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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검은 외투를 두르고 부리가 달린 희한한 가면을 쓴 의사가 폭우를 뚫고 걸었다. 생각보다 왕진이 늦어진 탓에, 계획대로라면 노을이 질 즈음에는 길을 나섰어야 할 그는 별 수 없이 해가 다 진 다음에야 길을 걷게 되었다. 여느 여행자라면야 이렇게 늦은 밤에는 그냥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겠지만 신전에 그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는 이 의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왕진을 받은 환자의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헛걸음은 아니었으니. 적어도 도착했더니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던가, 역병의 전파를 막는답시고 환자를 냅다 태워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우르릉-


나름대로 제법 두껍게 입고 왔건만, 비가 많이 내려서 그런지 으슬으슬한 냉기가 옷을 뚫고 스며들었다. 희미한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와중 그는 이를 딱딱 부딫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러다 본인이 감기에 걸려 드러눕게 될 지도 모르겠다며 투덜거린 그는 외투자락을 단단히 여미었다. 


...! ?! !!


"...또 뭐야."


오른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사는 처음에는 별 일 아니겠지 하며 지나치려 했다.


화륵-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그는 재수 옴 붙었다는 생각을 하며 별 수 없이 불꽃이 보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탈라!"


그가 소리의 근원지에 근접했을 즈음, 거의 꺼져가던 불꽃을 뛰어넘으려던 늑대 무리가 불길에 휩싸였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타들어가는 늑대들 너머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텅 빈 유리병을 든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그 누군가는 젊은 여성인 듯했다.


의사는 가죽과 털이 타들어가는 불쾌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나름 감탄했다. 마법이란 건 자기와 맞는 원소의 이름만 알면 일단 누구나 사용 가능했지만,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실외에서 불꽃의 이름을 부르는 건 어지간히도 재능이 있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유리병을 보건데 기름같은 가연성 물질을 같이 사용한 듯 하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뛰어난 마법사였다.


"...의사?"


의사가 속으로 마법사의 수준에 감탄하는 사이 상대 쪽에서 먼저 의사를 알아보았다. 그 역시 말을 꺼내려는 찰나, 커다란 발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두 사람 모두가 고개를 돌린 곳엔 평범한 사람 키의 두 배는 되어보이는 녹색 피부의 거인이 둘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트롤이 왜 여기에?"


마법사는 넋이 나간 듯 잠시 멍을 떄리다가 아차 싶었던 듯 의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도망가세요! 여기는 제가...어, 어? 기름이 없어? 벌써 다 썼다고?"


그녀의 용기는 가상했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다지 따라주지 않는 듯 보였다. 날씨는 화염사에겐 최악인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인 데다가 가져온 촉매는 전부 떨어진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도, 마법사는 이내 가방을 뒤지던 손을 멈추고 트롤을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불꽃의 이름을 불렀다.


"아탈라."


퍼엉-하고 순간적으로 트롤의 얼굴이 불에 휩싸였다. 트롤은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넘어지거나 하다못해 들고 있던 거대한 나무 몽둥이를 내려놓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쏟아지는 비는 빠르게 불꽃을 꺼트렸고, 트롤 특유의 튼튼한 가죽은 큰 화상은 남기지 않았다.


"아탈라. 아탈라. 아탈라! 아 씨...! 뭐해요?! 빨리 도망가라니까! 이제 2번 밖에 안 남았다고!"


마법사가 연속으로 마법을 난사함에도 잠시 트롤을 멈칫거리게 할 뿐 상황에 큰 진전은 없었다. 오히려 트롤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듯, 콧김을 내뿜으며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마법사가 최소한 몽둥이라도 떨어뜨리기 위해 몽둥이의 손잡이 부분에 마법을 다시 한 번 사용했지만, 깜짝 놀란 트롤이 몽둥이를 놓치자마자 진흙탕에 빠진 몽둥이에 붙은 불은 순식간에 꺼졌고 트롤은 그 몽둥이를 다시 집어들었다.


탕!


그리고 내심 눈앞의 마법사가 트롤을 해치워 주길 기대하던 의사는 그녀가 패닉에 빠져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별 수 없이 총을 꺼내 발사했다. 화약이나 총알이나 요즘 세상에는 비싸기 그지없어서 예산에 쪼들리는 그는 가능하면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의사이자 성직자인 그가 도움이 필요한 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물론 권총 탄환 한 발 정도로는 당연히 트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었다. 분명 가슴께를 노렸는데 왼쪽 어깨에 적중한 총알을 보며 혀를 찬 의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격 실력 자체는 아주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주 좋은 것도 아니었던 의사는 애초에 권총으로 트롤을 죽일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이런 야외에서, 그리고 비가 쏟아지는 날씨 속에서 눈앞의 마법사처럼 화염을 쓰는 이들은 힘이 크게 약해졌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누군가가 특정 상황에서 손해를 본다면 다른 누군가는 이득을 보기도 하는 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물이나 대지를 다루는 마법사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쿠르릉.


