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tsfiction/105197341


 [4]
 전쟁의 기억은 암세포처럼 살아있다. 인간은 쉽게 잊는다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숙주가 살아있는 한 무한하게 증식하는 암세포처럼, 전쟁의 기억은 변질되고 억압된 채로 인간의 기억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그녀에게서 과거의 기억을, 그 하룻밤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입은 옅은 향기 때문이리라.

 플로럴 계열의 향수를 조금 뿌린 듯했다. 이름모를 꽃향기가 익숙했다.

 “참, 아직 자기소개도 안 하고 있었네. 내 이름은 향설이라고 해. 한국식으로 지은 이름인데… 아, 한국이 어딘지 알아?”

“알다마다.”

 내가 거기서 왔으니까.

 이야기가 빨리 통해 잘 됐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그래? 싱가포르면 한국이랑 가까운가? 실은 우리 아버지도 한국 출신이라고 해서.”

 “내가 봤다던 소설도 한국 사람이 쓴 거야.”

 나는 아무래도 대화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졌다.

 한번 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자, 꽃향기는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에서 끊임없이 솟아나 내 코에 닿았다.

 향기는 햇살처럼 망각의 안개를 거두고 오랜 기억으로 향하는 길이 트였다.

 기억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놓인, 아주 오래도록 빨간불이었던 신호가, 이제 막 바뀌려는 참이었다.

 * * *

 내가 아직 작대기 약장을 붙이던 시절, 41대대 본부 수송중대에서 운전병 보직을 받은 나는 운이 좋게도 중대장의 당번병이 될 기회를 얻었다.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중대장실의 풍경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치스러운 장식품은 일절 없는 인테리어 속에, 중대장의 개성이 강하게 묻어나 있었다.

 ‘순간을 사랑하라’라고 적힌 엘프어 글귀가 액자에 꽂혀 문 위에 걸렸고, 다른 무엇보다 화분이 정말 많았다.

 창가에 놓인 네오레겔리아, 산세베리아, 페페로미아, 책장 옆에 놓인 스파티필럼, 고무나무, 겐차 야자, 몬스테라……

 그리고 프리지어. 그 식물들.
 
 가끔 중대장과 함께 바깥을 걸을 때면, 오염된 환경에서도 이름모를 꽃들은 질기게 피어났고, 중대장은 그 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짚어서 읊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군인답지 않은 사람…… 아니, 엘프였다.

 당시를 회상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기억이 있다.

 연대 본부 건물이 폭격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다.

 ─쿠구궁!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새벽에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은 막사를 포함한 영내 부지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강철과 살점 파편이 튀기고, 뜨거운 불길이 일고, 코가 맛이 가도록 지독한 화약 냄새가 온사방에 진동했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누군가는 정신을 다잡고 지휘를 해야 했다. 차량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긴급 소산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중대장은 마지막까지 지휘실에 남아 임무를 수행했다. 여러모로 군인 같지 않던 그녀였기에, 솔직히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군용 통신 장치 특유의 잡음이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영내에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한 번의 폭음과 함께 방송은 무섭도록 조용해졌다. 소산을 지휘하던 중대장실은, 폭격에 휘말려 반파된 건물 잔해에 깔려버렸다.

 …그때, 어찌된 영문이었을까.

 나는 중대장을 구하러 무너진 건물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하면 바로 도망칠 거라고 평소에 떠들었던 주제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한 조각 남은 충성심이었을까?

 터지는 폭탄 탓에 주위가 명멸했고, 귀는 이명이 울려서 점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 몸으로 벽돌과 시멘트 잔해를 치우고, 기절한 중대장을 찾아냈다.

 의식을 잃긴 했지만 몸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비스듬히 쓰러진 서류 보관함이 위에서 쏟아지는 잔해를 막아준 모양이었다.

 그녀의 팔을 내 어깨에 걸고 들쳐메다시피 하여 레토나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불바다가 된 막사를 뒤로 하고 위병소를 빠져나왔다.

 연기 먼지 때문에 눈이 따갑고, 늘 다니던 도로는 폭격으로 인해 움푹 파이거나 솟아올라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무작정 달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액셀을 밟아, 겨우 폭심지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지정된 포인트로 가는 도중이었다. 폭격의 여파인지, 차는 원인 모를 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졌고, 사방이 깜깜한 도로 한복판에 꼼짝없이 멈춰서버렸다.

