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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야드 드디어 떴나...!?"


큐브가 반응하고.

한 생명이 태어난다.


파아앗-


환한 빛 속에서 태어난 금발의 여인이 눈을 뜬다.

그녀가 눈을 뜨고 가장 처음으로 본 것은 지휘관이었다.


"훗."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비스마르크는 웃었다.

사실, 지휘관과는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비스마르크 쯔바이.

상처로 약화됐던 몸을, 새로운 의장을 통해 고치고 더 업그레이드 시켜 탄생한 존재였다.

즉, 비스마르크의 진화판이었다.


"메탈 블러드 전함 비스마르크야. 오늘 처음 본 사이도 아닌데, 내 새로운 모습에 놀라기라고 한 거야?"

"아......"


지휘관의 표정이 안 좋았다.

마치 큰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한 듯이.


"왜 그러지?"


비스마르크는 그가 걱정되어 다가갔다.


"클래식은 마음을 안정시켜주지. 혼란스럽다면, 잠시 쉬면서 음악을 듣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야."


목소리는 옆에서 들렸다.

비스마르크 쯔바이는 놀랐다.

옆에서 들린 그 목소리는...


바로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설마...."


비스마르크가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봤다.

거기에는 이미 또 하나의 자신이 서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충격적인 장면이지만, 비스마르크 쯔바이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나는 내가 아니었군. 큐브에서 재탄생한 존재.... 즉, 2호기였나."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의 목소리.

그러나 마음은 무거웠다.


"....어쩐지, 빛이 너무 환하더라니."


2호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내 역할은 뭐지? 너와 합쳐져서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면 되는 걸까?"

"....이미 돌파 작업도 끝났어."


확실히, 눈앞에 있는 비스마르크 쯔바이에게서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럼 나는..... 쓸모가 없네."

"......"


2호기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보니, 내 큐브에 공유됐던 기억 중에 2호기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 있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오로지 지휘관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전쟁에 나서지 않고 연인으로써 곁에서 있는 일.

그러나 그것 또한 중요한 역할이다.


전쟁에 시대다.

마음을 치료하지 못하면 병들어 광기에 물드는 것이 전장.

모두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정신 캐어 또한 중요한 일.


이는 단순한 성욕 처리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메이드와는 다른 의미로 지휘관의 마음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그 또한, 이미 자리가 찼어."

"나는 3호기였나."

"......"


2호기조차 아니다.

3호기였다.

게다가 이미 돌파가 끝났다면 4호기, 아니면 6호였을지도 모를 일.


이렇게나 많은 '나'들이 한 세계의 모항에 출현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이 모항의 지휘관은 우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네."


그러나 3호기 비스마르크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족해."


곁에 있을 자리가 없다.

전장에서도.

지휘관의 품에도.


그렇다면 갈 곳은 하나.


"퇴역 절차를 밟지."

"......"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 도시는 평화 그 자체니까."

"기대되네."


3호기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절차는 간단했다.

전쟁을 잊고.

싸움을 잊고.

평범한 여자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것.


"축복 받은 삶이야."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그럴까?

이건 축복일까?


"....지휘관. 우리는 떨어져도 함께일 거야. 그렇지?"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언제든 내 개인 회선으로 연락 줘. 데이트하자."

"응...."


비스마르크는 곱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는, 어쩐지 슬픔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


비스마르크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혼자서 식사를 했다.


"오늘도 훌륭하네요. 셰프에게 잘 먹었다고 전해주세요."

"분명 기뻐할 겁니다, 비스마르크 씨."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비록 아무 공적도 없이 퇴역한 일반인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좋게 대우해주었다.


"비스마르크 씨."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는 하셨나요? 저희 가게에서 퇴역 군인분들을 위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넨다.

그 중에 비스마르크가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나를 알아.'


정확히는 그녀를 아는 건 아니다.

1호기의 활약상을 아는 거지.


철혈의 재상.

모항의 영웅.


비스마르크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용과 같은 의장을 앞세우며 적의 발을 묶고,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격퇴하는 그 모습은 그녀를 수많은 사람들의 우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야말로 전쟁의 신.


그렇게 유명한 이가 도시를 거닐고 있으니, 비록 그녀 자체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절로 안심하게 된다.

3호기가 후방의 도시에서 여유롭게 살아간다는 건, 전선이 승리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와아아! 구닌 언니다!"

"싸인해주세요!!"


아이들이 몰려들며 그녀의 증표를 원한다.

비스마르크는 웃으면서 싸인을 해주었다.


'사실, 이런 건 가짜이다만....'


비스마르크는 미소로 사람들을 대해주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들이 보는 건 내가 아니야.'


같은 비스마르크이지만, 다르다.


