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대전쟁이 끝났다. 마국에 대한 인류의 완벽한 승리. 인류 연합의 승리를 이끈 국가 얀데스 제국에서는 어느 동네에서나 승전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대전쟁의 주인공 황녀와 용사를 찬양하고 있었을 때, 그 둘은 다른 곳에 있었다. 


“원하시는 게, 정말 그것인가요?”


제국의 황녀. 최초의 여제가 될 사람이자 대전쟁의 사령탑이었던 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위엄을 유지하려는 듯 애썼지만, 나는 미묘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눈치챘다. 나는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제가 원하는 것은 단지 원래 세계로의 귀환입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이뤄둔 수많은 것들을 버리고 간다는 게, 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시아는 울먹이면서 내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는 그 무언의 외침. 나도 사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지, 언제나 이성적이었던 그녀가 왜 감정에 북받쳐 울고 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황녀 전하.”


“단둘이 있는 이 침실에서도 그러시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저를 시아라고 불러준 적이 없네요. 궁중에서도, 전장에서도, 그리고 지금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는 떠날 사람이니까요. 황녀 전하의 마음을 가볍게 대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니까… 그니까 왜 떠나는 건데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하다못해 가진 것도 없던 무능력한 남자의 인생으로 대체 왜! … 떠나는,거에요?”


시아의 말에 약간의 상처를 받은 나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눈을 슬프게 바라볼 뿐. 바다처럼 푸른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사파이어가 흘러내렸다. 짠 내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사랑했던 이가 있습니다.”


“뭐,라고요?”


“제가 사랑했던 여자,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했던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10년이 지났어요. 분명 그녀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저는 그녀를 믿습니다.”


“저보다요?”


“….”


시아는 고개를 숙였고 나 또한 눈을 감았다. 들리는 것은 그녀의 흐느낌뿐. 현생을 살 때는 언제나 느꼈던 고독이었지만, 그녀와의 이런 경험은 근래에 들어 처음이었다. 죄송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 떠나야겠다고 말하면서 뒤돌아야 할까. 침음을 삼킬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광소했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기괴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미묘한 미소를 보았다.


“크흐흐… 용사님, 아니 얀붕씨. 진짜,진짜로 로맨틱한 이야기네요? 갑작스레 사라진 약혼남이 10년 뒤에 나타나 아직도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이야기라… 로맨스 소설에 나와도 뇌절이라고 독자들이 욕하겠어요. 안 그래요?”


“진정하시는 게…”


“얀붕씨가 이 땅에 소환됐을 때부터 저는 얀붕씨만 바라봤어요. 당신을 위해서 황위 쟁탈전에 승리했고, 몰락하는 제국을 개혁해서 만승지국으로 이끌었어요. 당신을 위한 연설을 했고, 당신의 앞을 막던 좆같은 새끼들을 모두 뒤에서 죽여버렸어요. 당신의 권위와 돈만 보고 유혹하려 드는 하찮은 여우들도 사냥했어요. 이런 저의 노력보다, 10년 전 약혼녀가 중요하다고요?” 


“그,그게 대체”  


“전 당신만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했어요. 언젠가는 날 바라봐주겠지, 사랑해주겠지 하면서 내색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절 버린다고요? 신께서 이어준 우리의 사랑을! 네가 뭔데 끊으려고 해요? 아니, 애초에 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식은땀이 흘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어서? 아니다. 오히려 자주 느껴봤던 감정. 괴수에게서도, 마인에게서도, 심지어 마왕에게도 느꼈던 감정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바로 탐욕과 증오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것은 내심 짐작했건만… 살인자라는 사실에 난 분노했고 검집에 손을 올려두고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전하가, 제 동료들을, 죽인 범인이셨군요.”


“맞아. 지들이 뭔데 나도 가지지 못한 걸 넘보려 들잖아. 얀붕아. 나 아니었으면, 너 분명히 위험했어. 내 선택이 맞았던 거야.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잡것들의 노리개가 될뿐이였다고. 그걸 막아준 나에게 감동하기는커녕 왜… 도망가는 거야?”


그녀가 다가왔다. 한발짝,한발짝. 공자들의 눈을 못 때게 만들던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이목구비에는 따듯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턱을 만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원래의 총명함이 아니라 욕망만이 번뜩였다. 


“얀붕이 너는 내꺼야. 도망갈 수 없어.”


“마지막 경고입니다. 물러나십시오. 황녀 전하. 더 이상 경고를 무시하신다면 저는 황녀로서의 예우를 거두겠습니다.”


“푸훗"


그녀가 웃었다. 뭔가 귀여운 것을 본다는 양. 마치… 함께 강아지나 개미들을 볼 때 보이던 짓궂은 표정이었다.


