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짜르정 하에서 까잔 따따르족은 극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정부에게서 레닌 훈장을 수훈받은 오늘날 따따르 자치 쏘비에트 공화국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다. 지난 10년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공장들과 제분소들이 지금까지 건설됐다. 공업생산량은 이 기간 동안 7.5배가 증가했다. 따따르 공화국은 또한 농업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성공을 거뒀다. 1940년대 초반 무렵 전체 농가의 94.6%와 전체 경작지의 99.8%는 집단농장으로 합병됐다. 따따르 공화국의 들판은 현재 5,444대의 트랙터와 3,050대의 콤바인으로 경작되고 있다.


문화적 발전의 영역에 있어서 따따르 공화국의 성취들은 실로 전무후무하다. 보통교육과 초등의무교육은 쏘련 전역이 그렇듯, 이곳에서도 법으로 자리매김했다. 1939~40년 당시에는 3,694개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있었으며, 그 중 1,732개교가 따따르어로 가르쳤다. 혁명 이전 이 지역에서 따따르어 학교는 35개교밖에 없었다. 오늘날 따따르 공화국에서 9세~50세 사이 연령대의 인구 중 문해율은 90.4%에 달한다. 짜르정 하에서 150년 동안 까잔 대학교에서는 오직 6명의 따따르인들만이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오늘날 따따르 공화국의 14개 대학교에서는 11,0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총 114개의 잡지와 정기 간행물들 중에서 절반은 따따르어로 출판되고 있다.


1937년 말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최고평의회 선거 유세에서 길마노바(Gilmanova)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따따르 민족의 일원입니다. 저는 10월 혁명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짜르 전제정의 억압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구전과 전승들로부터 짜르 치하의 로씨야에서 따따르인들이 어떻게 짓밟혀왔는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방금 18살이 지났습니다. 이 해는 저에게 있어 특별하게 중요한 해입니다. 바로, 생애 최초로 투표하러 가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수십만의 따따르인들도 저와 함께 쏘비에트 선거에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쏘비에트 대지의 평등한 시민이며, 민족적 차별은 이제 옛날 옛적의 과거로 되었습니다."


2.


바쉬끼르 자치 쏘비에트 공화국은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뒀다. "제2의 바꾸"가 건설되고 있으며, 석유 생산은 바꾸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바쉬끼르의 농업은 집단 농업으로 전환됐으며, 농경지들은 123개의 기계-트랙터 기지(MTS)들이 관할하고 있다.


혁명 이전 바쉬끼르의 인민들은 고유의 문자를 가지지 못했다. 오늘날 이들은 쏘련의 가장 선진적인 인민들 중 하나에 속한다. 바쉬끼르 자치 쏘비에트 공화국에는 현재 4,854개의 학교와 68만 명의 학생들이 있다.


바쉬끼르 공화국은 고유의 문화를 창조했으며, 일군의 민족시인들과 민족작가들을 배출했다. 일곱 개의 신문들과 4개의 정기 간행물들이 공화국의 수도인 우파(Ufa)에서 간행되고 있고, 다양한 지역들을 통틀어 82개의 신문들이 발행되고 있다.


바쉬끼르의 여성으로서, 제이투나 쉬가부트디노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초라한 농가에서 모든 일생을 보냈던 어느 농민의 딸입니다. 현재 저는 붉은 군대에서 정치위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 공화국은 번창하며, 교양있는 문화적 생활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혁명 이전에 비참한 일상을 살았던 바쉬끼르의 인민들은 오늘날 쏘비에트 공화국들의 대가정에서 완전한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3.


쏘련에서 유대인들의 지위는 쏘비에트 민족정책의 승리를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918년 7월에 레닌이 서명한 쏘비에트 정부의 포고령을 통해 반유대주의는 중대한 범죄로 지정됐다.


쏘비에트 권력은 첫 번째 시기에 우끄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유대인들이 밀집해서 거주했던 곳들을 중심으로 유대인 민족 구역을 창설했으며, 1934년에는 극동에 비로비잔 유대인 자치구가 형성됐다.


(...) 비로비잔 유대인 자치구는 5개의 구역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8만 제곱킬로미터의 토지를 차지하고 있다. 비로비잔 자치구에는 쏘련의 모든 공화국들과 해외로부터 자발적으로 이주한 유대인 근로대중들이 정착했다.


이제 자신들의 나라와 땅을 가지게 된 유대인 집단농장 농민들은 사회주의 농업에 성공적으로 종사하고 있고, 경이로운 결과를 내놓으며 "유대인들이 농업 노동을 정복할 수 없다"던 부르주아지의 오랜 거짓말을 행동으로 논박했다.


비로비잔 시에서는 공장들과 제분소들이 건설됐다. 유대인들의 민족어로 새로운 사회주의적 문화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유대인 자치 지역의 형성은 오직 쏘비에트 제도 하에서 피억압 민족들의 완전한 사회적, 민족적 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직 사회주의 국가에서만이 소수민족의 경제적, 문화적 생활이 진정으로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의 모든 노동자, 농민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이다.


― Y. M. Chekhalin, ≪The National Question in the Soviet Union≫, Workers' Library Publishers, 1941, pp.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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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이런 민족주의에서 탈피한 정책들은 본받아야 하겠고


특히 지방에 좀 변두리인 곳에는 타타르의 사례처럼 대학들을 건설할 뿐만 아니라 도서 보급, 정보 보급, 정보 공개 등을 통해서 대대적인 지식의 비대칭성 해소 정책을 펼쳐야 할 거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