 사람이 이야기한 정도의 길이만큼 가위를 넣어 자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하며 들리는 소리와 가위끝에서 전해지는 감각에 신중을 기한다. 이야기에 집중하다 잘못 자르지 않도록.


"가족은 따로 없었어요?"


"응. 오래 전에 헤어져서 얼굴 기억도 안 나. 형제자매들이 있긴 했던가. 너는 어때?"


"남매가 아홉이었고, 저는 여섯째였죠. 그 일 있고 리유니온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끔 얼굴을 봤던 것 같아요."


물론 리유니온에 들어가고서는 그런 일은 없었지만. 혹시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조금 자리가 잡히면 가족들을 만나러 갈 수 있을까. 1년 넘게 소식이 끊긴 딸이고, 여동생이고, 언니, 누나이니 걱정하겠지.


"....지금도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손님이 지금까지하고는 다른, 무거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내가 먼저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일부러 표정을 보지 않으려, 가위질에 집중하는 척 한다.


"내가 의도해서 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 때문에 당신은 가게를 잃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괴로운 숨을 삼키고서 이야기했다.

아마 이 사람도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서 긴장을 했을 터고, 나도 이 사람에게 험한 말이 나가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가게가 불타고, 당신이 도망치는 걸 봤을 때, 처음에는 왜 하필 내 가게였을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당신을 처음 봤을 때 피가 거꾸로 솟았던 것 같아요."


"알아. 이해해. 반대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아마 난 무슨 짓을 해도 그 대가를 치르지 못하겠지. 그래서 네가 그때 날 죽였어도, 할 말이 없었어."


"...."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자신이 나를 마주했을 때 떼어내라던가, 변명이라던가 하지 않았었다. 그저 내가 화내는 걸 받아내면서, 단지 미안하다고 온 힘을 다해 말했을 뿐이었다.


5년 반 동안 모은 6500파운드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변변한 직업도 없어 도둑질로 연명했던 사람이니, 비록 비정규직이라지만 일해서 돈을 모았던 나하고는 사정이 다르다.


"네가 얼마나 노력해서 만든 가게인지 나는 아마 모르겠지. 말로 들어도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지나갔을지, 얼마나 많은 감정이 엮였는지 상상도 못할 거고. 그래도....아니 그러니까, 미안해. 나 때문에 가게를 잃게 해서. 그리고 여기서라도, 미용사 일 잘 되었으면 좋겠어. 같은 감염자로서."


가위질을 하던 손이 멈추었다.

이 사람에게 그 일은 하나의 사건일 뿐, 그 일로 쌍방이 잘못했다거나 하고 말하지 않았다.


"....이젠 괜찮아요. 만약 제 가게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다른 가게가 불탔을 거니까요. 잘못한 건 불을 지른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에게 쫓긴 당신이 아니에요. 그리고....믿고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지금의 나는 이제 그때 일을 냉정하게 볼 수 있다. 결국 나는 대항할 수 없는 누군가 대신, 눈에 들어온 사람만을 잘못된 사람으로 보고 해하려 했다. 그런 사람들이니까, 이 손님이 잡혔다면 아마 험한 꼴을 당했겠지. 앞뒤 안 보고 소이탄을 던졌다고 하니.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자기 잘못만을 두고 사과하고 있다.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오히려 나였는데도.


"....그리고 그때, 정전기 아츠. 죄송해요. 그때 많이 고통스러웠죠."


"괜찮아. 각오했었어. 그건 나도 당신한테 잘못해서 생긴 일이었으니, 받아들일 수 있어."


사각, 사각 하고 다시 가위질을 계속한다.

조금 풀린 분위기였지만 괜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이 감돈다.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왜 로도스에 들어오게 된 걸까.

그 박사라는 사람하고, 무언가 연결되어 있는 걸까. 예를 들면 이 사람도 어렵게 살았다 했으니....


"....당신도."


"응?"


"박사라는 그 사람한테, 빚을 진 게 있어요?"


"빚이라니?"


"...."


대답하기 어려웠다.

개인사를 괜히 들추는 게 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잠깐 생각하던 손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마치 거울을 통해 이쪽을 보는 것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빚이 있어서 사람들이 로도스 아일랜드에 머무른다면 전부 빚쟁이게.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길거리에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약 좀 구해달라고 말 건 사람이 로도스 아일랜드 직원이었을 뿐. 뭐, 목숨빚은 진 거랑 비슷하려나."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 꽤나 그런 사람들이겠지만, 하고 손님이 덧붙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내 시점에서 봐선 이상한 사람이거든."


"박사....라는 사람이요?"


"응. 어떻게 보면 높으신 분 같은 건데도 허물없이 대해주고, 자기가 손해봐도 자기 사람들 손해는 안 보게 하려고 하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상한 사람....이네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친다. 생각해보면 생면부지의 남인 나에게, 검증하는 과정 같은 것도 없이 미용사 자리를 덜컥 내주었지. 정말 이상하긴 하다.


다시 한 번 손님의 머리를 빗어내려 길이를 확인한다. 1센티미터 정도만 더 잘라서 길이를 맞추면 완성이다. 커트는 과정이 짧아서 참 좋은 것 같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거 없으니까. 뭣하면 술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아까 박사가 다른 손님? 한테 하는 거 보니까 그런대로 친한 것 같던데."