“어쩌려고? 죽이게? 있잖아,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너 마나 쓸 수 있어?”


“당연한 소리를… 어?”


마나가, 감응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던 내 심장이 요동쳤다. 총알보다 빠르다고 해야 할 만큼 흔들렸다. 눈도,손도,심장도. 그녀가 싱긋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주먹에서 올렸다.


“「용사가 마왕을 죽인 그 순간, 용사의 권능은 소멸한다.」 용사 소환의 제1원칙이야. 기껏 구한 세상을 용사가 다시 훼방하지 못하게 하는 신의 안배라고 할까? 예전에는 내 용사님이 힘을 빼앗기는 게 같잖기만 했는데… 역시 신께서는 계획이 있어. 그렇지?”


말해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는 귀에 속삭였다.


“나. 너 사랑해. 이미 너 버리고 다른 남자랑 살고 있을 그 쌍년은 생각하지 말고 나랑 살아가자.”


“아,아….”


“주변에는 너가 나에게 청혼한 거로 알고 있을 거야. 로맨틱해라. 현실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위해 남는다니… 역사의 한장이 될 거야.”


사랑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사랑해


그녀의 그 말을 끝으로 내 의식은 끊어졌다.


***


“용사님이 청혼을 직접 하셨다니…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그러니까 말이에요. 우리 제국의 크나큰 흥복이에요!”


로코코 양식으로 치장된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 그곳의 메인홀에서는 여제와 용사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근데… 분명히 용사님은 반드시 돌아갈 거라고 그러시지 않으셨나요?”

“뭐, 원래 사람 맘이란 갈대 같은 것이니까요.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는게 특이하지는 않죠.”

“그렇기는 하죠. 아! 저기 여제님이랑 용사님이 오시네요!”

“우와… 진짜 아름다움의 극치세요 두 분 모두"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시아는 내 손을 잡고서 단상으로 걸어갔다. 목련을 닮은 은은한 백색의 드레스는 그녀를 더욱더 뽐내주어 예식장의 주인임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녀가 나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용사님, 턱시도 되게 멋지신데요? 역시 뭘 입든 잘나신 건 너무 대단하신 것 같아요.”

“….”

“저희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요? 남부에 있는 라스칼 해안? 아니면 밀렌 공국에 있는 산호초 도시? 아! 저희가 함께 수복했던 멜리스 시에 유명한 데이트 코스가 있다는데 그곳은 어때요?”

"...”

“반항하기는…”


그녀가 싸늘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자, 무형의 힘이 내 심장을 옥죘다. 섬세하게, 죽지는 않을만큼의 최악의 고통이 전방위적인 공습을 가했다. 내가 신음을 흘리자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면서 속삭였다.


“어머! 괜찮으세요? 주위 사람들이 다 듣겠어요. 용사님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마인」들이 깨닫게 된다면 제국이 다시 위험에 처할 텐데…”

“아… 맞습니다. 여제님. 마인들이 보면,안되는…”


마인들? 분명히 마인들은 대전쟁에서 끝냈어


“아직 「마왕」이 남아있어요. 아시죠?”

 

 마왕?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이미 죽였으니까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저희가 사랑해야 해요. 힘 잃은 용사님을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죠.”

“맞,습니다.”

“사랑해요?"

“….”

“사랑.해요?”

“네… 그렇습니다.”


그녀가 만족스레 웃어 보였다. 단상에 올라왔을 때, 그녀는 외쳤다.


“저 시아 디 레퀴스는 평생코 얀붕이를 사랑하기로 맹세합니다.”


용사님의 차례에요.


그녀는 말하며 자리를 비켜줬다. 그녀는 내가 정말 마왕이 살아 있다고 믿게 세뇌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녀의 세뇌에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내 권능이 사라졌다고 한들 정신력까지 가져가지는 못했을 터,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그녀의 추악한 만행을 폭로하고 죽고 싶었으니까. 나는 소리쳤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저 얀붕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이 세계에 없다고


“그 여자는 제 옆에 있는 아름다운 천사십니다."


나는 이 추악한 가면을 쓴 여자에게 협박받았다고


“제가 처음으로 사랑해 마지않아서 청혼한 여자!”


나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고!


“평생코 이 여자 시아와 사랑하기를 저 얀붕이는 맹세합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혼란스러워야 할 텐데, 대체 왜?


시아가 눈물을 흘리며 내 품에 파묻혔다. 그리고서 시아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용사님

이제 끝이에요. 


-END D: 

BAD ENDING: 여제의 애완동물



—GAME 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