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력 ]

이름 : 정태영

학력 :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 학사 / MIT 경영대학원 석사

경력 : 전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부사장 / 전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사장 / 현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부회장


고등학생의 질문 요약(질문 또한 장문이므로 핵심만 요약하겠음)


  질문1 : "농사를 모르면서 하인을 부릴 순 없다."라는 격언과는 달리 스타 CEO들 중에서는 

               회사가 속한 업계 특성을 잘 모르는 외부 경영인을 영입하여 성장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예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가 대학에 가서 경영학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현장에서 차근차근 익혀 경영인으로까지 나아갈 순 없을까요?


  질문2 :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마인드는 어떻게 갖출 수 있나요?

              정태영 사장님께선 10대 때 어떻게 하셨길래 지금처럼 과감한 혁신가가 될 수 있었나요?

              창의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는 사람과 추구하는 사람은 많으나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고

              어떤 것을 함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려면 청소년은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요?


  질문3 : CEO의 하루를 알고 싶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주무시고 몇 시간 근무하시나요?

              정태영 사장님께선 늘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를 강조하시는데, 휴식 시간에는 어떻게 보내시나요?


  질문4 : 정태영 사장님의 프로필을 보면 엄청난 엘리트셨는데, 공부를 하거나 무언가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or 자세)은 무엇인가요?

              (예를 들자면 수학적 사고, 계산력, 기억력 등) 또한 그런 덕목을 기르기 위한 방법은 어떤 건가요?


----------


  안녕하세요?


  한두 달 전 출장 중 홍보 이사가 반 농담 형식으로 김군의 에피소드를 전하였을 때는 처음에는 웃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혹시 이 당돌한 꼬마(실례)가 답변이 없다면 상처받진 않을지, 또래의 자식을 둔 사람으로서 걱정도 됐고 

  또 한편으로는 게임이나 할 법한 나이에 신문을 정독하고 세상에 눈을 뜨려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했습니다. 

  한편으론 그런 자세를 심어준 부모님들이 참 교육적인 분들이라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 정도는 답을 주어 김군의 인생에 작은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겠다 싶어 연락하라 부탁했습니다. 

  애석하게도 김군의 희망처럼 제가 반복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래서도 안되고요. 대신 이번 한 번만큼은 직접 정성 껏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미리 말해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김군이 혹시 여러 기사를 보면서 저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셨다면 사실 전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큰 기업을 운영하며 가끔 언론에 포장되어 나오다 보면 무언가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김군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제 경험으로도 수많은 국내/외의 전설적인 CEO들을 만나보면 응당 훌륭한 점도 있으나, 

  한편으론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동시에 느낍니다. 저는 이런 점이 더 좋았습니다. 

  대단하면서도 구름 위의 사람들이 아니니 "나도 하면 되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니 김군도 제 말에 너무 큰 기대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길 바랍니다.


  첫 질문에 대한 답인데요. 

  이건 정말 정답이 없습니다만 이렇게 답변하면 실망할 테니 제 소신대로 말하겠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했다고 꼭 비즈니스를 잘 한다곤 할 수 없으나, 모르면 많이 힘들고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경영이 나날이 복잡해지는 추세여서, 주먹구구식 경영은 생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영학이란 학문은 무얼 배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일단 지식이 생겨야 경영학 서적도 골라서 볼테니까요. 자신이 모르면서 전문경영인을 쓰겠다는 소리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일단 본인이 잘 알아야 사람도 잘 쓸 수 있고 유능한 사람이 일하러 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학부에서의 경영학 전공은 반대합니다. 

  경영학 교수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학부 시절엔 문학, 역사, 경제학, 수학, 물리학, 공학 등 

  조금 더 기초적인 학문을 전공해서 자신의 세계를 깊고 넓게 열어 놓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경영학은 매우 실무적인 학문입니다. 역사나 문학과는 그 깊이가 차이가 납니다. (경영학 교수님들은 노여워하시겠지만) 

  당장 제 자신도 불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대학생인 두 딸도 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저는 그 선택이 매우 기쁩니다. 

  이들은 언뜻 보면 경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런 곳에서 자신의 사고에 깊이를 주는 일은 평생의 자산이 됩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대학들은 학부에서 경영학 전공 자체가 없고 대학원에서만 가르칩니다. 

  월가(월 스트리트)에서 만난 수 많은 금융인들도 학부에서는 전혀 다른 전공을 하였지만 성공했고 

  대화를 나눠보면 관심과 취미가 참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신 학부에서 거시/미시 경제학이나 회계, 재무 등의 기본적인 과목은 선택으로 들어 놓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상세한 부분은 MBA에서 배우면 되니까요. 특히 MBA를 가는 것을 확실하게 정했다면 학부 때는 정말 다른 분야를 택해 보세요. 

