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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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알, 탄알, 미사일.


온갖 공격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온다.


왜? 어째서?


라고 질문하는 건 어찌보면 어리석다고 할 수도 있겠다.

놈들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그래왔던, 이해 못할 족속들이었으니까.


‘이제 와서’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요 근래, 50년도 더 넘게 놈들은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우릴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나가서 지원을 요청해라.”

“정신나간 소리 말게! 나보고 자네들을 두고 가란건가!”

“현재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오직 자네뿐이니까.”

“크윽…”

작정이라도 한 듯, 놈들을 아예 떼거지로 몰려와 우릴 포위해버렸다.

이 녀석 말대로, 난 몸집이 작으니 포위망을 어떻게든 비집고 나갈 순 있겠다만…

차마 이 놈들을 두고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머뭇거릴수록 전멸당할 확률만 높아진다.”

“에잇! 알았네! 중요한 순간에 추태를 부려 미안하군! 조금만 버텨주게나!”

“퍼피를 엄호한다! 포위망이 약한 곳을 노려라!”


리더의 신호에 맞춰, 앞으로 달려나간다.


방패를 든 놈이 내 앞을 가로막지만 소용없다.

오히려 놈을 스턴건으로 지져,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타 빠져나간다.


그 외에도 총구를 겨누는 놈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거나,

미사일을 쏴대는 놈들을 전우들이 견제한다.


기름이 튀고, 부품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희생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다.


“크흑! 조금만…조금만 버텨주게나!”


뒤쫓아오는 놈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 도움을 청할 이들을 찾아 나선다.

최대한 빨리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가리라.


반드시.


“오늘 할 일 끝!”

“후후, 이제 끝났으니까 누나랑 좋은 시간이라도 보내면 어떄? 사령관 님도 그러고 싶지?”

“그럼 심심한데 전투 결과 분석실이나 가볼까?”

“…사령관님, 벌써부터 일 중독 증상을 보이면 안되거든?”


등대에 신호기를 설치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동안 오르카호엔 크고 작은 변화가 여럿 있었다.


먼저, 16명에 불과하던 대원들이 수십으로 늘어났다.

인근을 배회하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많이 합류한 덕분이었다.

당연히, 이들한테는 인프라 확보를 위한 전투나 자원 탐색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을 수용하는데 있어 보다 많은 자원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최대한 자원 관련 연구와 시설 구축에 매진했다.


그 결과, 3대 생산소 및 3대 생산 지원실 건설은 소모되는 자원을 보충하는데 큰 도움이 됐고, 정밀 레이더 시스템, 탐사 구역 분석실 1단계, 운송 드론 1단계 구축은 탐색조가 보다 많은 자원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이따금 주요 물품을 발견하는 등 여러모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전투력 부문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전투 결과 분석실에선 그리폰과 요안나를 비롯한 베테랑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었고, 내게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시뮬레이팅 시스템 1단계를 통한, 가상 훈련에 반영해 대원들의 전투력 상승에 이바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요샌 나도 같이 보고 지시 내리고 하는 건데 까짓거 나도 함께 하면 더 빨리 끝나서 걔네들도 좋아하겠지 뭘.”

“맙소사…사령관님, 조금 누나랑 게으름 피워도 된다고 해도 그렇게 싫다고 하더니…! 이거 안되겠거드…응? 콘스탄챠? 무슨 일이길래 그래?”


“실례합니다, 주인님.”


뒤를 돌아보자, 콘스탄챠가 조금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무슨 일이지?


“지금 급한 구조 알람이 들어왔는데 잠깐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구조 알람이라고? 누가 보낸거지? 위치는 어디야?”


오르카호 대원들 중 낙오자는 없다.

그렇다면 본진이 습격당했을 때 탈출한 저항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구분자는 없지만, 자매들의 구조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위치는…이곳이에요.”

“음…”


저 곳은 아직 우리가 장악하지 못한 곳이다.

게다가 확정되지 않은 발신자까지…


“함정일 가능성은?”

“해당 지역을 레이더로 수색해봤을 때 철충 반응은 감지되지 않았어요.”

“그럼 두 가지 중 하나네. 정말로 누군가가 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거나, 아니면 철충이 레이더 감지를 피하면서 거짓 신호를 보내는 것.”

