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많은 이들이 영원한 삶을 원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아마 불로불사의 영약을 찾아 나선 진시황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 외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티토노스의 이야기, 혹은 몇몇 종교에서 주장하는 죽음 이후의 영생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무한한 삶을 열망해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생, 혹은 영원에 대해서 말해보기 전에, 우리는 우선 죽음에 대해 정의해야만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생물은 죽는다. 현대에 와서는 모든 세포의 기능이 멈추거나, 뇌세포가 사망하거나, 몸이 영영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를 그 기준점으로 삼지만, 이는 언젠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심정지가 죽음의 기준이었지만, 심폐소생술이나 제세동 기술이 발달하면서 심장이 멈춰도 무조건 죽었다고 속단할 수 없게 된 것처럼.

 

하지만, 기계와 같은 무기물에는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워진다. 기계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수리할 수 있고, 동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교체하면 그만이다. 주기적으로 부품을 갈아주고 관리만 제대로 하면 거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어떻게 보면 영원에 가장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 신체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여 팔, 다리, 장기, 그리고 마침내 뇌를 포함한 몸 전체를 기계장치로 바꿀 수 있게 되는 날에는, 주기적인 정비를 통해 어쩌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테세우스의 배 이론처럼, 우리 몸을 기계장치로 대체하는 순간부터, 이미 진짜 우리는 죽었고, 기계가 된 우리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생각하는 영생은, 무한히 자기 자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다른 성별을 가진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 반쪽짜리 자신을 세상에 남기는 것으로서 불완전하게나마 영생을 실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필자가 말하는 ’자기 자신‘이란 스스로가 스스로임을 명확히 자각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나를 나라고 자각할 수 있는 상태를 전부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설령 통 속의 뇌이거나, 자신을 그리 생각하는 인공지능이라고 할지라도.

 

생물을 복제하려는 시도는 이미 돌리나 메간, 모락의 사례처럼 빈번하게 이루어져 왔다. 현재도 원본과 유전 정보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복제 생물을 만들어낼 수 있고, 인간 역시도 예외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확실한 정보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자는 성체일 때 유전자를 복제하면 텔로미어가 마모된 채 복제되기에, 그만큼 세포가 노화된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생아 시절에 유전자를 복제해서, 보관해둘 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기반으로 태어난 복제인간은 본래 수명만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가정해볼 수 있겠다. 

 

이 가정을 바탕으로, 필자는 학창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A라는 사람의 유전자를 신생아 시절에 복제해, 보관한 다음, 그가 중년에 접어들 무렵에 미리 복제해둔 유전자로 그의 새로운 복제를 탄생시킨다. 이 복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생아 시절의 유전자를 뽑아 보관한다. 그렇게 태어난 복제는 A의 보살핌 아래서 자라다가, 똑같은 시기가 되면 복제해둔 자신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복사본을 탄생시킨다. 복사본의 복사본이 늙으면, 또 새로운 복사본을 탄생시킨다. 그렇게 하면, 문자 그대로 유전 정보인 자신은 영원히 살아간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대로, 만약 우리가 정말 유전자를 후대로 이어가기 위한 도구라면, 영원히 그 책무를 다하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의식이 어디서 만들어지는지, 의식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으니, 의식과 기억이 온전히 이어지지 않는 한, 통상적인 개념의 영생이라고 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의식과 기억을 기계장치에 저장하는 것이다. 마인드 업로딩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아직 개발 중이지만, 먼 훗날에는 정말로 우리의 의식을 칩 형태로 변환하여 저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했던 복제는 육체의 보존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이쪽은 의식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저장한 의식을 무수히 복제하여, 인간형 안드로이드에 집어넣어 양산한다고 해보자. 쓰던 몸이 파손되면, 그대로 칩만 회수하거나, 아니면 새로 업로드된 정보를 다시 내려받은 칩을 새로운 몸에 삽입해 의식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생이라는 단어 자체가 영원한 삶을 의미하고 있으니, 그런 상태라면 애초에 살아있지 않으니 영생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방식이야 어찌 되었건, 정말로 먼 훗날에는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이는 저주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삶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새로운 경험과 참신한 것들에서 오는 즐거움은 점점 줄어간다. 점점 색채가 바래는 그림처럼, 우리의 정신도 밋밋한 무채색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영생을 누리게 되었을 무렵에는 다시 예전처럼 한정된, 죽음이 있는 삶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