레드 씨 이야기인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걸까, 싶다. 얼핏 분위기는 시끄럽고 호쾌한 사람인데, 정작 박사라는 사람은 이야기할 때도 좀 신중하고 조용하다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나한테 미용사 자리를 내준 건 신중하곤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정말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호의를 정직하게 준 사람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다.


"다 됐어요."


가위질을 마무리하고, 빗으로 쓸어내려 원하는 모양이 나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작은 거울을 건네주었다. 동시에 뒤에서 조금 더 큰 거울로 뒤쪽을 보여주어 손님이 앞뒤쪽을 모두 확인하게 하자, 만족스러운 듯 손님이 빙긋 웃었다.


"응. 수고 많았어. 날짜랑 이름 써 놓고 가면 되려나? 생활부 소속이면 월급날에 한 번에 받았었지?"


"'아직 한 달이 안 되어서 오늘 일한 건 오늘 나올 거에요. 여기 이름 적어주고 가시면 되세요."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손님명부를 꺼내 건네주자, 주머니에서 뾰족한 깃펜 같은 걸 꺼내 슥슥 이름을 적어주었다.

헤이즈....라고 하는구나.


"고마워. 다음에도 머리 자르러 와도 돼?"


"네?"


명부를 받아들다 생각지 못한 말에 깜짝 놀라 얼굴을 보았다. 옆쪽 의자에 내려놓았던 모자를 집어들던 헤이즈 씨가 왜? 하는 눈으로 보았다.


분명 손님이라 하더라도 나하고는 척을 졌을 사람일 텐데.

이 사람은 의도는 아니라지만 내 가게를 한순간에 없애버렸고, 나는 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사이일 터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미용실 손님으로서.


"아, 알겠습니다. 다음에도....머리 자를 때 이야기해 주세요."


당황해서 바로 대답이 안 나왔지만 금방 다시, 아까보다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헤이즈 씨도 정말 고맙다는 듯 모자를 쓰고 나설 준비를 한다.


"안녕하세....윽." 


그때 키 작은 밤색 단발머리의 우르수스족 여성이 선실에 들어오려다 멈칫했다.

어....이 사람 어디 소속이었지? 생활부이긴 할 텐데.


"어서 오세요. 머리 자를 수 있는데."


"어....아니요. 그 불포족 직원분한테 맡길까 하구요. 매번 잘라주시던 분이니...." 


슬슬 피하려는 듯, 뒷걸음질을 치며 나가려 한다.

그걸 보니 내가 헤이즈 씨한테 했던 짓이 온 선내에 퍼졌구나 하는 게 실감이 난다.


1주일 동안 사람들이, 들릴 듯 말 듯 나를 보고 이야기했던 것도 기억이 나고.

그래서 손님이 없었던 거겠지.


"응? 괜찮겠어? 그 사람한테 머리 자르려면 꽤 기다려야 될걸. 서너 달 걸릴 거래." 


"어? 헤이즈 씨....?" 


우르수스족 여성이 헤이즈 씨는 못 봤는지 놀란 듯 그쪽을 보았다.

나도 헤이즈 씨의 말에 귀를 의심하면서 바라보았다. 왜, 문제 있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도 놀랐는데 이 손님은 더 놀랐겠지.

그 사건의 피해자가 가해자랑 같이 있는 상황이니. 심지어 머리까지 맡겼다고 하니.


"그래서 나도 방금 머리 자른 참이거든. 머리 잘 잘라주던데. 그 매번 잘라주던 그 사람하고 딱히 차이도 안 나고. 머리 당장 잘라야 되면 한 번 맡겨봐봐." 


헤이즈의 느긋한 말에 우르수스족 여성이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헤이즈 씨와 나를 당황스러운 듯 번갈아 본다.

얼마나 그렇게 고민했을까.


"그, 그래....? 그렇잖아도 그 직원분 거의 서너달 걸린다고 했으니....한 번 부탁해 볼까. 옆머리랑 뒷머리 손질좀 해 줄 수 있을까요?"


"네, 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아, 아니지. 잠시만요. 금방 치울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가져와 조금 전까지 헤이즈 씨의 머리 손질 뒷처리를 하고, 세 번째 손님을 의자에 앉힌다.


"그럼 재밌어질 것 같으니 조금만 더 보다 갈까. 교대 시간까진 좀 더 남았고. 미용사 아가씨, 과자 같은 건 없어?"


"어....아직 들여놓진 않았는데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이즈 씨는 선실 구석의 캐비닛을 뒤적거리더니 겉옷을 걸치며 말했다.


"그래? 그럼 좀 사러 갔다올까. 우유맛이랑 커피맛이랑 어떤 게 좋아?"


"어....네?"


"우유맛이랑 커피맛이랑?"


"....커피맛, 이요."


흐흥, 하고 웃는 듯한 목소리를 내더니 헤이즈 씨가 선실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는 것도 잠시, 정돈한 자리에 세 번째 손님을 앉히고 다시 빗으로 쓸어내리기 시작한다.


이번 손님은 좀 머리카락이 억센 것 같다. 매일 손질하는 데에 고생 많이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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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알았는데 레드가 수지보고 '수지 씨'라고 하더라

왜 제대로 안챙겨봤지 하면서도 수지가 독타한테 반말 툭툭 던지고 있으니 좀 묘함


뭘 계기로 수지가 독타한테 말을 높이도록 해야될까



기다려 줘서 고맙고, 오늘도 찾아와 줘서 고맙고,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