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의 꿈을 꾸었다.

소란이 끊이지 않아 조금은 정신이 없었으면서도 즐거웠던 날들.

모두가 힘을 합쳐 멸망의 입에 재갈을 물렸던 날들.

그리고 그 꿈은 언제나 내 손끝에서 허망하게 찢겨나가고,

나는 다시 거꾸로 눈을 뜬다.


"...규정된 시간의 경과를 확인. RENEWA, 재기동합니다. 읏..."


도통 익숙해지지 않고, 아랑곳하지도 않는, 의지 없는 음성이 목을 타고 흘러나온다.

기지개로서는 엘프미 떨어지는 소리가 이제는 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시간선 E-10. 통제를 벗어나 폭주한 로봇들이 모나티엄을 시작으로 엘리아스 전체를 장악해버린 세계.

배척된 죽음의 보루를 넘어, 모든 생명체들이 기계화라는 참혹한 운명에 묶여버린 세계.

정령과 유령들도, 세계수조차도 예외가 아니었고, 더욱이 나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대비한들 무한한 가능성은 말 그대로 한없이 가혹하여 불운한 사고를 가져온다.

어딘가 다른 시간선의 나는 불운을 피해갔을까? 그조차도 지금의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건물 옥상에서 커피 한 잔으로 입을 달래본다.

때는 마침 다 저물어가는 해질녘. 멀리 보이는 세계수의 모습이 어스름을 감아 웅장하다.

이제는 기계들의 동력원에 불과하게 되어버렸어도 말이다.

난간 아래로 내다보이는 경치들조차도 여느 때와 같아보인다.

아니, 전형적이고 빡빡하게 돌아가는 기계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편의점을 들락거리는 엘프들. 자판기를 두들겨패는 수인들. 규정 속도를 한참 넘어보이는 배달부.

마치 모든 것이 변해버리기 전의 그 나날들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언젠가는 분명 한 번은 잃었던 모습이었다.

단지 완벽할 것만 같았던 기계들의 논리조차, 몇 번인가 멸망의 위기를 스쳐가고서야 생명과 타협한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요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나은 효율을 내고 있었다는 것만은 이해한 것이다.


종이컵이 비었음을 눈치챘을 즈음에는 이미 검푸르기만 한 하늘에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문득 어느 것인지도 모를 별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이내 작게 보이는 별이 손끝에 가려지고, 지난 날의 기억이 뒤덮어온다.


갑작스레 때 아닌 멸망을 앞둬버린, 이상적인 조건의 세계.

리뉴아는 이번에야말로 그 세계를 구하고자 필사적이었다.

필요는 이해하더라도 교주님조차 영 꺼림칙하게 여기셨고, 단지 명칭만이라도 완곡하게 정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엘리아스 프론티어.

아니, 결국에는 침략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침략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지 않을 선택권은 누구에게도, 나에게도 없었고, 없게 만들었다.

기어이 위기를 몰아내고 모두가 마냥 기뻐하던 그 순간에, 숨죽이던 배신이 내 손끝을 총구로 삼아 불을 뿜었다.


한 세계를 정복한 기계들은 우연히 노획한 시간여행자를 통해,

다음 목표가 될 평행세계들과, 이에 간섭할 수 있는 미래의 기술력과,

이 침략을 실행하기 위한 최적의 선봉대 하나를 손에 넣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다른 시간선의 엘리아스를 구하고자 힘썼다.

모두가 엘리아스의 위기에 맞서, 알게 모르게 온 힘을 다해 맞섰다.

그리고 온 힘이 다했을 때, 나는 기계들의 본대에게 침략 개시의 신호를 보내었다.

운 없게 구해지지 못한 세계라 하더라도, 적잖은 잔여물을 큰 힘 들이지 않고 취할 수 있었다.

운 좋게 구해진 세계라 하더라도, 침략을 막아낼만한 결정적인 수는 암암리에 처리되어 있었다.

어떨 때는 기계들의 시간선이 거짓된 무대가 되기도 했다.

세계 하나를 먹어치우는 일인데, 큼직한 로봇 한두 대가 대수였을까?


딸칵.

개조된 손가락을 열어올리자, 드러난 것은 뾰족한 마취침.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던 배반의 쐐기.

리뉴아는 그들이 비밀을 알아챌 수단조차도 너무 많이 알고 보아왔고, 그대로 대비책을 위한 견본이 되었다.

설령 생각을 읽는다고 해도, 어떻게 읽어지는지만 알고 있다면 속이는 일은 또 어렵기나 할까?

이런 상황을 상상도 못 했다는 듯한 교주님들의 표정과 휘적이는 팔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시야가 옅게 흐트러진다. 그리고 문득 눈에 별빛이 든다.

옛 생각에 젖어 있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기계의 손끝.

그런 멈춰있는 손끝을 기다리다 못해 가려진 별이 기어나와서는, 기어이 글썽이는 눈에 빛살을 꽂아넣는다.

불필요한 반사를 따라 움츠린 눈가에서 한 방울이 떨어진다.

다시금 초점을 하늘 너머로. 무수한 별들과, 새까맣기만 하다가 별빛에 옅은 푸른빛으로 물드는 밤하늘이 보인다.

알아볼 수도 없는 무수한 세상을 올려다보며, 문득 옛 시간 언젠가의 다짐을 떠올린다.

다시금 손끝의 마취침을 바라보며 '점검'한다.

변함없이, 가장 중한 이를 마음까지 꿰뜷어 잠재울 수 있을 것처럼 뾰족하다.

하지만 이 바늘조차도, 제아무리 몇 번을 고쳐 벼리더라도, 어떤 날에는 불운하게 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 날에는 기계들조차도 상정하지 못했다며 화들짝 넘어갈 것만 같다.


"...가상 엘프격의 안정화를 확인. 작전 모드로 이행합니다."


눈물을 닦고 있다보니, 시스템 메세지가 입 밖으로 기어나오며 한 몫을 거든다.

정신 활동을 안정시키기 위한 잠깐의 유예가 끝나고 다시 선봉대로서 출발할 시간이다.

기계들은 포기를 모른다. 리뉴아도, 나도 그렇다.


이번에는 더 없이 실패할 수 있으면 좋겠다.






- 필자 후기

일전에 아이디어만 있었던, 모 세계선에서 사건에 휘말려 배신 기계 요원으로 개조된 리뉴아 이야기.

세세한 건 대부분 떼고 의식의 흐름에 맡기니 뭐라도 나왔다는 느낌에 옅게 만족스러운 기분.

그러나 쓰다보니 볼문학 풍미가 치명적이리만큼 희석된 것만 같은 자학적 불편함.

TMI는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을테니 길게는 못 쓰겠는 후기.

다음엔 칸구마 클론 사태라도 끄적이고픈 마음.

양갱에 파묻지만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