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린 겨울은 지나갔다. 어느 추운 때는 힘없는 겨울 입김을 잊으려 담배를 피웠던 것도 같건만 이제 그때의 연기보다도 도시의 매연이 더 짙게 되었다. 달력은 이제야 완연한 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텁텁하다 못해 몇 번이고 마른 숨을 삼키게 만드는 공기는 영락없이 불쾌한 여름 맛과 유사하다고 의주는 생각했다.


지안을 만나지 못한 지도 어느덧 아홉 주가 되어 갔다. 의기양양하게 정체불명의 수학 문제를 집어 들고 쉬는 시간마다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밀던 이상한 여자애는 어느덧 자신의 곁을 떠나 먼 타국에서 진짜 수학을 하고 있었다. 

물론 학위 과정 도중 잠깐 떠난 석 달 간의 연구 인턴십의 형태였으므로 영영 이별은 아니었으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제법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의주로서는 결코 희소식이 아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병역의 의무를 마쳐 드디어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지안이 그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져 넝쿨째 굴러들어온 적기가 괜히 야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안이 안부 연락과 함께 이따금 그녀의 성과를 의주에게 보내 오는 날이면 의주의 속에 그러한 섭함은 온데간데없고, 언제까지고 그녀가 웃기를 바라는 염원만이 남을 뿐이었다.


지안의 빈자리는 작지 않았으나 어쨌건 의주는 계속 삶을 영위해내었다. 생계 활동을 모두 마치고도 의주는 하루에 못해도 한 나절 동안은 붓을 잡았다. 낮 동안 벌어낸 하루 여덟 시간어치의 숫자들은 통장을 들락거리기를 반복하였으나 한 달이 끝나도록 살아간 의주의 수중에 남는 값은 결코 많지 않았다. 

이따금 남는 숫자가 생기면 의주는 그것을 잘게 쪼개어 예술 활동에 소비했다. 훌륭한 도구를 필요로 하는 화가였다면 이런 생활로는 턱도 없었겠지만, 의주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캔버스를 어떻게든 채우는 일뿐이었다.


의주의 작품은 주로 색으로 구성되었다. 작품의 소재에 맞는 아주 단순한 실루엣을 그림이나 모형으로 구현하고 나면, 의주는 그 위로 아주 얇은 살얼음 같은 색채를 덧입히며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의주가 사용할 수 있는 물감은 십여 가지를 넘어가지 않았으나 일단 붓을 든 의주가 하나의 작품에 표현하는 색은 그 수 곱절은 되었다. 뚜렷할 수 없는 색의 연속적 경계면 위에서 의주는 죽은 것을 산 것처럼, 산 것을 죽은 것처럼 만들었다. 

세상을 셀 수 없이 많은 색으로 보는 의주의 시각과 재능은 그의 표현 능력에 반영되었고 다행히도 사람들은 그 능력을 좋아해 주었다. 작품이 잘 팔릴 때도, 안 팔릴 때도 있었으나 그저 옮겨 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적어도 손을 놀리는 시간 속에서 의주는 자유로웠다.

해가 기울고도 한참 동안 누릇한 싸구려 조명에 기대어 멈춘 것들에 생기를 불어넣노라면 손끝에 쌓여 가는 굳은살과 색채 위로 지안에 대한 수십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날들이면 의주는 자신의 생각들을 켜켜이 겹쳐 미루어 두었다가 하루가 넘어가고도 한참 후에야 연필을 들어 한껏 정제하여 물성으로 만들어 낸 생각들을 크고 새하얀 종이 위에 투영하였다. 생각들은 지안의 얼굴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단순한 도형들로 살아나기도 했다. 주인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워 잠시 넓어진 방 한 켠을 오직 두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스케치가 시나브로 채웠다.


지안은 의주가 일을 마칠 시간에 맞추어 매일같이 연락을 해 왔다. 의주가 한 번쯤 먼저 연락을 시도할 때에도 지안은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차리는지 휴대 전화를 켤 때마다 그녀의 메시지가 가장 먼저 의주의 알림 창을 두드렸다. 거의 강박적일 정도의,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이른 아침에 시작하여 자정을 넘겨 두 시쯤에 마무리되는 일과를 짜 맞추어 놓고 이를 칼 같이 지키는 의주의 성격과 하루를 지안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랑 또한 그러한 패턴 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의 초침까지 감각하며 약속처럼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리움은 채움보다는 흐름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는 것이라 두 사람의 약속이 서로의 곁을 오롯이 보완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의주는 어쩌다 정말 외로움에 바스라질 것만 같으면 단단한 나무 틀에 두껍게 세공된 검은 유리 판을 끼워 넣고 판 위를 여러 도구들로 번갈아 조심히 두들겨 가며 금을 만들었다. 금은 의주의 손길에 따라 점차 둥근 모양을 갖추어, 어느새 새까만 밤하늘의 가운데에 걸린 거미줄처럼 하얗고 꽉 찬 달이 되었다. 