“사령관님. 요새 나이트 칙 디텍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그 정도로 능력이 되는 철충이 있냐는 의견은 누나도 좀 회의적으로 생각되거든?”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포츈 말이 맞다.

하지만 철충이 상식적인 놈들이던가?

어차피 이곳은 슬슬 점령할 생각이었으니, 조사만 하고 오라고 해야겠다.


“해당 지역을 수색할 스쿼드를 편성한다. 그거랑 별개로, 전에 들었던 신호기 추가 설치도 진행할 거니까 그렘린도 준비 좀 하라고 전해.”


아직은 이 주변에 위험 요소가 보고되지 않았으니 이참에 기반을 충분히 마련해둬야지.


“에이씨, 진짜.”

“……”


예상(?)대로, 도착한 좌표엔 철충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잠복하고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젠 진짜 죽었지 말입니다!”

“헛소리 할 시간에 더 빨리 뛰어라, 브라우니!”


나이트 칙 런처 하나, 나이트 칙 셋.

총 4마리의 철충 분대가 도망치는 5명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맹렬하게 뒤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막이 다 떨어져가요!”

“저기 건물 사이로 피합시다!”


한 명이 연막탄으로 시간을 버는 사이, 다른 이들이 재빨리 건물 틈으로 몸을 피했다.

바이오로이드들을 놓쳐버린 철충들은 그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마냥 틈 바로 앞에 자리잡았다.


“뭔가 이상한데? 철충이 저렇게까지 호전적이었나?”

“싸우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아니야.”

“응?”


철충은 바이오로이드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기에 선공을 가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하면 공격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별다른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명령을 내릴 인간이 없어, 공격을 가할 수도 없다는 게 빤히 보이는데 철충한테 공격당한 것이다.


‘일전에 등대에 습격을 가했던 거랑 비슷한 맥락인걸까?’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는 저 놈들을 잡고 나서 생존자들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콘스탄챠, 신호를 주면 런처를 죽여.”

“네, 주인님.”

“그 다음엔 LRL이 빛으로 놈들을 잡아둬. 저 사람들은 다치지 않게 미리 경고도 해주고.”

“크…큭…큭…참으로 쉬운 일이로구나!”

“그 다음엔 요안나랑 워울프가 나머지 놈들을 전부 죽여.”

“주군의 뜻대로.”

”그래, 까짓거.”


그리폰은 잠시 대기시켰다.

놈들이 건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미사일을 쏴댔다간 숨어있는 이들이 무너지는 건물에 생매장당할지도 모른다.


“지금!”


세 번의 총성, 세 발의 탄환.

튼튼한 철갑을 뚫고 들어간 총알에 철충의 머리가 바스라지고, 몸통이 찢겨나간다.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던 런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제서야 이쪽을 눈치챈 나이트 칙들이 허겁지겁 우리를 마주보지만, 오히려 좋았다.


“나오지 말거라! 이 몸의 휘광에 눈이 멀어버릴테니…!”


태양빛조차 가려버릴 강렬한 빛이 철충들을 휩쓴다.

워낙 눈부셨기에 다른 수색대원들은 물론, 함장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까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야 할 정도.


“눈이! 눈이이이이!!!”

“뭐하는 거야! 이 바보 녀석!”


저런, 아무래도 저쪽 브라우니가 멋모르고 고개를 내밀다 눈뽕을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합류하게 된다면 다른 브라우니들한테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겠지만, 날아온 게 총알이 아니라 빛이었다는 걸 다행으로 치자.


“이것 참, 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화끈한 아가씨네?”


담배 연기를 후 불어낸 워울프가 LRL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단숨에 철충들을 향해 박차고 나간다.


타타타타탕!!!


현란한 움직임과 함께, 워울프의 총알이 온갖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 와중에 철충만 벌집이 되고, 아군이나 주변 사물은 전혀 맞지 않았다는 것도, 마치 신이 묘기를 부른 것만 같았다.


“주군의 뜻이 그러할지어니.”


이어서 짧은 독백과 함께 요안나의 검이 춤을 춘다.

황금빛 궤적을 따라 철충들이 깔끔히 두동강난다.


“음…?”


잘못 들은걸까?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소리가,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 교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하군. 바이오로이드들은 명령을 내릴 인간이 없어서 제약이 걸려있을텐데?”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크게 외친다.

마치, 혼잣말에 불과한 자신의 말을 반박이라도 하는 것마냥.


