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색채.

어둑한 보랏빛. 먼지투성이의 잿빛. 밝은 주황과 약간의 초록.

그리고 어쩌면, 꿀 떨어지는 누런빛과 눅눅한 흙빛.

하지만 그 중 어느 것과도 달라 낯선, 그러나 낯설지 않을 색채가 눈에 들었다.

화창한 하늘빛과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눈가에 날아들었다.


"...으앗! 누, 눈부셔... 어? 여긴..."


부스럭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면 그곳이 어디인지는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싱그럽고 파릇파릇한 식물들이 한 편으로는 가슴이 웅장해지게 자라나 있는 곳.

요정 왕국 최고의 정원사가 가꿔낸 최고의 정원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흙바닥 한가운데에서 눕혀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캬롯 씨의 정원이잖아? 방금 전까지 마녀 왕국에 있었는데? 그리고..."


후두둑-

그녀가 갑작스런 상황에 혼란해하고 있던 때.

가까이에서 뭔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옅게 깔려있던 누군가의 콧노래가 멈췄다.

고개를 돌려보면 한 요정이 손에서 죽창으로 보이는 것을 놓친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칸나...?"

"캬롯 씨?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겁니까?"

"지금... 캬롯이라고 했지? 그렇게 말한 거 맞는 거지?"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을... 어디를 어떻게 봐도 캬롯 씨... 우왓?"

"흐아아아앙! 칸나... 칸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캬롯은 아직 흙투성이인 칸나를 끌어안고 그렁거리던 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단 진정하시고..."




가까스로 캬롯이 울음을 그치고나니, 칸나는 그동안의 일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일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의 범인, 그 알바 마녀를 체포하기 직전의 순간에,

마녀가 던진 포션에 맞고 자신이 고구마가 되었던 일. 그 상태에서 쥐에게 뜯어먹힌 일.

그리고, 무사히 되돌아오기 위해 고구마 과육이 자라도록 땅 속에 묻혀, 오랜 시간동안 길러졌던 일.

그리고...


"캬롯 씨! 쥬비 씨가 꿀을 이렇게나 많이 선물로 보내줬습니다!"

"캬롯 씨! 부탁하신 밭갈기 다 끝냈습니다! 잘된 것 같지 않습니까? 에헤헤헤..."

"...캬롯 씨?"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말 그대로 고구마처럼 불어난,

온전한 '칸나'가 되지 못한 고구마-엘프 클론들의 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빨리 나오지 않은 칸나가 잘못한 거라구!"

"어휴..."


파먹힌 과육을 되돌리려는 것은 아마도 좋았지만, 너무 많이 자라서 여러 덩이가 되어버린 고구마 또한 문제였다.

늘어난 덩이 중에서 어느 것도 칸나였던 것이었고, 해제 포션을 뿌리면 고구마에서 칸나가 되었다.

다만, 이들 대부분은 말하자면 유전자만 같은 복제품이고, 엘프격체로서는 별개였다.

아마 새로 자라난 칸구마 과육에 기존의 칸나 성분이 충분히 함유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이번에야말로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칸나!"

"캬롯 씨..."


그만큼 울어놓고도 캬롯의 눈에는 그렁거림이 다 가시지 않았다.

익숙할 리가 없는 괴로움의 위에, 그리움과 반가움이 어려있는 모양새였다.

첫번째 실패를 마주하던 순간의 상심은 어떠했을까. 그 이후로는 또 어땠을까.

한때 친구였던 누군가의 모습을 한 것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 하고,

어떤 것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또 어떠할까.

죽음이라 하는 영원한 상실이 모습을 꼭꼭 감춘 세상에서, '칸나'는 한동안 그렇게 되어버린 존재였다.




얼마 후, 둘이 모나티엄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여어, 칸나."

"응?"


어느 엘프가 칸나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칸나가 진압반에서 알던 얼굴이었다.


"하아... 아무리 내가 자리를 오래 비웠기로서니, 어디서 가볍게 말을 놓고 있어?"

"어, 어? 이 분위기는... 반장님? 칸나 반장님이십니까?"

"응! 오늘 드디어 칸나가 돌아왔어!"

"아, 그, 그렇군요! 잘 된 일이네요. 하하..."


병사였던 듯한 엘프의 반응은 상상치도 못한 일을 마주한 듯 뻣뻣했다.


"그래서, 다른 애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 나 없는 동안 뭐 큰 사고라도 친 건 아니지?"

"어... 혹시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응? 소식?"

"네. 사실은 진압반이 말이죠...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

"뭘 그렇게 뜸 들이고 있..."


그때, 병사 엘프의 무전기에서 무전이 들려왔다.


"수인들이 또 약탈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남부 지역에 칸나반 지원 바란다!"

"지원 요청 확인, 현장으로 출동하겠다, 오바!"

"...하?"


무전 너머에서의 음성이 날것의 혼란이 되어 칸나의 머릿속에서 퍼덕여댄다.

이어서 마침 옆 길목으로부터 발소리가 울리자, 의문만큼은 머잖아 종식되었다.

대충 수십은 되어보이는 칸나의 무리가 아마도 현장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꺼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일단 목이 턱 막히고, 칸나는 한 마디를 꺼내었다.


"...이거 엘프권 침해 아닌가?"

"그게... '어차피 반은 고구마니까 상관없지 않나' 하면서 시장님이 허가를 내리셔서요."

"시장님, 대체 무슨 짓을..."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이, 온갖 상상을 밟아 뭉개도록 변해버린 세상.

문득 그런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버린 칸나는 입에서 한숨이 몇 덩이인가 굴러떨어졌다.

그러다가 아직도 널널히 남아있는 휴가를 이제야 쓸 수 있겠다 가볍게 쓴웃음을 지으며,

한쪽에 사탕수수를 붙들듯 매달린 캬롯에게 잡아당겨지듯 고개를 기대었다.






- 필자 후기

부족하다. 뭔가 한참 부족하다.

덧붙여 칸구마 클론들은 공백 상태의 인격에 양육의 영향으로 캬롯을 개처럼 잘 따른다는 설정.

그 외에도 세계수의 쿼터 높이까지 자란 과성장 칸구마 클론이라던가,

'이번에도 실패잖아' 하면서 거의 칸나에 가까운 클론조차 폐기하는 다크한 전개라던가도 생각해본 바 있었음.

그런데, 포션으로 변이된 고구마가 갉아먹히면 진짜로 어떻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