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룡이시여!"

저거, 나다.
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초대 황제와 함께 싸웠던 용이라고 해서 시조룡이다.
덕분에 새롭게 시작된 내 두번째 인생... 아니 용생이 더럽게 꼬이긴 했는데, 율법을 어기고 인간사에 개입했다는 죄목으로 용의 형태를 박탈당하고 천 년간 봉인되는 형벌을 받은 까닭이다.

아니, 천하통일 좀 했다고 천 년이나 갇혀 있으라는 게 말이나 돼? 따지고 보면 대륙의 혼란기를 끝내버린 거니 칭찬받아야 할 일 아니야?
애초에 전략 게임 속에 들어왔는데 천하통일을 어떻게 참냐고. 난 그래도 원작 존중해서 양심적으로 내가 군주가 되진 않았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를 통일군주로 만들었을 뿐이지.

거기다가 나는 수백 년만에 태어난 새끼 용으로 모든 용들의 사랑을 받는 입장이었다.
로드의 레어 주변 숲을 화끈하게 태워버렸을 때도 '애가 그럴 수 있지'라는 비호를 직접 들은, 어린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의 당사자. 말하자면, 촉법-드래곤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도 장로들은 어김없이 처벌을 강행했다.
하여간 깐깐한 노친네들. 빨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고 싶어도 앞으로 수천 년은 더 살아갈 테니 허무해서라도 손이 안 간다. 그냥 다른 용들한테 뒷담이나 엄청 까였으면 좋겠다. 로드한테 정강이도 좀 까이고.

어쨌든, 그 처벌도 이제 절반 정도는 끝이다.
내 친우인 초대 황제...는 아니고 그 후손이 당도하여 봉인을 깨버렸기 때문. 용의 육신을 잃고 인간화한 거야 여전히 그대로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겐 인간의 육신이 훨씬 더 익숙한데.

'드디어 끝났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오른다.
어떻게 천 년이나 갇혀 있느냐며 질질 짜던 나와, 그런 내 손을 꼭 붙잡고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맹세하던 친우의 모습이.
그 봉인이라는 게 그냥 한숨 푹 자고 일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줄 알았다면 꼴사납게 울고 자빠지진 않았을 텐데. 한참 늦은 후회와 수치심이 몰려와 몸을 떨었다.

'300년이나 걸렸지만 뭐....'

그게 인간의 한계 아니겠나.
오히려 초대 황제의 유지가 잊혀지지 않고 달성되었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하리라.

"해방시켜주어 고맙구나. 원하는 바가 있느냐?"

한쪽 무릎을 꿇은, 친우의 어릴 적 모습을 똑 닮은 소년에게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구해지는 주제에 거들먹거리는 건 용의 본성 탓이요, 말투가 저런 것은 제발 품위라도 지키라는 주변 용들의 교정 탓이다. 어느 쪽이건 내 잘못이 아니니 나를 탓하지 말았으면 한다.

"저는...."
"단."

소년의 말을 잽싸게 가로챘다.

"아쉽게도 내가 가진 것이 실로 적다. 따로 재물을 모아두지는 않았거니와 강대한 용의 육신마저 잃었으니. 이는 네 선조인 페리스를 도운 결과이니 후손인 너 또한 감내해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게 있는지 들어는 주겠다. 하지만 줄 건 없다.
내가 생각해도 참 치사한 말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진짜로 줄 게 없는데.

나의 재산이라 할 것은 내가 봉인되었던 이 침실과 내가 걸친 잠옷 정도다.
그 외에는 용의 형태를 박탈당했음에도 본질과 닿아있어 걷어내지 못한 용의 뿔, 눈, 심장 정도인데... 이거 주려면 내 몸을 해체해야 하잖아? 세상에 선조의 친우이자 건국의 은인쯤 되는 존재에게 그런 배은망덕한 요구를 하진 않겠지?
달라고 해도 절대 줄 생각 없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

"...괜찮습니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허나 소년의 말은 사양의 의미가 아니었다.

"제가 원하는 건 시조룡 당신 뿐입니다."
"...?"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내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나 지금 고백 받은 거야? 아니면 모름지기 최고급 소재로 취급될 내 뿔을 기어코 잘라가겠다는 선언인가? 어느 쪽이건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인데!
내 표정을 확인한 소년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 표현을 잘못했군요."

그치? 나 니 선조랑 친구야. 위대하신 초대 황제의 친우라고.
수백 살 차이나는데 고백 박아볼 연애 대상으로 보는 건 말도 안 되고, 살아있는 소재로 취급하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지. 니가 할 건 그냥 날 화려한 제국 궁성으로 모셔가서 사치스러운 삶을 살게 해주는 거란 말이야.

"결혼해주십시오."

아, 이런.

페리스 이 망할 자식아, 니 후손을 용박이로 키우면 어떡하니.
물론 300년 후의 후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건 너무 가혹하다는 걸 알지만 어쨌든 니 씨앗에서 나온 거잖아.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걸.

나는 멍청이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내 모습은 머리에 뿔 달린 매력적인 은발의 소녀임을 모르지 않는다. 허나 그게 시조룡이라 불리는 300년 전 조상의 친우라면, 심지어 따지고 봤을 때 종족조차 다르다면! 결혼 같은 소리는 해선 안 되는 게 아닐까?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이 세상에선 이종교배가 정상이고 상식인 건가? 아니면 설마 -할-이?!

...그만두자. 상상만으로 속이 안 좋아졌다.

"이런, 죄송합니다. 또 오해하시게 만들었군요."

그치? 오해지?
내가 뭘 오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해가 맞지?
이제 납득 가능한 타당하기 그지없는 설명으로 오해한 부분을 풀어주고, 적당히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요구를 한 번 씨부린 뒤에, 어쨌든 초대 황제의 친우랍시고 호화로운 삶을 누리게 해주는 거 맞지?

"제 형님과 결혼해주십시오. 이게 제가 바라는 보상입니다."
"뭣."

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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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써봤는데... 어... 프롤로그로 흥미를 끌 법 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