“나오지 말거라! 이 몸의 휘광에 눈이 멀어버릴테니…!”

“…아직 어린 바이오로이드로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장에…?”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번뜩 스쳐지나간다.

만약 저게 목소리만 저런 거라면?


“그러고 보니…부유한 인간들 중엔 공격 제한을 평균치보다 해제한 바이오로이드들을 비밀리에 생산하기도 했다고 들었다만…”


정말로, 그런 바이오로이드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저 정체모를 바이오로이드는 자신이 보낸 구조 요청 신호를 받고 온 걸지도 모른다!


“이, 이럴때가 아니군! 빨리…도움을 청해야 해!”


놈들한테 당해 너덜너덜해진 몸을 필사적으로 일으켜, 전장으로 향했다.

지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전우들을 위해.


“아, 동지가 왔네?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꽤나 화려하게 싸우던데?”


익숙한 얼굴도, 새로운 얼굴도 보인다.


오르카호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

그녀들의 상사이자 일명 행보관급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임펫,

본래라면 치안 유지를 맡았을 경찰관 바이오로이드인 미스 세이프티,

그리고 그리폰 이후 처음으로 보는 공군 출신, 지니야까지.


새로운 이들과 조우했고, 합류를 선뜻 승낙해줄때까지만 해도 나름 좋은 기분이긴 했다.

딱, 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아뇨? 저흰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낸 적이 없어요.”

“…응?”

“잠깐만, 그럼 철충은? 여기서 잠복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잠복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뭔가 찾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우릴 보자마자 공격해온거고.”

“주인님, 그렇다면…”

“…그래.”


앞서 말한대로, 구조 요청을 보낸 건 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이 철충들은 분명 구조 요청을 보낸 누군가를 찾다 이들과 마주친 것이다.


찾는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들을 공격했다는 건…


“고립이야.”

“네?”

“놈들은 우리 세력이 더 성장하지 못하게끔 합류 인원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고 있어.”

“주군, 그 말이 맞다면 이번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사건인 게 분명하네!”

“그래. 철충이 비록 고등지성체라곤 해도, 고작 나이트 칙 같은 하급 개체들은 이런 전략을 구사하지 않아.”

“음, 배후에서 지시를 내리는 상급 개체가 있다는 거지.”

“……”


상급 개체라니.

아무리 전투력 향상에 열을 올렸다한들, 지금 당장 상급 개체와 전투를 벌이기엔 부담이 크다.

최대한 빨리 구조 요청자를 찾고 수색대를 복귀시켜야…!


“괜찮지 않을까요? 상급 개체는 위협적이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을 피하려는 경향이 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근방엔 없을 것 같은데요.”

“세이프티 씨, 당신이 말하는 상급 개체가 있든 없든 이 근방은 충분히 위험해.”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첫째, 상급 개체가 없다고 쳐도 하급 철충한테 지시를 내릴 정도의 상위 개체가 있다는 것. 그런 존재는 보통 아랫것들과 함께 다녀.”

“…!”

“둘째, 상급 개체가 직접 지시를 내린다면…과연 그 지시가 하급 개체한테만 적용될까?”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세이프티, 브라우니, 레프리콘, LRL의 얼굴이 새파래졌고, 워울프도 눈살을 찌뿌린다.


삐빅!


그 순간,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그리폰의 고글에 철충이 감지되었다는 표시가 띄워져 있다.


“…확인해보고 올게.”


그리폰이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날아간 지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충격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빅 칙이라니…!”

“엄청 큰 나이트 칙이지 말임다! 하는 짓은 나이트 칙이랑 똑같은데 갑빠도 두껍고 총도 더 쎄게 쏘지 말임다. 보이는대로 움직이기 전에 얼른 죽여야 함다!”

“브라우니, 사령관님도 알고 계시다.”


빅 칙.

기존에 마주했던, 나이트 칙으로부터 파생된 철충들 중 그 어떤 개체도 비교를 불허하는 스펙을 지닌 괴물.


공격력과 방어력은 이전에 봤던 철충 중 가장 강력한 개체인 나이트 칙 디텍터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며, 이런 놈들을 보조하는 개체 역시 다른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빅 칙이란 같이 보고된 나이트 칙과 나이트 칙 실더 역시 어지간한 녀석들과 같이 봐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이길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상관없다. 여기서 잡는다.’


후퇴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지금, 이 놈이 끝은 절대 아니다.