  학부와 MBA를 모두 합쳐 6년 동안 경영학 하나만을 전공한다는 것은 조금 따분하게 보이지 않으세요?


  두 번째 창의성에 관한 답입니다. 

  저는 저를 포함해서 누가 특별히 창의적이라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누군들 아이디어를 머리에 짊어지고 다닐 리도 없고요. 


  저도 요즘 창의적이라고 소문나서 가끔 아이디어를 달라는 분들이 있지만, 

  저라고해서 듣자마자 남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없습니다. 

  대신 업무를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 기본 자세에 대해서라면 제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자기 일에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을 억지로 하지 말고 재미를 느끼면서 계속 고민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찾아옵니다. 

  대충 "이 정도면 됐어" 정도에서 끝내지 말고 고민 또 고민하면 감사하게도 새로운 생각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매사 적당히 일하는 사람이 무슨 큰 재능이나 있어서 창조적인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 좋습니다. 

  저는 "이 일은 '원래'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든 특정한 무엇이 고정된 것은 아니며 늘 개선할 점이 있고 또 다른 혁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업에서 고정 관념 없이 항상 혁신의 여지가 있다고 믿으면, 늘 고민하고 그걸 반복하다 보면 생각이 열립니다. 

  스티브 잡스가 ‘휴대폰은 원래 그런 거야, 컴퓨터도 다 똑같은 거 아냐?’라는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오늘 날의 창조적인 성공을 했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대학에 가서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세요. 여행도 큰 공부입니다. 

  음악에도 빠져보고 그림에도 관심을 갖고 카메라의 원리도 익혀보세요. 

  농사의 이치도 궁금해 할 수 있고, 광고 회사의 일도 재미있습니다. 

  때로는 IT산업에 화장품 회사의 원리가 도입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전문적으로 깊이 알거나 잘 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비교적 많은 분야에 얕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인데요. 

  그래서 와인, 카메라, 그림, IT, 패션, 스포츠 등등에 관심이 생기면 한 번씩은 훑고 갑니다. 

  그래놓고는 조금 원리를 알았다 싶으면 다른 분야로 넘어갑니다.


  이게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닌데 덕분에 요즘의 비즈니스 추세라는 복합성에선 큰 장점이 되고 있습니다. 

  IT를 잘해도 디자인을 모르면 좋은 휴대폰을 못 만드는 세상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어느 한 분야에 심취했던 모습을 단편적으로만 보았던 분들은 

  아직도 그 모습만 기억하고 저를 IT에 해박한 사람 또는 와인을 정말 잘 아는 사람으로 오해합니다.


  저는 지금도 다른 분야의 여러 회사를 공부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금융을 하는 사람이지만 항공, 마케팅, 미술관 등의 운영을 공부합니다. 

  한 예로 지난 달의 어떤 토요일에는 오전에 새로운 농작물 재배법을 개발한 분을 찾아가서 배웠고 

  오후에는 파주의 신도시를 찾아가서 건축물을 보았으며 저녁에는 마사이족과 함께 생활하신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광범위한 지식(?)은 당장은 금융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머리 어딘가 자리 잡았다가 필요할 때 다른 지식들과 결합해서 

  귀중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인 제 생활의 모습인데요. 별로 권하지 않습니다만, 있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평소에는 하루 5시간 정도 잡니다. 늘 잠이 부족하다 보니 주말에는 10시간을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식사 약속 등을 별로 좋아 하지 않아서 점심, 저녁을 회사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대외적인 약속이 다른 CEO들에 비해서 매우 적은 편입니다. 특히 점심 약속을 싫어합니다. 

  점심 약속을 잡으면 보통 두 시간 정도가 없어지는데, 그 시간에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어디 나가서 비생산적인 대화를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CEO로서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죠.


  저녁 약속이 없는 날에는 대개 8~9시 사이에 퇴근합니다. 

  취미 생활은 위에서 말한대로 많이 보고 다니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시간 소비가 많아서 골프는 안 칩니다. 대신 운동을 하죠. 


  바둑이나 노름 같은 잡기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대신 퇴근해서 친한 사람들과 와인 한두 잔 마시는 낙은 있습니다. 

  하루 내내 회의와 이메일 처리로 거의 밀려다니는 편이고 방에는 소파도 없습니다. 

