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카페 데이지입니다~"

큰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골목의 어느 카페. 일류 바리스타를 꿈꾸는 시아는 들뜬 마음으로 오늘의 첫 번째 손님을 맞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열댓살 쯤 되어 보이는 틋녀였다. 검은 버버리를 입고 옆구리에는 영어로 된 서적을 끼고 있는 것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틋녀는 시크하게 말했다.

그러나 무덤덤한 틋녀와는 달리 시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틋녀가 주문한 것이 다름아닌 '에스프레소'였기 때문이다.

애스프레소란 무엇인가. 에스프레소, 다른 말로는 쇼트 블랙. 곱게 간 원두에서 고온 고압의 물로 추출한 아주 진한 원액 커피. 본고장인 이탈리아나 유럽 쪽에서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커피이지만 한국에서는 웬만한 커피 덕후들 빼고는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에스프레소는 양도 작고 쓰기 때문에 카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아메리카노나 라떼 계열 커피들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또한 에스프레소는 바리스타의 자존심이 걸린 커피이기도 하다. 커피 본연의 맛을 잘 느낄 수 있는 에스프레소이기에 커피를 내릴 때 쓰이는 원두의 종류나 배합 비율 등에 바리스타만의 독보적인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런 커피를 많이 쳐줘야 청소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주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의문에 찬 시아는 일단 되물었다.

"혹시.. 아메리카노 말고 진짜 에스프레소 맞으신가요?"

"네. 맞게 들으셨어요.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틋녀는 그런 말을 많이 들어본 듯이 조금의 당황하는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무심히 말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완성되면 불러 드릴게요!"

시아는 단단히 기합이 들어간 듯 말했다.

틋녀가 조명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책을 펴는 걸 본 뒤, 시아는 비장한 얼굴로 원두를 고르러 창고로 향했다.

자메이카, 케냐, 에티오피아... 다양한 나라의 이름들이 쓰인 포스트잇들이 시아를 반긴다.

이제 이 많은 원두들 중에서 딱 7g의 원두를 골라 배합하면 된다.

시아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잊혀진 줄 알았던 유명 바리스타 스슨니와의 추억이 떠오른다.

"스승님, 이건 무슨 원두로 만든 건가요?"

"아, 그거? '아라비카'라고 하는 품종인데 케냐에서 난 거야. 그게 마음에 드니?"

"네! 저는 나중에 카페를 차리면 꼭 이걸로 커피를 내릴 거에요! 그리고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구.. 대회도 나가구..."

"허허... 우리 시아는 꿈이 아주 크구나. 나도 너를 응원한단다."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스승님과의 추억이 시아에게 뭔가를 말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아도 그걸 깨달은 듯 케냐 아라비카 원두 통을 열고 좋은 콩들만 선별해 7g을 채웠다.

심혈을 기울여 원두를 곱게 갈아 약 9bar정도의 열수로 추출하니 정말 향 좋고 먹음직스러운 에스프레소가 완성되었다.

"주문하신 에스프레소 드리겠습니다!"

무려 오 분의 고민 끝에 만들어낸 에스프레소는 시아의 분신이라 해도 될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책을 읽던 틋녀는 기대로 가득 찬 얼굴로 에스프레소를 받아들고 자리로 갔다.

틋녀의 반응이 궁금했던 시아는 곁눈질로 틋녀의 자리 쪽을 쳐다보았다.

틋녀가 입에 커피잔을 댄다.

얼마 안 되는 양의 커피가 틋녀의 입 속으로 들어가 혀끝에서 맴돈다.

몇 초간 커피를 음미한 틋녀는 씁쓸한 듯 살짝 찡그리며 목구멍으로 커피를 넘긴다.

다시 몇 초간 입을 다물고 있던 틋녀는 별안간 입을 연다.

"써..."

틋녀는 자리에 비치된 설탕 봉지를 뜯어 에스프레소 안으로 모조리 쏟아붓고 믹스 커피를 젓듯 젓는다.

'그래... 에스프레소애 설탕을 넣어 먹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옛날에 자주 보던 만화의 등장인물도 커피에 각설탕을 잔뜩 집어넣어 먹곤 했었다.

물론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는 것은 시아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설탕을 넣고 말고는 마시는 사람 마음인 걸 어떡하랴.

틋녀가 다시 잔에 입을 댄다.

"아직도 써..."

틋녀는 두 봉지째 설탕을 뜯어 에스프레소에 냅다 부었다.

뭔가 속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시아가 틋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

"손님, 혹시 젓는 스틱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이 봉지로 저으면 돼요."

나름 자기만의 배려의 말을 건네며 틋녀는 다시 입에 잔을 가져다 댄다.

"아.. 써..."

세 봉지째. 하루 당 권장량을 다 채운 것 같다.

네 봉지 째. 이제 설탕이 잘 녹지도 않는다.

다섯 봉지 째. 차라리 달고나 라떼가 덜 달것 같다.

마침내 틋녀는 설탕을 넣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별안간 마지막 비수를 시아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아.. 너무 달아... 여기 정수기 물 조금만 주실 수 있어요?"

소주가 땡기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