분명 더 강한 놈이 배후에 있다.

만약 여기서 놓치게 되면…반드시 큰 화가 되어 돌아올 거다.


결단을 내리고 나서, 뭘 해야 할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바로 머릿속에 다 그려졌기에.


“지니야, 연막을.”

“네! 연막 칠게요!”


지니야가 사방 곳곳에 연막을 치게 했다.

놈들이 와서 내부를 경계하게끔 철충의 사체가 연막에 가려져 보일락말락 하게끔 말이다.


물론 놈들은 그게 함정이고 수색대가 건물에 숨어있을 거라고 확신할 거다.

그러니 그 안에서 정말로 적이 튀어나오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겠지.


작전을 하달하고, 놈들을 기다리게 했다.

연막의 유효 시간을 고려하고 뿌린 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올 것이다.


철충은 개체에 따라 전투력이 천차만별이지만, 대체적으론 통상적인 바이오로이드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한다.

그런 게 수백, 수천을 넘어 셀 수도 없이 많고, 그것들을 몰살시켜 승리를 거둬야 한다면…어떻게 해야 할까.


계란으로 바위를 쳐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그게 더 이상 계란이 아니라, 바위를 부술 정도의 단단한 무언가가 된다면?


바이오로이드 제조엔 ‘오리진 더스트’라는 인공 세포 소체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로 인해 바이오로이드는 여러 요인에 따라 다양한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전투용 바이오로이드 중 체내 오리진 더스트와 연동하는 장비나 무기를 사용하는 개체는 그러한 영향을 더욱 많이 받는 모양이고.


‘생명 공학은 누나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바이오로이드 중에서 생체 전기와 관련된 기술이 접목된 자매가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

‘일전에 닥터가 오리진 더스트가 비슷한 원리로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죠. 하긴, 바이오로이드는 엄밀히 따지면 인간형 생체 컴퓨터이니 맞는 말일지도 몰라요.’

‘오리진 더스트를 많이 투여해 보다 강력한 바이오로이드가 탄생하거나 기존의 개체에 오리진 더스트를 추가로 투여해 강화시킨 사례가 여럿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바이오로이드는 양산형이나, 소모품 같은 용도로 제조되는 경우는 단가를 고려해 오리진 더스트가 덜 들어간다고 한다.

반대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거나, 보다 높으신 분의 의도대로 제조되거나 하는 경우엔 오리진 더스트가 보다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 정보를 토대로 대원들을 관찰해본 결과, 정말로 브라우니, 레프리콘, 워울프같은 양산형 바이오로이드들은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포츈 같은 후자의 경우는 관찰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뭔가 묘한 점이 자주 느껴지곤 했다.


그리폰 역시 그러한 사례 중 하나였다.


‘정찰을 나가서 적들의 종류, 규모, 배치 등을 파악하고 오면 이전보다 잘 싸웠단 말이지.’


마치 전황 분석 OS처럼 특정한 조건에서만 발휘되는 잠재능력…

이 문제를 좀 더 파헤쳐보면 전력을 보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두두두두두!!!


예를 들어 당장, 지금 수색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빅칙의 배후에 있을 놈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온다, 준비해.”


놈들이 가까워지자, 향후 계획에 대한 생각을 중단하고 전황에 집중했다.


지축을 뒤흔드는듯한 굉음과 함께 나타난 철충 중 빅 칙이 유독 부각되어 보인다.

나이트 칙과 실더만 해도, 어지간한 자동차보다 전고가 높은데, 빅 칙은 한 층 더 한 수준.

거의 무슨 코끼리에 비견되는 덩치를, 대체 어떻게 고작 두 다리로 이끌고 올 수 있었을까.


“……”


수색대도, 나도, 숨을 죽이고 놈들을 지켜본다.

예상했던 대로 연막을 발견한 철충들은 그것이 사그라질 때까지 대기하려는 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안에 숨겨둔 철충 사체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

“?!”


함정이라고 생각한 나이트 칙이 뒤로 돌자, 빅 칙도 놀란 기색이다.

여기서 긴장감을 탁 터트려줘야 한다.


“멍! 멍! 멍!”


“!!!”


타타타타탕!!!


느닷없이 측면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건물 틈새를 달려가는 보리.

긴장감이 절호조에 달한 나이트 칙은 깜짝 놀라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총알을 퍼부어댄다.


팍!