  드라마에선 사장들이 소파에 앉아 거들먹 거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제게는 꿈같은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화장실 갈 틈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생 시절의 조언입니다만 일단 제 자신이 워낙 모범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네요. 

  고등학교 때는 유화 그리고 시짓는 일에 심취해서 점수가 급락했고 대학생 땐 항상 교수님들께 놀러만 다닌다고 혼났습니다.

  졸업 후에는 광고 공부한답시고 취직도 안 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던 백수여서 부모님의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랬던 저에 비해 김군은 오히려 스승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설마 그렇게 하고도 성공했겠느냐, 거짓말이다!"라고 하겠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학생 때 내내 그리 모범적이지도 않았고 좋지 않은 의미로 상당히 특이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대신 집중력은 매우 강했고 자존심이 있어서 몇 번 도약한 적은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까진 반 60명 중에서 20등 정도를 했는데, 하루는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가서 부회장에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교감 선생님이 어머니를 부르셔서 ‘부회장은 성적이 우수해야 하는데 아드님은 그러지 못하니 자진해서 관두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충격을 먹고 일주일 내내 밤을 새 공부한 다음 돌아오는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고 

  그 다음에도 거의 계속 1, 2등을 했습니다. 반에서 1등도 못해본 사람이 일을 낸 거죠.


  대학 졸업 후 영어도 잘 못했고 경영학도 잘 몰랐는데 놀다가 공부나 할 겸 MBA나 가자고 마음 먹었더니 

  친구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제와서 무슨 유학이냐는거죠. 

  하지만 그 말에 오기가 발동해서 1년 동안 매일 5시간만 자고 유학시험과 기타 준비를 하였고 결국 남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 갔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모든 유학시험 책을 풀었고 고등학교 때보다 영어를 더 열심히 암기하였습니다. 

  MIT에 가서는 첫 수학 수업에서 난생 처음 D를 받았는데, 이것이 저를 많이 자극하고 열심히 몰았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말 좋은 취미입니다. 계산력이나 암기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수학은 점점 진도가 나가다 보면 숫자를 다루지 않고 논리를 다루기 때문에 논리적 사고 방식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역사도 꼭 챙기셔야 할 과목이고요. 특히 영어하고 한자에 신경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김군 시대에는 영어를 아주 잘 해야 합니다. 

  저의 세대만 해도 소통이 목적이었지만 김군의 세대에서는 기본적으로 유창해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영어가 부자연스러움은 문맹이라고 해도 과언이 틀린 말이 아닐 시기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자를 잘 하셔야 합니다. 한국 사람은 결국 아시아를 배경으로 일합니다. 

  MBA를 졸업하고 미국 등지에서 일하던 친구들도 결국은 한국, 홍콩, 싱가폴 등으로 다 모입니다. 

  한국 사람한테 남미나 유럽 시장을 맡길 국제적인 회사는 없습니다. 

  아시아를 배경으로 우수 인재 취급을 받으려면 한자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한자는 한국어, 중국어, 일어의 기본이 됩니다.


  끝으로 당부의 말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김군은 분명 또래에 비해 많이 성숙하고 부모님들도 자랑스러워 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 지나친 성숙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장래에 무엇을 할 지 함몰되지 마세요. 


  현대카드 사장과의 대화보다는 친구들과의 치기 어린 대화가 아직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사업을 꿈꾸고 자신을 사업하는 기계로 조련하면 조급한 마음에 지칠 수도 있고 

  여유, 포용력, 균형 등과 같은 더욱 중요한 단어들이 경시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학교 공부에 전념하고 신문을 읽으며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만 아는 정도가 제일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김군 스스로의 순수함과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무한한 잠재력에 아직은 더 시간을 주고 즐기셨으면 합니다. 

  젊음의 가장 큰 무기가 끝없는 불확실성 아닌가요?


  대화 재미있었고 저도 글을 마치려 합니다. 

  출장 중에 잠시 빈 시간이 있어서 답신을 합니다만, 덕분에 저녁 먹을 시간이 사라졌네요. 

  좋은 학생, 좋은 친구, 좋은 가족이 되어서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는 몇 번이고 찾아 옵니다. 

  이 세상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내버려 둘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어디선가 자신이 소망하는 일을 재미있게 하는 김군의 모습을 떠올리니 벌써 즐겁고 고맙기까지 합니다. 

  훗날 성공하면 찾아와서 밥이나 한 번 사세요. 물론 그때 쯤이면 저는 은퇴한 후 치매에 걸렸을 수도 있으니 

  자세히 설명해야 김군이 누군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ㅡ 정태영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