 나는 운전대를 부여잡고 여전히 폭격을 받는 중인 본부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방금까지 저기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다가, 드디어 살았다는 실감이 오소소 들 무렵─

 “……여긴 어디지?”

 중대장이 깨어났다.

 그녀는 중증 알콜 중독 환자여서, 차량 글러브박스에 술을 쟁여두곤 했다.

 중대장은 보드카를 꺼냈다.

 “선물받은 거야, 난 별로 안 좋아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덧붙이면서.

 중대장은 스테인레스 컵에 보드카를 따라 두 잔을 내리 마시곤, 긁힌 상처에도 술을 뿌리더니, 내게도 한 잔을 권했다.

 컵을 받아든 나는 중대장과 똑같이 환부에 술을 뿌렸다. 쓰라려야 했을 텐데, 이상하게 감각이 없었다.

 컵을 돌려받은 중대장은 한 잔 가득 술을 따르더니 내게 다시 권했다.

 나는 운전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사양했으나, “어차피 운전도 못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재차 권했을 때 더이상 거절할 말을 찾지 못해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자 중대장은, 한 잔을 다시 따라 그걸 입에 머금었다. 그리곤 기어 너머로 몸을 기울여 내게 키스했다.

 세상에서 가장 쓰고 독한 맛이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키스였다….

 꿀꺽- 술을 삼키고 나서 나는 말했다.

 “중대장님, 저는 사실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

 내 말에 중대장은 “가족은 나도 있어” 하고 말했고, 그 다음 그녀는 뭐가 그렇게 우스웠는지 한바탕 웃더니 군복의 앞섬을 풀어헤쳤다.

 결국 나도 옷을 벗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운전석 쪽으로 힘겹게 넘어온 그녀가 내 위로 올라탔고, 나는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 머리를 끌어안았고, 나는 입술을 더듬어 그녀의 젖꼭지를 찾아 빨았다.

 악몽같았던 시간을 몸을 섞는 것으로, 정사의 흥분으로 덮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중대장은 격하게 몸을 움직였다.

 미명이 밝아올 때까지 어둠 속에서, 우리는 한 뭉치가 되어 꿈틀거렸다.


 서서히 해가 떠올랐다. 세상이 푸른 빛으로 잠기고, 도로 옆에 펼쳐진 산과 들 풍경은 이름 모를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동이 트기 전, 그녀는 무언가 바라는 듯한, 호소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 분명한 눈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은 채로, 다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묘한 대치는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세 번 울릴 때까지 이어졌다.

 아침해는 이내 완전히 떠올랐고, 언덕 아래 길에서 아군 차량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좌석에 앉아 옷을 벗는 것보단 입는 것이 더 곤욕이었다. 나나 그녀나 급하게 옷을 입느라 고생했었다.

 * * *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날 밤의 기억.

 폭격 사건 이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중대장은 명예전역을 신청했다.

 그녀는 중령 진급과 동시에 고향인 달로 돌아갔고, 나는 여전히 지구에 남아 근무했다.

 ‘시술’을 받기로 결정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세균 감염으로 눈과 팔이 다 날아갔다. 오른팔로 중대장을 받치고, 왼쪽 몸으로 파편을 받다 보니 그렇게 됐다.

 여자가 된 뒤로도 운전할 때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타는 차마다 좌석을 한참 앞으로 밀어야 하는 점만 빼면.


 “엘프들이 사는 곳에도 꽃이 핍니까?”

 언젠가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달에서는 어딜 가도 이 꽃이 피어. 달은 척박하니까, 꽃을 들여오면서 어디서든 자랄 수 있도록 개조했는데, 너무 번성해서 잡초 같은 취급을 받았지. 하지만 나는 이 꽃이 맘에 들었다네. 왠지 모르게. 억세고 꿋꿋한 것이 자네 같은 단이종을 보는 것 같아.”

 중대장실에 놓인 화분 중에서도, 그 꽃 하나만큼은 각별히 다루어졌다.

 지구에서 달로 갔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온 꽃.

 중대장이 달에서 손수 가져온 꽃.

 프리지어.

 “게다가 향도 좋지 않나? 맡아봐”라고 그녀는 말했다.


 병사 시절 그 당시 내 별명은 탐폰이었다. 풀네임은 중대장 전용 탐폰.

