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룡이시여!"


저거, 나다.
대륙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와 함께 싸웠던 용이라고 해서 시조룡이다. 아예 자랑스럽지 않냐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미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호칭이기도 하다. 덕분에 내 두번째 인생... 아니, 용생이 더럽게 꼬였으니까.


용이란, 고고한 세상의 왕자들.
그 날갯짓마저 너무나 강렬하기에 함부로 비상하지 않고, 그 위엄이 너무나 거대하기에 모습조차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용들은 스스로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기로 엄숙히 맹약을 맺어 이를 어기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허나 나는 맹약을 어겼다.
초대 황제의 친우로서 대륙 통일에 깊이 관여했으므로.


아니, 근데 솔직히. 전략 게임에 들어왔는데 천하 통일을 어떻게 참습니까? 예?


나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내가 신세력을 만들어서 깽판치지는 않았다. 로어 프렌들리하게 플레이어블 군주 캐릭터를 좀 팍팍 밀어줬을 뿐이다. 그것도 짱짱센 용의 힘은 쓰지도 않고!
물론 막판에 게임 터질 각이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긴 했다. 근데 그거 딱 한 번 뿐이다. 심지어 너무나 조마조마한 나머지 정줄 놓고 무심코 질러버린 거고.
말하자면 심신미약 상태였다, 이거지. 그러니까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냐?


...안 봐주더라.


장로들은 어김없이 내게 유죄를 선언했다.
하여간 깐깐한 노친네들.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고 싶은데 족히 천 년은 거뜬히 넘길 게 뻔한 양반들이라 보람이 없어서 못 하겠더라. 귀염둥이 새끼 용을 처벌했다고 다른 용들한테 씹히고 로드한테 정강이나 좀 까였으면 좋겠다.


어쨌든, 내가 받게 된 형벌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용의 형태를 박탈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 년 동안 봉인당하는 것.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땐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나잇값도 못하고 내 친우 겸 초대 황제인 녀석의 방으로 가출해서 질질 짰다. 어떻게 천 년이나 갇혀있느냐면서 아주 목이 쉴 정도로 펑펑 울어재꼈더랬다. 
봉인이라는 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줄 알았다면 그런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이번 생 최대의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한심하게 울고 자빠져 있던 내 손을 꼭 붙잡고 내 친우, 페리스는 약속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대륙을 통일한 황제씩이나 되었음에도 아직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몸짓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내게 약속해왔다.


그 오랜 약속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300년인가....'


짧은 시간은 아니다. 페리스 본인이 아니라 그 후손이 오기도 했고.
허나 그게 인간의 한계 아니겠나. 용들이 작정하고 숨긴 곳을 찾는 일도 분명 쉽지 않았겠거니와, 3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초대 황제의 유지가 이어져내려와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높게 쳐줘야 할 일이다.


내가 부름에 응하기를 기다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인 외견도 그렇지만 특히 긴장하며 굳어진 입매가 내 친우와 똑 닮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해방해주어 고맙구나. 혹여 바라는 게 있느냐?"


우선, 변명부터 하겠다.
구해진 주제에 거들먹거리며 낮춰 보는 태도는 오만한 용의 본성 탓이요, 말투가 저런 것은 인간과 어울릴 거면 제발 품위라도 갖추라는 다른 용들의 갈굼 및 교정 탓이다. 아무튼 그렇다.
무언가 생각한 바가 있는지 소년의 입술이 지체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는...."
"단."


본격적으로 소년이 요구사항을 늘어놓기 전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내가 가진 것이 실로 적다. 나는 따로 재물을 모아두지도 않았거니와 강대한 용의 육신마저 잃고 영락하였으니. 이는 페리스를 도운 결과인 즉, 후손인 너 또한 감내해야 마땅하리라."


원하는 거? 말만 해. 다 들어줄게. 아 듣기만 한다고.
내가 생각해도 정말 치사하고 아니꼽지만 뭐 어쩌겠는가. 진짜로 줄 게 없는데.