금의 두께와 개수, 밀도는 의주에 의해 세심히 조절되었고 그 조합에 따라 수십 가지 다른 하얀색을 실처럼 자아내었다. 의주는 그 사이 이따금 금의 폭과 깊이에 따라 소금물을 붓거나 그것을 얼리거나 하여 자신의 달이 사람의 의도와 무관한 독특한 생명을 품도록 하였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가운데에서도 제멋대로의 빛을 발하는 자신의 달을 보며 의주는 지안에 대한 사무침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타국으로 떠난 지 한 달째 되었을 때 즈음에 지안은 네 시에 찾아올 임을 기다리느라 세 시부터 행복해지는 여우의 이야기를 의주에게 보내주었다. 의주는 한동안 짬이 날 때마다 그 글을 몇 번이고 돌려 읽으며 곧 시간을 건너 자신에게 날아올 안부를 생각하고는 행복해했다. 

직접 만든 샌드위치로 저녁 식사를 하며 지안의 글을 읽고 창 밖을 바라보면 인공위성 같은 자동차들이 붉은색 푸른색으로 야단하며 어제와 같은 자리를 공전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각색의 도싯빛'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주는 빈곤한 방 속에 부유하도록 많은 장면들을 불러들였다. 사그라드는 줄도 모르고 타는 시가 끝처럼 형형히 빛나는 것들이 자신의 이젤에 등을 기대어 머무르도록 붓을 얼렀다. 역시 그렇지만,


이 풍경을 너와 함께 보며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 하루가 끝나고 보잘것없는 이부자리에 누우면 옆에서 모른 척 장난을 걸어오는 네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나의 고루하도록 딱 맞아떨어지는 시간 간격을 네가 메워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종종 그런 허튼바람을 하게 되었다.


* * *


 가끔 눈을 감으면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들 속으로 되돌아온다. 이미 몇 걸음은 떠나 다시 돌아보지 않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억은 방심할 때마다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 놓기 일쑤였다. 

수학은 그런 부작용을 억누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의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지안은 그런 꿈에서 깰 때마다 새삼 낯선 감정을 느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잠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워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네 부재는 여전히 나를 흔드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지안은 숨 가쁘게 살았다. 자신을 갉아먹는 가난. 기면증.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몇몇 징조들. 그런 것들에 지안은 몇 번이고 무너졌으나 이내 의주에게 기대어 다시 몇 번이고 일어섰다. 반대로 의주가 당장이라도 부서지기에 이르면 이번에는 의주의 표면이라도 잘 응고할 수 있도록 지안이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둘은 잠의 횡포와 싸워내었고, 스스로의 입막음에서 벗어났으며, 그 외에 그들을 옥죄는 여러 가지 틀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제거된 것들은 곧 새로운 틀들로 바뀌었다. 대학원생이라는 이름표, 병역 대상자라는 신분, 연구원이라는 직책, 화가라는 호칭이 지안과 의주의 이름 앞에 붙었다. 지안은 그것들이 모두 자신과 의주가 선택한 것이라는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꼬리표가 동경하던 이름들로 대체되어 목에 걸리는 경험은 몹시 설레이는 것이었다. 적어도 오랫동안 따로 불리우는 말 없이, '거기 뒷자리 자는 애'나 '쓸모없는 새끼(특히 주로 집에서는 지안을 그렇게 칭했다)'가 되어 온 지안에게는 그러했다.


지안은 새로운 이름들을 얻어 내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었다. 각종 아르바이트로 검게 바랜 밤은 방대한 수학의 품 앞에 다시 희게 새울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지안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장학금 기준 학점을 맞추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해야 했다. 그런 지안의 악착 같음에 있어 기면증은 큰 방해물이었다. 기면증을 이겨낸다는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지안은 자신이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처럼 드리우는 잠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지안은 이따금 일상을 완전히 되찾은 것처럼 굴었다.