 중대장이 실망을 하고 난 다음이면 선임 동기 할 것 없이 내게 와서 “너가 피싸는 것 좀 막아봐,” 하고 한 마디씩 던지고 가곤 했다.

 그러나 내게 다른 의도는 없었다.

 단지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알았기에 그랬을 뿐이다.

 다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맹세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 나쁜 짓일세.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물며 일반적인 친구 사이에서도 그럴진데, 상급자와 하급자 관계라면 문제가 더욱 커지겠지. 그렇지 않나?”

 “네. 맞습니다.”

 내가 답하자 중대장은 부러 한 톤 높은 목소리와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둘만 있을 땐 다나까도 복명복청도 안 해도 된다니까? 농담 같은 게 아니래도?”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거절했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떻게든 얼버무려 넘겼던 것은 기억난다.

 내가 여자가 된 뒤로도, 중대장과 나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가끔 산책을 나가거나 하는 동안, 그녀는 눈에 보이는 꽃의 이름들을 물 흐르듯 읊어내곤 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의 구애였을지도 모른다.

 언제였던가, 내가 그녀 앞에서 ‘식물 이름을 잘 아는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기에.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5]
 이름 모를 꽃의 향기, 거기서 이어진 중대장과의 하룻밤의 기억은 다시금 그녀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다.

 그녀는 부대 안 분위기에 영 섞이지 못 하고 겉돌았으며, 직급이 소령인데 반해 중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출신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사고를 쳐서 진급이 막혔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았다. 일종의 썩은 동앗줄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그런 썩은 동앗줄을 나는 힘껏 붙잡았다. 군에 아무런 연줄이 없던 나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중대장은 외로운 사람, 아니, 엘프였다.

 수송중대에서는 정비반의 힘이 무척 강해서 그곳의 간부들이 따돌림을 주도했다.

 중대장이라는 직책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중대 내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나만이 그녀 옆에 붙어서 매일같이 커피를 타거나, 병사들 사이에 도는 소문과 그 진위여부를 알려주거나, 부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려주곤 했다.

 내 별명이 탐폰이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중대장이 속된 말로 피를 싸는 모습도, 내가 있을 땐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별명과는 다르게, 내가 중대장과 아주 격의없는 사이로 지낸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취미나 관심사가 잘 맞는 것도 아니었고,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것도 폭격 직후에 단 한번뿐이었다.

 “자네는 정말이지 고집불통이군. 지구인들은 죄다 이 모양인가?”

 그러니 그녀가 내게 보인 관심은 지휘관이 일개 병사에게 보이기엔 과분한 것이었다.

 * * *

 폭격 이후, 날씨가 화창한 10월 초 어느날이었다.

 41대대는 인접 부대와 연계해 부상병의 후송작전을 맡게 되었고, 임시 진지가 꾸려졌다.

 자연히 잡역의 소요가 늘어서, 인근 민가에서 주민들을, 특히 아낙네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빨래와 밥짓기를 시켰다.

 날은 계절이 무색하게 훅훅 쪘고,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 민간인들은 묵묵히 일했다. 매미도 울지 않아 아주 조용한 시간이었다.

 “군수품 도둑이다!”

 라고, 누군가 째진 목소리로 외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민간인 아이가 빨래하던 군복을 훔치려다가 걸려서, 그 아이는 열 명 가까이 되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반쯤 죽도록 매를 맞았다.

 다들 넋 놓고 구경만 하던 것을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중대장의 명령으로 겨우 뜯어말릴 수 있었다.

 아이는 절뚝이며 도망쳤고, 나는 그런 아이를 몰래 뒤쫓았다.

 병사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네들은 중대장 앞에서는 명령을 들을지 몰라도, 뒤에선 다른 꿍꿍이를 지니고 있었다.

 병사들은 아이를 아주 죽일 계획이었다. ‘즉결처분’이라는 흉흉한 말을 운운하며.
 
 간부들이 은근히 등을 떠밀었다. 그런 식으로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써 권위에 도전해, 자기네들의 결속을 단단히 하려는 셈이었다.

 지독한 일이었다.

 다행히 아이의 짧은 보폭으로는 나를 뿌리치 못했다. 아이는 나를 보고 몹시 겁에 질렸고, 그런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최대한 상냥한 어투로 “이쪽 길목으로 갔다간 매복이 있으니 이 앞으로 빙 돌아서 가라,” 하고 말하며 조막만한 손에 조금이나마 먹을 것을 쥐여주었다.