“…!!!”


실더가 방패로 나이트 칙을 한번 내리쳐 제지를 가한다.

빅 칙 역시 표정은 없지만 나이트 칙의 섣부른 오판에 화난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피에 굶주린 늑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너~무 쉽잖아!”


황무지를 가로지르듯, 연막 속 철충의 사체 뒤에서 튀어나온 워울프는 단숨에 실더의 한쪽 다리를 잘라낸다.

기동력을 상실한 실더는 더 이상 그 어떤 위협도, 방해도 되지 못한다.


순식간에 유능한 고기 방패를 잃은 빅 칙이 분노에 찬 총격을 가하려는 찰나, 워울프는 원을 그리듯 빅 칙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주제를 모르는 적을 단죄하려는 빅 칙이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이번엔 강렬한 빛이 시각 센서를 강타한다.


“…!!!”


시각 센서가 일시적으로 과부하를 일으키자, 나이트 칙과 빅 칙 둘 다 당황해 뒷걸음질친다.


그나마 빠른 연산 속도 덕에 곧바로 정신을 차린 나이트 칙이 다시끔 총구를 겨누지만…


“목표 완료.”

“…!”

“두근두근~”


딱 봐도 위험해보이는 무기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적의 모습을.


나이트 칙은 본능적으로 실더 뒤로 몸을 숨긴다.

저것을 맞으면 자신은 끝장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일개 잡졸 하나와 자신을 교환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것도 없고,

자신이 쓰러지면 빅 칙 혼자서 놈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실더를 희생시켜야겠다고 애써 합리화를 하며 말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철충과 목숨걸고 싸운 임펫의 RPG2040은 그녀의 깡 못지않게 흉악한 무기였다.

고작 다리 잘린 실더 따위로 이걸 막아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모조리 타버려!”


임펫의 외침과 동시에, 두 철충이 폭발에 휩쓸린다.

이미 워울프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은 실더는 물론, 나이트 칙마저 재기불능이 된 상황.


분노할대로 분노한 빅 칙은 앞뒤 가리지 않고 임펫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주군의 의지가 깃드는 한, 그들에게 손댈 수 없으리라!”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요안나가, [내 충격 회로] 덕에 한층 더 견고해진 방어막을 펼쳐 공격을 막아낸다.


“이야~저 공격을…대단한데?”

“하하, 주군의 은총 덕분일세.”


그러나, 계획이 너무 잘 먹혔기에 그녀들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


빅 칙은 하급 개체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철충이라는 사실을!


타타타타타탕!!!!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빅 칙은 곧바로 총구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요안나와 임펫이 아닌, 그녀들 바로 뒤의 건물을 향해서.


“설마…”

“이런!”


무시무시한 총알 세례는 콘크리트 벽을 통째로 깎아내렸고, 순식간에 하부 대부분이 소실된 건물 상단부가 그녀들을 향해 기울었다.


“요안나아아아아!!!!!!”


콰앙!!!!!!!!!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 건물이 두 바이오로이드들을 덮쳤다.


“세상에! 저게 대체 무슨…”


설마 빅 칙이 여기까지 쫓아왔을 줄이야.

지독한 놈, 어떻게든 자신을 살려보내지 않으려는 걸까.


그 과정에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교전에 들어간 모양이고,

바이오로이드들이 예상 외로 잘 분발하고 있지만…


빅 칙이 허를 찌른 공격을 가했다.

건물 하단을 통째로 도려내 쓰러트림으로서 적을 매장시켜버리다니…


오로지 빅 칙이기에 할 수 있는 공격.

안타깝지만, 저 둘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요안나아아아아!!!!!!”

“콜록콜록, 짐은 괜찮네! 여기 임펫 중사도 마찬가지고!”


…그걸 살아남았다고?

놀라운 걸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지만, 빅 칙은 가까스로 살아난 저들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도와줘야 하나?

하지만…내가 여기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날 기다리고 있을 전우들이…!


탕!


그 순간, 총소리가 들려온다.

익숙하디 익숙한 총소리…설마?


“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믿을 수가 없다.

미스 세이프티가, 무장이랍시고 고작 권총 하나 밖에 없는 그녀가, 빅 칙을 쏴 시선을 유도한다.


도망치라는 내 애원이 닿은걸까.

미스 세이프티는 빅 칙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확인하자마자 건물 뒤로 몸을 피한다.