지금 내 재산이라면 내가 봉인되었던 이 침실과 내가 걸친 옷 정도다.
그 외에 가치있을 법한 건 용의 본질에 닿아있어 박탈당하지 않은 뿔, 눈, 심장 정도인데... 이거 주려면 내 몸을 해체해야 하잖아? 지 선조의 친우이자 국가의 은인쯤 되는 존재에게 그런 배은망덕한 요구를 하진 않겠지?
달라고 해도 줄 생각 없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


"...괜찮습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소년은 그리 말했다.
나는 내심 안도했으나, 그건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소년의 말은 사양의 의미가 아니었으므로.


"제가 원하는 건 시조룡, 오직 당신 뿐입니다."
"......?"


고개가 살포시 옆으로 기울어졌다가, 이내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니 설마 지금 고백당한 거야? 아니면 모름지기 최고급 소재로 분류될 게 분명한 용의 부산물을 반드시 획득하고야 말겠다는 선언인가? 어느 쪽이건 끔찍한 건 매한가지인데!
내 표정을 확인한 소년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 이런 말을 잘못했군요."


그치? 나 니 선조랑 친구다? 위대하신 초대 황제님과 친구라니까?
족히 수백 살은 차이가 나고 종족도 다른데 연애 대상 혹은 살아 움직이는 레어템 주머니로 취급하는 건 진짜 말도 안 된다. 툭 하면 전쟁이 벌어져 개판이 나던 세상에서도 그 정도의 윤리관은 잡혀있었다, 이말이야.
니가 할 일은 화려하고 안락한 황궁으로 날 모셔가서 건국의 은혜를 갚는다며 온갖 풍요와 사치를 누리게 해주는 거란 말이야. 체면치례나 하자고 꺼낸 말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니지? 나 안심해도 되는 거지?


"결혼해주십시오."


오우.


야, 페리스 이 망할 자식아. 네 후손을 용박이로 키우면 어떡하냐.
물론 300년이나 흐른 뒤의 후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저거 니 씨앗에서 나온 녀석이잖냐.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순 없을걸?


정신이 대략 멍해지는 상황에 이마를 짚었다.
뜨끈뜨끈한 이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맹렬히 돌아가며 어떻게든 상식적인 답을 찾으려는 두뇌의 활동을 방증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년의 요구에 대한 수용 가능한 해석을 찾아내는 데에 실패했다.


나는 멍청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내 모습이 뿔 달린 점만 빼면 인간과 아주 유사하며, 그 중에서도 모두가 경탄한 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은발의 소녀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게 존경받는 300년 전 선조의 친우라면, 하물며 나이 차도 크고 종족조차 다르다면! 결혼 같은 소리는 꺼내선 안 되는 게 아닐까?
혹여 내가 봉인되었던 사이 세상의 상식이 변했단 말인가? 이종 교배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만큼? 아니면 설마 -할-이?!


...그만두자. 상상하니 속이 안 좋아졌다.


"음, 죄송합니다. 긴장해서 그런지 말이 헛나와서...자꾸 오해를 사게 되는군요."


그치? 오해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오해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해 맞지?
이제 내가 납득 가능한 타당하기 그지없는 설명으로 날 안심시켜 준 뒤에, 뭣도 없는 나도 어렵잖게 할 수 있을 법한 쉬운 요구나 한 번 씨부리고는, 곱게 황궁으로 모셔간 뒤에 해피 럭셔리 라이프를 보내게 해주는 거지?
난 페리스 후손 믿어! 페리스의 씨앗 믿어!!


"제 형님과 결혼해주십시오. 이게 제가 바라는 보상입니다."
"뭣."


눈앞이 깜깜해졌다.
페리스 임마, 니 씨앗 불량품이야. 농사 망해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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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고쳐봤는데... 프롤로그에서 좀 더 멀어진 느낌이네요! 큰일났다!

곧이어 1편 느낌에서 좀 더 멀어진 1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