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속보

대동법 제대로 배웠는데

왜케 서인들 중 산당계열(김집 등)이 반대했는지 알게 됨


쌀로 공납을 대체해서 내면
백성들은 편하지만

일단 조정 입장에선 골칫덩이였던 거임

경기도나 강원도ㆍ황해도처럼 서울이랑 가까운 지역은 운반이 비교적 편하지만,
그외 충청ㆍ전라ㆍ경상처럼 거리가 먼 지역은 운송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거였음.

특히 더 많이 드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내야되는 공납들 상당수가
나무 같은 걸 빼면,쌀보다 가벼웠기 때문에 운반비가 덜 드는데,
이런 것들을 쌀로 책정해서 거두면,
옮겨야될 세미(稅米)도 늘게 되고,그에 따른 운반비 증가도 무시 못 하며,

더군다나 삼남(충청ㆍ전라[제주포함]ㆍ경상)의 조운선들이 항상 거쳐가는 충청도 태안반도 해안의 항로에 물살이 엄청 세서
조운선들이 침몰한다는 거였음.

실제로 이쪽 서해안에 침몰선들이 자주 나오는 건 유명한 사실일 정도로,
물살이 ㅈㄴ 셈.

특히나 전세로 거두는 쌀들도 옮기다가 침몰해서 날아가는 게
한두푼이 아닐 정도였는데,
여기에 대동미까지 걷는다?

조정 입장에선 고려해야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란 거지.

그래서 효종대 영의정 김육은 대동법 확대실시시키려고,
태안반도 일대에 운하를 파자고 제안했는데,
막상 파보니 밀물ㆍ썰물 때 토사가 그대로 다시 돌아와서,3년 해보고 포기했다함.

그래서 다시 이번엔 태안반도에 길을 닦아서,
남쪽에 조운선 정박시켜서 쌀을 수레로 옮기고,
그걸 반도 북쪽까지 옮긴 다음에 다시 배에 실어서 운송하자고 했더니

당연히 태안쪽 주민들이 다 반대했다함.
(공물을 옮기는 게 누군지 생각하면 당연할 듯)

+거기에 지방 주민들 중 대토지 겸병하던 양반들의 반대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도 사실임.
근데 숙종대쯤 가면 흉년이 들어서 공납을 안 거두면,대동미도 안 내도 되니까 오히려 이득이라는 판단 때문에 반대 여론도 사라졌다더라.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대동법 시행은 차차 이루어짐

최초는 광해군 때 영의정 이원익의 요청으로 경기도에서,
그 다음으로 인조 때 삼도(강원ㆍ충청ㆍ전라)에서 했다가,여러 반대여론(지역양반들의 반대ㆍ방납인들의 반대)문제점(양전이 안 되어 있었음) 때문에 강원도로만 축소됨

이후 효종ㆍ현종대에 충청ㆍ전라에도 시행되었음(김육의 요청/경신대기근 이후 허적 등의 요청)

현종 때 경상관찰사 이원정의 요청으로 경상도에서도 시행되었고

황해도는 1700년대 숙종 때 시행됨.

평안도ㆍ함경도는 군사ㆍ외교적 이유로 사신접대ㆍ국경방비 때문에 시행 안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