혹은, 벼락이라던가.


"카탁."


의사가 지팡이로 트롤의 어깨에 박힌 총알을 가리키며 나지막히 이름을 부르자, 그에 호응하듯 날카로운 번개가 트롤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트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감전되어 온몸을 뒤틀다가, 이내 눈을 까뒤집고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와...아니 그쪽도 마법사면 진즉에 좀 도와주지..."


내심 바닥이 젖어서 자기도 감전될까봐 쫄았던 의사는 투덜대는 마법사의 손을 냅다 움켜쥐고는 그가 사는 마을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잠깐...! 왜 갑자기 뛰어요?! 그보다 어디로 가는데?!"


천둥소리와 섬광 탓에 주변의 들짐승들과 괴물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이미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마법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런 날씨에 벼락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해질 테고, 군인이 아닌 다음에야 평소에는 벼락 마법을 쓸 일 따위가 거의 없으니 못해도 두어 번 정도는 남아있을 텐데.


"난 마법사 아닙니다!"


"마법사 아니라도 보통 하루에 다섯 번은 쓸 수 있잖아요!"


그 말에 울컥한 의사는 결국...


"아 씨, 난 하루에 한 번이 끝이라고!"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양어머니이자 스승조차도 '절망적인 수준'이라고 칭할 정도의 저열한 마법 재능에 대한 울분을 한껏 담아 쏘아붙였다.


그 말에 불쌍하다는 듯한 눈초리와 함께 입을 다문 마법사와 의사는,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과 함께 빗속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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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안해요.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요."


"...의사이자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밖에서 역병에 걸려 죽어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신전으로 복귀한 일행은 하나 건너 하나의 촛불들만 지펴진 복도를 지나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섰다. 마법사가 눈치를 보며 사과했지만, 의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실 아까야 상황도 급해서 울컥하기는 했지만, 사실 의사는 본인의 마법 재능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전격 마법은 이런 싸움박질 말고는 쥐뿔도 쓸모가 없었으니 평소에는 체감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안이 좀 어두운데...램프같은건 없나요?"


"램프는 있습니다. 기름이 없어서 그렇지. 양초를 가져올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 괜찮아요. 불을 담을수만 있으면. 아직 한 번 남았거든요."


눈앞의 마법사가 화염사라는 걸 상기한 의사는 별 말 없이 진즉에 기름이 떨어진 램프를 내밀었다. 그녀가 램프를 양 손으로 받아들자마자, 조그만 불꽃이 타오르며 방 내부를 비추었다. 그녀는 걸이에 랜프 손잡이를 걸고는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았다.


"아야."


그녀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린 뒤 로브를 걷어올렸다. 발목이 빨갛게 부어오른 걸 보아하니 아까 급하게 뛰어올 때 다쳤을 것이다.


"으...약초가 어디 있더라..."


"잠시만."


의사는 무릎을 꿇은 채 발목을 자신의 왼손으로 들어올렸다. 마법사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곳이 신전이며 그가 자신을 '의사이자 사제'라 소개한 것을 떠올렸다.


"...신께 간청합니다."


의사가 약식 기도문을 읊조리자, 부드러운 하얀 빛이 마법사의 발목을 감쌌다. 잠시 후 빛이 걷힌 뒤에는 발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져 있었다. 의사는 희미한 두통에 이마를 눌렀다. 하여튼 마법이든 기적이든, 이 망할 세상은 난데없이 흘러들어온 이계의 영혼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신성력이야 본디 신에게 선택받아야 할 것을 인간에게서 물려받은 것에 대한 괘씸함도 없지않아 있는 듯 했지만...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보니 제 소개를 안했네요. 붉은 탑의 마법사, 유나 페닐리아에요."


마법사가 로브의 후드를 벗으며 이야기했다. 아름다운 얼굴보다도 더 시선을 끄는, 평범한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붉은 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그녀가 얼마나 불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 증명하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의사는 하나의 의문점을 제시했다.


"탑의 마법사가 왜 이런 곳에 계신 겁니까?"


까다롭기로 유명한 탑에 소속될 정도의 마법사라면, 이런 시대에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 역병이 돌아 어지간히도 높으신 분이 아닌 이상 수도 없이 죽어나가고, 그로 인해 엉망이 된 치안 사이로 범죄와 제때 토벌되지 않은 괴물들과 들짐승이 들끓는 세상에서 저 정도로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라면 여느 귀족에게 고용되어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세상이 망해가는데 꼴에 원로라는 망할 노친네들은 방구속에 틀어박혀서 헛소리나 늘어놓는 꼴을 보니 답답해서 직접 뭐라도 하려고 나왔어요. 아까 저희가 마주쳤던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숲이 있는데, 거기를 좀 정리하다가 하필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잠시 물러났는데, 몇몇이 저를 쫓아와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정말 대책이 없으시군요. 굳이 그런 일을 안 해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사실 분이."