'내가 누리는 것도, 나의 공적이 아니고.'


같은 비스마르크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가장 먼저 지휘관을 만난 1호기는 아직도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철을 부수고 있다.

말 그대로 철혈.

피와 철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훔치고 있어. 그 모든 걸.'


물론, 모든 2호기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와아아아 변태뷰지시오후키 레겐스뷰르크다!"

"지휘관님 앞에서는 변태처럼 다리 벌리고 시오후키 뿌린다던데 진짜에요!?"

"이새끼들이!? 혼 내줄 테다!!"


평화로운 삶에 적응한 자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짊어진 우상으로서의 면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전장은 전장.

도시는 도시.


레긴스는 각자의 역할이 다를 뿐이라면서 그녀를 설득했었다.


-민심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지휘관은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그렇다고 후방을 내버려두면 그건 그대로 사람들이 불안해 할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의 민심을 관리하는 게 우리의 역할 아니겠어?


정당한 말이었다.

아니, 정론이었다.


"여기가... 우리들의 전장인 건가."


비스마르크는 길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훑었다.

전장에서 수많은 생명이 갈려나갈수록 도시는 평화로워진다.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이 행복의 저편에는 수많은 희생이 존재했다.


'나의 동료들은 지금도 피를 흘리겠지.'


사실 그 말은 조금 틀렸다.

나의 동료가 아니다.

1호기의 동료지.


"........"


그러나 그게 중요할까?


중요한 건 마음이었다.


'지키고 싶어.'


철혈을 책임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생명이 위태로운 중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던 이유는?

불완전한 방법으로라도 상처를 치료하고 전장에 나선 이유는?


비스마르크는 큰 부상을 입었었다.

큐브가 손상될 정도의 부상으로 인해, 메타화 침식이 일어났고...

그 침식을 의장한테 전가했다.

그러나 쉽게 해낼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들어간 시간과 물자, 그리고 노력.

또, 그녀는 회복할 때까지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흘린 전우들의 피와 땀...


큐브에 담긴 역사과 기억, 그리고 감정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이 도시는 내가 없어도 괜찮아.'


잘 적응한 이들이 도시를 보살피고 있다.

전쟁의 신은 이런 평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나의 존재 가치는.....'


비스마르크는 평화의 정반대 방향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평화의 도시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별 거 아니야."


1호기 비스마르크가 지휘관에게 미소를 보였다.

격한 전투가 있던 날이었다.

오늘도 무사히 승리를 쟁취하고 복귀했다.


"그런데 괜찮아?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쉬지 못해서 그런 거야. 마침 긴 전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됐으니 이제부터 푹 쉬면 나아."

".....큐브에 무리가 간 건?"


지휘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비스마르크의 큐브는 메타화에 침식되고 있었다.

그걸 의장에게 전가하면서 침식을 막고 있지만....

전투가 거듭되면서 의장이 침식 허용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 몸은 내가 아니까."

".....알았어. 가서 푹 쉬어."

"그래."


비스마르크는 미소를 짓고 지휘관실을 나섰다.

그녀는 허리를 곱게 펴고 똑바른 자세로 복도를 또각또각 걸었고.

자신의 방 화장실로 직행했다.


"쿨럭..!"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하아.... 하아......"


검붉은 선혈이 세숫대야를 물들였다.

입가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나....'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멀쩡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드넓은 대지와 바다마저 황폐해지는데 한낱 생명이 어찌 버틸까.


동료들은 지쳐갔고.

지휘관도 피폐해진다.

그걸 캐어하기 위해 여러 장치가 준비되어 있긴 하다.

2호기가 곁에서 지휘관을 보살피는 것도 그 중 하나.


그러나 무엇이든 한계가 있는 법이다.


"아직...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철혈의 재상이나, 단순히 그런 위치 때문에 모두를 위해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지키고 싶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고.

지키기 위해서 돌아왔다.

지키기 위해서 무찔렀다.


모든 것을 동료와 지휘관을 위해서 바쳤다.

그러나 이제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되고 있었다.


"......3호기를 돌려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쓴웃음이 나왔다.

3호기라면 이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줬을 터.


"무엇이든 스페어가 있어야 안전한 법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약해지면 안 돼. 방금 그 생각은, 내 나약함이 낳은 의존성이야."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3호기는 자신의 삶을 찾아 평화를 걸었다.

그건 그녀도 원했던 일이다.


'나는 얻지 못한 평화를, 2호기랑 3호기가 대신 이루어주고 있어.'


그렇기에 더욱 정진해야 한다.

전진, 전진. 오로지 앞을 향해.

몸이 불살라지고 영혼이 바스라져도.


오직 앞을 향해 나아간다.