 중대장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는 걸 동기의 입을 통해 뒤늦게 알았다.

 “적당히 해라. 주임원사님 고양이 싫어하시는 거 몰라서 이러냐?”

 창고에 숨어든 새끼 딸린 고양이에게 정이 붙어서, 몰래 밥을 챙겨주던 것을 동료 병사에게 들켰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기였기에 큰 걱정은 없었지만, 뒤에 이어진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몸이 계집애가 됐다고 진짜 계집처럼 굴고 있어… 그래, 차라리 고양이면 어디냐? 너 저번에는 사람도 하나 살려보냈잖아.”

 그게 무슨 말인가를 묻자, 동기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때 중대장이 다 봤었어.”

 다 봤다는 것은, 내가 아이를 다른 길로 돌리고 먹을 것을 쥐여준 일. 아마 부하들의 수작을 눈치챈 중대장 또한 뒤를 밟아오던 것이리라.

 “뭐라고 안 했어?”

 내가 묻자, 동기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줄 착각했는지 “나야 보고할 사람이 옆에 있는데, 중댐이 두 눈 뜨고 보고 있는데 굳이 입 아프게 말한 건 또 뭐냐”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기는 자기 일을 하러 창고를 나갔다.

 ……이 작은 일화에서, 내가 특별히 착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집 아이도 그만한 나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딸아이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내가 운 좋게 당번병 자리를 꿰찼던 것은, 원래 당번병이 중대장의 귀중품을 훔치고 달로 나를 계획을 세운 게 들통나서였다.

 다음 당번병을 뽑을 때, 그 조건으로는,

 첫째, 운전을 잘할 것이며.

 둘째, 엘프가 아닐 것.

 셋째, 부양할 가족이 없을 것이 붙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셋째, 부양할 가족이 없다고 한 것이다.

 편한 일을 맡으려는 속셈도 물론 있었지만,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한 가지 있었다.

 군대에서 나온 봉급은 당장 쓸 용돈 정도를 제하면 모두 달에 있는 집으로 부쳤다.

 그렇지만 달의 물가는 이주민이 감당하기에 벅찼고, 군인의 봉급은 생활비로 쓰기에 넉넉치 않았으리라.

 아내는 고객을 받아 생활비를 벌었고, 가끔씩 고객을 집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알콜이 바람에 흩어지듯이 기억에서 잊었다.

 그렇기에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그저 알게 되었다.

 다만, 아내가 밉지는 않다.

 나에게는 딸이 있고, 딸에게는 어머니가 있고, 딸의 어머니가 바로 나의 아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는 내 딸을 낳아준 가족인 것이다…….

 [6]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엄마가 그랬거든. 만약에 아빠를 찾으면 잘 해주라고. 아빠는 자기 삶의 은인이니까, 아빠가 없었으면 나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라고 하더라고. 그거야 뭐, 당연한 말이긴 해도.”

 그녀의 그 말과 함께 대합실에는 정확한 발음의 엘프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아, 엘리베이터가 왔나 보네.”

 그녀는 짐을 챙기고 떠날 채비를 했다.

 “이만 가볼게. 지갑 일, 진짜 고마웠어!”

 「언더 더 스타라이트」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그녀가 읽던 책의 제목을 떠올렸다.

 내가 읽었던, 기억나지 않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려 애썼다.

 떠오르는 제목과 떠오르지 않는 제목은 계속 내 뇌리에 남아, 피부에 박힌 보이지 않는 가시처럼 나를 괴롭혔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에게는 가족이 있다.

 다른 어느 것보다 소중한 가족이.

 그러나 가족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그렇다면─

 이제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로켓을 보거나, 아니면 영영 보지 않는 것이었다.

 누군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중대장실에 걸려 있던,「순간을 사랑하라」라는 엘프어 글귀가 떠올랐다.

 이제는 흐릿한 그 얼굴이, 어디선가 떠올라 나를 향해 웃는 것 같았다.

 찬란하게 피어난 꽃처럼.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결국 나는 선택해야만 했고.

 “급한데 잡아서 미안한데.”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뒤돌아보는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아버지 사진, 나한테 혹시 보여줄 수 있겠나?”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