타타타타타탕!!!


빅 칙의 총구가 불을 뿜고, 바로 뒤를 스쳐 지나가는 총알을 피하며 세이프티가 온 힘을 다해 질주한다.


탕! 탕!


중간중간 총까지 쏴가며 시선을 끄는 동안, 또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날아오더니 건물 잔해 속 바이오로이드들을 연막 속으로 숨겨버린다.


그제서야 자신이 유도당했음을 눈치챈 빅 칙이 다시 총구를 세이프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겨눈다.

이번엔 어디로 쏘아대든, 건물이 무너지기만 하면 세이프티를 덮칠 수 밖에 없는 구조.

이대로라면 그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어림없는 소리.


비록 전우들을 등 뒤에 남겨두고 오긴 했지만, 같은 경찰로서 그녀가 죽게 내버려두면 전우들을 볼 면목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러한 일념 하에, 빅 칙을 향해 단숨에 박차고 달려갔다.


“인간! 아직이야?!”

“아직 안돼! 요안나와 임펫이 못 빠져나왔어!”


지금 그리폰이 공격을 가한다면 그녀들 역시 폭격에 휘말릴 것이다.

세이프티가 어떻게든 주의를 끌어보고 있지만, 이번엔 오히려 그게 악수가 된 상황.

자신을 방해했다는 게 어지간히 짜증난건지 콘스탄챠가 견제를 해도, 보리가 다리를 물고 늘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이프티만 노리고 있다.

그렇다고 거리를 더 벌리게 하면, 빅 칙이 다시 파묻힌 둘을 공격하려 할 터.


“조금만…조금만 버터, 세이프티!”

“걱정마십시오! 이 정도는 문제 없습니다!”


그 순간, 지긋지긋하다는 듯 보리를 뿌리친 빅 칙이 세이프티를 향해 있는 힘껏 돌진했다!


“헉!”


쾅!


목표가 자신의 공격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빅 칙은 앞으로 계속 달려나가 건물 외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수색대는 빅 칙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녀석이 뭘 할지 눈치챌 수 있었다.


건물 외벽이라는 엄폐물,

피아 간의 센서를 통한 주변 파악의 가능 여부,

그리고 어지간한 장갑 정도는 가볍게 뚫을 수 있는 빅 칙의 공격력까지.


“콘스탄챠! 세이프티! 당장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겨!”

“…!”


타타타타타!!!!


지시를 내리는 것과 동시에 빅 칙이 건물 벽 뒤에서 총격을 가하자, 예상치 못한 총격과 함께 건물 파편이 수없이 날아온다.


“헉!”

“으윽!!”


콘스탄챠는 급한대로 실더의 시체 뒤로 숨어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이프티는…


“큭…”

“세이프티!”

“괜찮습니다…파편이 다리를 스친 것 뿐이에요…”


간신히 건물 잔해 뒤로 엄폐했음에도, 다리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세이프티.

지금, 더 이상 민첩하게 달려 공격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철컥! 철컥! 철컥!


자신의 최후를 즐기려는 듯 천천히 다가오되, 발소리는 일부러 크게 내는 빅 칙.

브라우니와 레프리콘, 콘스탄챠가 총을 쏴보지만 빅 칙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눈팔지 말라고!”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워울프가 땅을 박차고 미끄러진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총검 한 쌍이, 빅 칙의 몸으로 날아든다.


“뭐…!”


그러나, 실더의 갑피도 뚫고 들어가던 총검은 빅 칙을 찢기는 커녕 표면을 긁기만 할 뿐.

빅 칙은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계속 세이프티를 향해 달려나갔다.


“진조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그 자리에 멈춰라, 하찮은 미물아!”

“……”


위협적인 공격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LRL의 빛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멈칫거리기만하던 빅 칙의 발걸음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젠장…!”


탕! 탕! 탕!


곧 빅 칙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확신한 세이프티는 발악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총을 쏘아댔다.

당연한 얘기지만 놈의 견고한 장갑이 뚫리거나 하진 않았고, 오히려 괘씸하다는 듯 빅 칙의 내부에서 기관총이 회전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구 맘대로!”

“…!!!!”


쿠웅!


갑자기 어딘가에서 전선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날아와 빅 칙의 몸에 달라붙더니, 치직 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빅 칙의 다리가 꺾여 그대로 쓰러진다!


“…테이저건?”