'각오는 충분히 했어.'


희생이란 상대적인 동시에 절대적이다.

나 하나로 모두를 지킬 수 있다면, 그건 저울질할 가치가 없는 판단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영혼이 침식되는 것도 감내하고 이곳에 돌아왔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녀의 죽음으로 평화가 꽃 피우겠지.

생명이 순환되어 또 다른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나 하나로 끝나면 그만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1호기는 깜짝 놀라 뒤를 봤다.


"오랜만이야."

"....3호....?"


오래전에 모항을 떠났던 3호기였다.


"도시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어야 하잖아. 왜 이런 곳에 왔어."

"공교롭게도, 나도 너라서."

"......?"

"역시, 몸이 버티질 못하고 있어."


3호기가 다가와서 1호기의 상태를 살폈다.


"의장이 더는 침식을 막을 수 없게 된 거지?"

"......."

"허용 한계를 넘어서 침식이 다시 네 큐브에 쌓이고 있는 거야."


속일 수는 없을 듯했다.

1호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머지않았어. 곧 전쟁이 끝나. 그때까지는 버틸 수 있어."

"그 끝은 공허만이 남겠지."

"아니. 다른 이들의 행복이 남아."


1호기가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자 3호기가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동료의 죽음 위에 서고 싶어하지 않아."

"내가 그걸 원해. 괴로워도 나를 밟고 서기를."

"훗... 그 부분은 마음이 맞네. 나도 그걸 원해."

"....?"


앞뒤가 안 맞는 말에 1호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퇴역해서 의장이 없고, 너는 전장에 있되 큐브의 정화가 필요해."

"무슨......"

"나를 밟고 서."


3호기가 미소를 흘렸다.


푹-


그녀가 자신의 심장에 손을 쑤셔 박았다.

그리고 자신의 핵인 큐브를 형상화하며 꺼내었다.


"너.....!"


1호기는 재빨리 쓰러지는 3호기를 붙잡고 조심히 바닥에 눕혔다.


"이게 무슨....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도시에서 오랫동안 지내봤어. 평화롭고, 안전한 도시였지."


3호기가 피를 흘리며 말한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3호기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 도시에는 내가 필요치 않아."

"아니야! 네가 있기에 평화로운 거라고. 네가 있어서... 그들도, 나도....."

"그들이 행복한 건, 네가 있기 때문이지."


3호기가 1호기의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함이 묻어 났다.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피가.


"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야. 절대 사라져서는 안 될..... 나의 우상."

"안 돼. 안돼안돼안돼. 나는..."


1호기가 절규했다.

그녀가 원한 건 타인의 희생이 아니었다.


"난 지금으로 만족하고 있었어. 2호기랑 너가 각자의 장소에서 행복하게 살아주면 그걸로 난...."

"나는 지금에서야 만족했어."


3호기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진 채 사라지지 않았다.


"2호기는 지휘관의 곁에.... 너는..... 동료들의 곁에......"


서서히,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눈빛이 사그라지고 숨이 약해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미소는 진해졌다.


"나는.... 너의 곁에......"

"아...."

"모두에게는 비밀로 해줘."


3호기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1호기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조용히... 모두의 곁에서 함께 싸우고 싶어. 너를 통해서."

".....함께 싸울 거야. 너와 내가, 모두와 함께."

"후훗......"


손에 힘이 풀린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큐브가 바닥을 굴렀다.


비스마르크는 힘없이 늘어진 그녀를 껴안고 울었다.


3호기를 부둥켜 안은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피 묻은 네모난 큐브였다.








"전 포대, 공격!!"


비스마르크가 선두에서 포격을 개시한다.

그녀의 뒤에 있는 수많은 함대 또한 집중 포화를 시작했다.


"좋아, 길은 열렸다. 전진하라!!"


비스마르크의 위용은 그 어느 때보다 대단했다.


"굉장한데? 그런 출력을 대체 어떻게 낸 거야?"

"오늘의 언니는 평소보다 더 대단하군."

"최근 좀 지친 거 같아서 침식이 걱정됐는데, 단순히 피곤한 거였나 봐?"

"......."


동료기들이 그녀를 지나치면서 한 마디씩 뱉고, 적을 향해 돌격했다.

사실상, 패주하는 적을 쫓는 잔당 처리에 가까운 전투였다.


"승리가 목전이다! 돌격해라!! 적을 무찔러라!!"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하는 전우들.

그 뒷모습을 보며 비스마르크는 맹세했다.


'희생의 순환. 그 고리를 끊겠어.'


그 생각에 호응하듯, 그녀의 가슴 사이에서 푸른 빛이 발했다.


"....함께 해내는 거야."


너와 내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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