잠은 사치고, 사치는 고딩 때까지 부릴 만큼 부렸어. 이제 빠듯하게 살아야지. 지안이 종종 하는 말이자, 의주가 몹시 질색하는 말이었다.


그러한 노력은 다행히 성과로 이어졌다. 학부생 신분이었음에도 지안은 함수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끊임없이 이어 나갔다. 마침내 그 결과물을 논문으로 정리하여 지안이 재학 중이었던 대학의 교수에게 보여주었으나 교수는 그녀의 논문에서 미흡한 점 몇 가지와 논문이 한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을 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몇 개월 뒤 지안이 논문의 언어를 포함해 교수가 말한 허점을 보완하여 다시 나타나자, 교수는 논문을 받은 지 일 주일 만에 지안에게 논문의 정식 투고 제안과 함께 국외의 모 유수 수학 연구 단체에서 지안의 논문을 근거로 그녀를 본 단체의 회원으로 임명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담은 초청문을 보여주었다. 지안은 교수가 쥐어 준 초청문을 들고 그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차분히 자리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기쁘게 통곡하였다. 지안의 이름으로 이루어 낸 첫 번째 성취였다.


한편 의주는 지안과 달랐다. 지안이 보기에 의주는 자신의 성취들과 그 뒤에 따라붙는 틀들을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의주는 지안과 반대로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많은 이름으로 분류되어 왔으므로, 새롭게 얻은 호칭들에게서 완연한 해방감보다는 구속감을 느끼는 그의 특성에 공감은 어렵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안이 딱딱한 글씨체로 쓰인 '힐베르트 공간의 쌍대공간을 이용한...' 이니, '범함수의 정의역의 집합론적 무한성...' 이니 하는 이상한 제목들 아래의 명단 사이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힘주어 써 넣는 데에 반해 의주는 항상 가명을 바꾸어 가며 자신의 예술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 앞에 내놓았다. 


의주의 작품은 주로 짧은 연작 형식으로 정렬되어 불특정한 시기에 공개되었는데, 연작마다 분위기와 접근 방법은 크게 달랐으나 지안을 비롯한 여러 팬들은 작품을 보자마자 그것이 의주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곤 했다. 의주의 작품에서는 그가 이름만으로 미처 지울 수 없는 색채가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색들은 하나의 유형으로 묶여 의주의 연작 하나의 테마로 자리잡았다. 

어떤 연작은 제법 주목을 받으며 평단과 시장에서 오르락내리락하였고 어떤 연작은 쏟아지는 작품들 사이에 무용히 묻히기도 하였지만 흥행 여부와 무관히 지안은 의주의 작품을 모두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파편들이었다. 너무 많은 조각들로 얼기설기 구성되어 한때 스스로를 가두었던 사람의 파편들. 이제는 죽음 대신 삶을 생각하며 오롯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파편들. 차가운 재료들로 만들어졌지만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무해한 따뜻함을 품은 파편들. 자신이 의주의 곁에 머무를 때에는 줄곧 영원하는 것만 같은 그런 파편들.


그랬기에, 지안을 처음으로 초청한 연구 단체에서 그녀에게 연구 인턴십을 제안하였을 때 지안은 망설였다. 의주가 복무를 마친 지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해외로 나가게 된다면 의주가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이었다. 혹시 이대로 원래처럼 가까워질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앞섰다. 의주에게 그러한 고민을 끝내 털어놓았을 때, 의주는 망설임 없이 다녀오라고 했다.


사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너어 막상 그렇게 단호하니까 좀 섭섭하다. 지안이 답지 않게 볼을 부풀리며 쏘았더랬다. 의주는 지안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우리의 그리움이 서로를 묶어 놓기에는 이번 기회가 너무 멋지잖아. 다녀와.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하자. 그래도 안 되면 내가 깨어 있는 동안 너한테 달을 보낼게. 바스라질 것 같은 시간을 온전히 알 수 있도록. 하고 말했다. 그 순간, 지안은 더 이상 어떤 물리적 거리도 의주와의 관계를 의심할 근거가 되지 않음을 마지막으로 깨달았다.


* * *


일단 1부 느낌이긴 한데, 어째 예전 작품보다 별로인 것 같은 느낌이...

( 앞 내용 : https://arca.live/b/lovelove/98357588?target=all&keyword=%EC%97%B0%EB%A7%90&p=1 )

아무쪼록 이어질 내용도 기대해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