익숙한 물체의 등장에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 세이프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이런 곳에 미스 세이프티가 있을 줄이야! 자네 괜찮나! 다리를 다친 것 같은데!”

“설마…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다는 게 당신이었나요?”

“응? 그건 내가 보낸 게 맞다만…에잇! 이러고 있을 시간인가! 저 놈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파란 색 배열의,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금속제 몸체.

눈처럼 생긴 빨갛고, 파란 센서등까지.


갑자기 나타나 빅 칙을 제압한 정체모를 로봇은 수색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봐! 이 놈은 내가 어떻게든 붙잡아둘테니 거기 갇혀있는 아가씨들부터 빼내게!”

“네, 네!”


로봇이 빅 칙의 동력부에 계속 전류를 흘러 과부하를 내어 움직임을 차단하는 사이, 마침내 마지막 잔해가 치워지고 요안나와 임펫이 빠져나온다.


“이제 됐네! 자네도 얼른 그곳에서 나오게나!”

“세이프티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로봇은 몸에서 푸른 사슬을 꺼내더니 세이프티의 몸을 잡아 수색대 쪽으로 내던졌다.


“으익! 어이! 강아지 동무, 조심하라고! 부상자한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 부축하느라 시간 끌어봤자 좋을 거 없지 않나! 게다가 그 친구는 자네 생각보다 더 튼튼한 친구라 그 정도론 별 문제 없네!”

“이 미친…”


그 순간, 빅 칙의 거체가 다시끔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력하디 강력한 상급 철충 개체를 붙잡아두기엔 로봇의 공작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런! 도망치게나!”

“내 팔을 잡게!”


요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봇은 그녀의 팔에 사슬을 감더니 점프를 해 순식간에 요안나의 옆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빅 칙이 몸을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수색대와 합류자들이 충분히 거리를 벌렸을 무렵,


“지금이야, 그리폰!”

“기다리느라 숨 막히는 줄 알았다고!”


그제서야 뭔가 쎄하다는 걸 느낀 빅 칙이 고개를 살짝 들었지만…


“너어어어주욱어어어써어어어!!!!”

“…!!”


자신의 바로 위에 꽃히는 네이팜 미사일을 막아내진 못했다.


“사용자의 신원을 확인합니다. 감염 반응…없음! 신원 확인…바이오로이드 10개 개체. 범죄 기록 없음. 건전한 시민 및 바이오로이드 여러분께 언제나 함께하는 경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게…뭐야?”


정체, 도운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를 표하려고 했는데 이 로봇 녀석은 대뜸 인삿말인지 모를 길고 긴 문장을 내뱉었다.

…뭐지, 이 녀석?


“오토 가드 시스템(Auto Guard System), 통칭 AGS. 전투나 경찰용으로 쓰이는 로봇 시스템 녀석들이야. 그냥 군용 또는 경찰용 로봇이라 생각하고, AGS라고 부르면 돼.”

“이게 그 AGS라고?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네.”

“AGS는 기종에 따라 크기 차이가 심하고, AI나 후천적 경험에 따라 성격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은 말이 참 많네.”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철충의 원본이 AGS라는 걸 생각하면…

저 녀석은 너무나도 동떨어져 보이긴 한다.


음…개체 별 차이가 크다고 했으니 일반화하지 않는 게 좋겠지?


“음, 방금 전 인사가 길었던 건 크게 신경쓰지 말게나. 우리 기기의 의무와도 같은 것이니까. 그나저나 아까 세이프티한테 구조 신호와 관련된 질문을 들었는데, 혹시 그걸 듣고 온 건가?”

“니가 보낸 거였어? 뭐야, 우리 자매들이 보낸 건 줄 알고 달려온건데. 이 개 녀석…사람 놀라게 만들고…”

“말이 심하지 않나! 난 개가 아니라 경찰 및 헌병용 로봇, SD-3M 펍헤드라네! 그리고 나 또한 우리 AGS 일부가 고립되서 구조 요청을 하러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일세!”


역시 저 철충들은 이 녀석을 찾으러 온 게 맞았나보다.

그렇다면…


“고립이라니? 너흰 몰려 다녀서 싸우잖아? 너 혼자 구조 요청을 보낼만한 일이 있었어?”