그 말에 유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제가 호구라는 건 아는데...이런 세상에서 의사 일을 하는 분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


정곡이 찔린 의사가 침묵하자, 유나는 히죽 웃었다.


"농담이에요. 다 사람 살리자고 하시는 일인데. 그러고보니 이 방도 제법 실용적으로 꾸며져 있네요. 이런저런 실험 도구도 있고. 와, 책도 꽤 많네요? 좀 읽어봐도 되나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던 유나는 눈을 반짝이며 책장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았다. 책은 의사와 그의 스승이자 어머니 노릇을 했던 신전의 전 최고사제 한나의 공통된 취미라, 한 권씩 모으다 보니 어느새 책장 여러 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훼손하시지만 않는다면, 마음대로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전 회진을 해야 하니, 이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회진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가져올 테니, 그때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죠."


"네 알겠...아 잠깐, 그러고보니 아직도 이름 안 알려주셨네요?"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려던 의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되었든 먼저 인사를 받은 의사는, 결국 가면을 벗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이 신전의 하급 사제이자 의사인 유진입니다."


"...어머."


"무슨 문제라도?"


"아, 아뇨. 크흠, 쓰고 다니시는 가면에 비해서 생각보다 멀쩡하게...그보다 좀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아, 그리고 좋은 이름이네요."


옅은 홍조를 띄며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유진은 다시 가면을 뒤집어썼다. 유나는 아쉬워하는 기색을 드러냈지만, 기침을 하는 환자들 앞에서 대놓고 맨얼굴을 드러낸 채 진료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전 이제 환자를 상태를 살펴야 하니, 책이라도 읽으시면서 시간을 보내시길."


"네...아, 안 추우세요? 저야 다루는 마법이 마법이다보니 괜찮지만..."


"어차피 환자실은 항상 따듯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그곳에 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몸도 따듯해질 테니 괜찮습니다."


유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 하나를 집어들고 펼치자, 유진은 등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문득, 처음 이 이름을 받았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얘, 이름이 뭐니?'


'...모르겠어요.'


'으음...그러면...유진이라고 할까?'


'...! 유진, 이요?'


'왜, 싫어?'


'아뇨, 아니에요. 유진이라고 할게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유진이었던 의사이자 성직자의 발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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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램프 판타지와 전염병 아포칼립스를 짬뽕한 소재임. 사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역병의사가 나오는 로우파워 판타지물을 보고 싶어서 만들었음. 음울한 분위기의 다크 판타지를 유랑하는 역병의사 어캐 참냐고.


뭔가 만날 마력 마력 하다보니 좀 식상해서 원소마다 정해진 이름을 부르면 작동하는 일종의 초능력에 가까운 마법 시스템을 차용했음. 대신 위력을 크게 너프해서 아무리 사용자가 강해도 환경이 안 받쳐주면 위력이 떡락하거나 아예 발동이 불가능한 수준(예를 들어 불 마법은 비가 내리면 위력이 약해지고, 수중에서는 아예 사용이 안 됨)이라고 설정하고 신성력도 외상이나 저주같은 것에는 유용하지만 질병에는 상당히 무력한(아무리 뛰어나도 증상 완화 정도가 한계) 힘임.


기본적인 설정은 흑사병같은 대규모 돌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너무 많이 죽어서 치안 자체가 불안정해진, 시간대만 뒤로 좀 돌린 통상적인 전염병 아포칼립스물임. 저런 트롤같은것도 원래는 경비대 서너명 정도만 있어도 바로 죽는 평범한 괴물인데 경비고 나발이고 다 죽어나가서 제때 제거가 안 되다보니 주변 숲이나 산맥은 말 그대로 개판이 되어버리고 도시의 슬럼가는 범죄의 온상인 상태.


주인공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환생했다보니 의학 지식이고 나발이고 평범한 사람 수준의 지식밖에 없어서 실질적인 교육은 전부 현지에서 받고 그중에서 말도 안 되는 미신(일부러 피나 오물을 안 닦고 환자를 돌본다던가...)같은 것들만 현대 위생 관념을 적당히 적용해서 걸러내고 최대한 위생적으로 다니는 정도임.


질병의 원인, 치료제 혹은 예방책, 그리고 현재 마을 및 신전의 사정에서 시작해서 바깥 세상의 상태나 높으신 분들을 어떻게 병을 피하려고 하는지, 무너진 통제로 인해 개판이 되어가는 도시나 짐승과 괴물의 습격 등등 써나갈 만한 이야깃거리는 아주 많음.


그니까 이런 역병의사 판타지 소설 누가 "써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