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서류의 산에 둘러싸인 채 한숨을 푹 쉬는 내 앞에서, 비서 오퍼레이터 로렌티나는 짗궂게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그럴 때는 좋은 방법이 있죠. 박사님, 제 부탁 세 개만 들어주실래요?"


태연자약한 그녀의 말에, 가슴 속에서 불현듯 짜증이 고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 상어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오늘 하루종일 비서로서 같이 고생해 준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고.


"뭔데?"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되묻자, 로렌티나는 내 책상에서 서류 한 장을 집어들었다.

저거, 중요한 서류 아니었나.

림 빌리턴에서 온 오리지늄 방제 작업 관련 협력 요청이었지, 아마.

하지만 그 함의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그녀의 손 안에서 팔랑거리는 서류의 모습은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상어가 괴상망측한 요구를 했다.


"첫 번째. 이 서류 보이시죠? 이걸 반으로 찢어 보시겠어요?

"내?"

"찢어 보시라구요. 쭉."

"...로렌티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괜찮아요. 그냥 종잇조각일 뿐이잖아요. 또 인쇄하면 돼요."


마음 한구석에서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

로렌티나가 생각 없이 이런 요구를 할 사람도 아니고.

그녀의 말대로...저건 그냥 종이에 불과하니까.

내용을 숙지하고 서명하면 끝인, 언제든 다시 인쇄할 수 있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 들고, 조심스레 찢기 시작했다.

부욱, 가벼운 파열음이 손 안에서 메아리치고.

상어가 웃었다.


"네. 잘하셨어요."

"......"

"기분은 좀 어떠세요?"


기분이 어떠냐고?

혼란스럽다.

영문을 모르겠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듯 가슴 저편에서 불안감이 엄습한다.

켈시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간 내게 어떤 철권제재를 내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시원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어."


그 혼란 속에 미묘한 후련함이 섞여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서류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순간, 손 안에서 저릿한 해방감이 피어나 온 몸으로 퍼지고.

아주 약간이지만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런 하잘것없는 종잇조각 때문에 가슴 속에 스트레스를 쌓고 있던 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길 정도로.

내 대답에, 로렌티나가 웃었다.


"그거예요, 박사님. 박사님은 때때로 생각이 너무 많으세요. 가끔은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좀 단순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답니다."

"...고마워, 로렌티나."

"별말씀을요. 그럼 바로 두 번째 부탁이에요."


"지금의 그 후련함을 담아서 활짝 웃어 보시겠어요?"

"...응?"

"표현하지 않으면 감정은 금방 휘발되고 만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한 순간, 그 기억은 오래도록 가슴 속에 남아요."

"..."

"저는 박사님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오랫동안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언제고 힘들 때 지금을 돌아보면서 아, 때때로는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도 있구나 하는 걸 되새기실 수 있게요."

"...로렌티나."

"자, 어서요. 스마일. 입꼬리를 올리고, 눈에 힘을 주시면 돼요. 어렵지 않답니다."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시범을 보이듯 활짝 웃어 보이는 로렌티나.

이건 틀림없이 로렌티나 나름의 격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이 더없이 고마우면서도.

서류를 찢었을 때부터 조금씩 무너져 가던 내 마음 속의 부담감에, 크게 금이 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런 나를 보며, 로렌티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바로 그거예요, 박사님. 오랜만에 보는 근사한 미소네요."

"네 덕분이야."

"그러시다니 기뻐요. 마음은 좀 후련해지셨나요?"

"...응. 정말 고마워, 로렌티나."

"에헤. 별말씀을요. 그럼 마지막 세 번째 부탁, 바로 말씀드릴게요."


쑥스럽다는 듯 뺨을 긁은 그녀는, 사무실 구석에 있는 내 침대에 걸터앉더니.




"이리 오세요, 박사님."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당황도 잠시, 인간관계에 닳고 닳은 내 사고회로는 즉시 그 동작의 의미를 이해했다.


"...로렌티나, 난 아직 쉬면 안 돼. 일이 이렇게나 밀려 있잖아."

"에헤, 또 그러신다. 잠깐 눈 좀 붙인다고 서류가 도망가진 않잖아요."

"아냐. 일은 하루빨리 처리해야 감염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할...."

"그러다 당신이 과로로 몸져눕기라도 하면, 더 많은 감염자들이 죽어날 텐데요?"


정론이었다.

조금이라도 쉬어 가며 일을 해야 일의 효율성이 올라간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서 아우성치는 책임감이 계속해서 핑계를 쏟아내고.

휴식을 갈망하는 내 몸을 어떻게든 책상 앞에 붙들어매려 했다.


"괜찮아요, 박사님."


고뇌하는 나를, 로렌티나의 목소리가 상냥하게 이끈다.


"박사님이 지니신 사명감. 감염자들에 대한 연민. 로도스를 아끼는 마음. 전부 잘 알고 있답니다."


폭풍 속의 등대처럼, 파도에 치여 이리저리 떠밀리는 내 팔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하지만 박사님도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박사님이 이 세상을 아끼는 만큼이나, 이 세상에도 박사님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요."


강인한 꼬리로 수면을 가르며, 힘차게 헤엄쳐 간다.

분노한 바다조차 감히 범하지 못하는, 평온한 해변으로.


"저도 그래요. 가끔은 박사님이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푹 쉬시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랍니다."

"...로렌티나."


이윽고 내 두 다리가 땅을 디디고.


"제 어리광, 받아 주시겠어요?"


나를 구해낸 그녀가, 내 뺨을 쓰다듬으며 따스하게 웃는다.

그 미소 자체만으로, 어쩐지 구원받은 듯한 안도감이 마음을 휘감아서.

나도 모르게 몸이 의자를 떠나, 날아가듯 그녀의 품을 향한다.




"감사해요, 박사님."


가녀린 두 팔이 내 등을 감싸,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고.

살짝 촉촉함이 묻어나는 새콤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물결치는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가, 나를 보며 눈웃음친다.


"제 부탁을 전부 들어 주셨으니, 저도 보답을 해야겠죠?"


보답은 무슨 보답.

구원받은 건 난데.

나야말로 네게 무언가 주고 싶은걸.

아무리 깊은 바다 속이라도, 항상 나를 찾아내 수면으로 이끌어 주는 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에기르에는 재미있는 동화가 정말 많답니다. 들으면 잠이 솔솔 오실 거예요. 그도 아니면, 자장가를 불러 드리는 것도 괜찮겠네요. 박사님은 제 노래를 좋아해 주시니까요."


하지만 너는 항상 내게 퍼주려고만 하는구나.

그저 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한없이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내 아쉬워.
 

"그도 아니면...침대에서 함께 '운동'을 해 보는 건 어떠세요?"


그런 내 마음조차 읽은 걸까.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네 눈동자에, 명랑하면서도 어쩐지 위험한 욕망이 깃든다.

구해 줬으니 한 입 정도는 깨물게 해달라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달콤한 협박.

그 미소에, 정말 오랜만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배어나왔다.


"...아하."

"땀을 쭉 빼고 잡생각을 없애면 잠이 잘 오실 거예요."

"...그러네."


한 입이 뭐야, 쪼잔하게.


"그럼 부탁할게."

"아핫, 네!"


전부 줄게, 로렌티나.

마음껏 먹어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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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조아

바다의 정실 상어

분탕충 믈라년때려잡는 상어장군님 만세


그니까 시발 우리 교수님도 반갈죽 내주라 상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