“비상 시라 행동 지침이 달라졌다네. 규소-금속 중합 자생적 유기체들이 갑자기 무리지어 공격했지. 심지어 통신 방해까지 광범위하게 걸어대는 바람에 전우들이 나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날 어떻게든 내보낸걸세!”


규소-금속…AGS들은 철충을 그런 식으로 칭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철충들이 지니야들뿐만 아니라 AGS들도 먼저 공격해댔다는 건, 역시 오르카호에 합류하는 걸 방지하려는 걸까.


털썩!


그때, 펍 헤드가 앞다리를 접고 턱을 최대한 아래로 숙였다.

마치 복종의 자세를 취하는 듯한 동작에, 현장에 있는 바이오로이드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제발 전우들을 도와주게나! 지금 이 순간도!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싸우고 있을걸세! 제발…제발…!”

“……”


보기엔 우스꽝스러워보이지만, 말은 전혀 그렇지 않은 분위기에 대원들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내가 나서야 할 차례다.


“펍 헤드라고 했지?”

“혹시나 했는데…정말로 인간이군?”

“구조 요청에 응할지 말지 결정하려면 우선 자세한 내용을 들어야겠으니 여기로 와줘.”

“하지만…”


펍 헤드의 눈(?)이 파르르 꺼졌다 켜지는 걸 반복한다.

지금 당장 지원군을 이끌고 가고 싶은 거겠지만, 이쪽도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지금 네 상태는 육안으로 봐도 썩 좋지 않은 것 같고, 우리 대원들도 지친데다 무기 보수 및 보충을 해야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원들을 무작정 내보낼 생각은 없어.”

“…알겠네.”


드디어 정체 모를 구조 신호의 조사가 끝났다.

새로운 인원이 합류하는 건 물론, 강적이었던 빅 칙도 사살할 수 있었으니 충분히 이득이라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정말로 그럴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철충들이 뒷공작을 펼치고 있는 걸 확인했다.

놈들을 부리는 상급 개체…아니, 어쩌면 빅 칙마저 부릴 수 있는 고위 개체가 이 근방에 도사리고 있는 걸까.

생각보다 큰 일에 휘말린 걸지도 모른다.


“다른 녀석들이 걱정되는데.”


아직 신호기를 설치하러 나간 작업조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복귀 명령을 내리는 게 좋을 듯 싶다.


타타타타탕!!


한편, 수색대가 한바탕 전투를 벌인 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어딘가에선 또 다른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퍼피가 생각보다 늦는 것 같군.”

“…!!…!!!…!!!!”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말게. 부패 경찰로 강등될지언정 어딘가에서 남모르게 객사할 친구는 아니야.”

“…!…!!!”

“하여간 자넨 말문 막히면 주제를 돌리는 버릇은 어째 안 바뀌는지 모르겠군. 그래, 자네 말대로 슬슬 놈들의 기세가 꺾인 모양이야.”


쿵!


왼손으로 돌격해오는 나이트 칙 실더를 힘껏 쳐낸다.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진 실더를 향해 일제히 탄알이 날아들어 놈의 겉과 속을 갈기갈기 찢어낸다.


“지금이다! 내가 앞장설테니 모두 날 따라 놈들을 처치한다!”


말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국어책을 읽듯 감정이 제대로 살아있지 않고 어딘가 어색한 점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가 믿음직스러운 이라는 사실을 아는 전우들은 그의 말을 듣고 다시끔 의지를 북돋았다.


그와 전우들이 공세를 가하자, 전황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철충들은 갑작스런 기세에 당황해 뒤로 물러서고,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발짝, 두발짝,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이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놈들이 한계에 이르러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자! 다들 공겨…”


콰아앙!!!


그 순간, 어딘가에서 푸른 빛이 날아와 그에게 직격한다.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몸이 두세번 땅을 구른다.

이내 땅바닥에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


설마 이 때를 노리고 저격병을 숨겨뒀단 말인가.

전우들이 잔뜩 긴장해 철충들을 노려보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겁에 질려 떠는 것마냥 몸을 미세하게 진동하며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전우들은 몰랐지만, 철충들은 ‘그것’이 매우 화가 난 것임을 눈치챘다.

자신들의 부주의로 놓친 고철더미를 잡으러 간 측근이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는 것을.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그것’은 몸을 돌려 그대로 사라진다.

예상치못한 상황에 아직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전우들과 철충들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끔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쪽의 사기가 떨어지고, 어느 쪽의 사기가 올랐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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