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채널

황갈색 군복을 아직까지도 입은 병사들의 검문소를 지나니 AB시라는 낡은 표지판 뒤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민둥산 위로는 궁서체인 빨간 글씨들이, 그 아래로는 1980년대를 보는 듯한 쓰레트들이 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민둥산 위로 그림처럼 나무가 서있었다. 단 한 그루였다. 어떤 나무는 베어가고 어떤 나무는 김XX가 만졌다고 못 베어가다니, 어떻게 보면 아주 황당한 것이었으나 그런 김XX를 고맙게 생각해야 할 처지였다. 그가 아니었음 산은 단 한그루의 나무도 남겨두지 않았을 테고 우리가 이 시골에 올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신기하냐?”

나무를 바라보는 내게 이 교수가 묻는다.

신기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의 나무였는데, 그게 남아 있을 줄이야.”

그 나무는 해방 전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불리는 A의 나무였다. A, 자연과 자신을 노래하던 시인인 그는 한 느티나무를 자신처럼 여기며 아꼈고 그의 시엔 언제나 그 느티나무가 노래되었다. 해방 후 A는 고향인 신의주에 있었고 자유를 갈망한 그에게 획일화된 사상은 맞지 않았는지 곧 이름 모를 병으로 요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풍문으로는 그는 죽을 때까지 그 나무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 나무가 , 위대한 시인이 사랑했던 나무가, 저 민둥산 위에 서있다. 몇 가지 조사를 한 뒤 우리는 주민의 도움을 받아 나무를 향해 올라갔다. 언덕처럼 보였던 민둥산은 꽤 가팔랐고 그 끝에 있는 나무를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언덕을 어느 정도 올라가니 느티나무 한 그루가 들판 속에서 시인처럼 서있었다. 느티나무는 황혼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고 세상 아래서는 땅거미가 다가왔다. 느티나무는 나무 자체로도 아름다워 보였다. 안개꽃빛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은 지쳤는지 주저앉아 하소연 하듯이 말했다.

보시오, 이게 나고, 이자가 A라우. 하도 유명하기도 허구 머리도 신기하게 생겼길래 찍자고 했다우.”

노인은 이 느티나무 앞에서 그와 A가 찍힌 사진을 보여주었다. 노인은 A를 만난 것이 영광스러웠던 건지 과거의 영광을 위해선지 그의 뇌 속을 다 뒤집듯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이제는 확실했다. 그가 머물던 곳과 그와 관련된 소문,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사진까지, 모든 것이 이 느티나무를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게다가 이 산에서 이 느티나무만이 살아남은 것도 A가 해방 전까지만 해도 김Xx와 친했다는 사실까지 종합해보면 틀림없이 이 나무였다. 흥분한 이 교수는 그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제 나도 비정규직 탈출이다. 권 교수 그 놈은 이제 내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겠지.”

이 교수의 마음은 벌써 대한민국 서울 A대 본캠에 가 있는 듯 했다. 이 교수는 민둥산을 내려오자마자 학회에 메일을 보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 논문을 쓸 일 만 남았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이 교수가 학회에 메일을 보내자마자 어떻게 안 것인지 AB시 수습위원장이 전화 걸어 왔다. 그는 그곳이 AB시의 관광지로 거듭나길 바란다며 그가 임시 관광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이 교수는 서울보다는 이라는 직책이 더 좋았는지 제안을 덥석 물었고 덕분에 우리는 이곳에 훨씬 더 오래 있게 되었다. 이 교수는 학술 발표를 위해 서울과 이곳을 넘나들었고 규제를 풀기 위해 공무원과 술잔을 기울였다. 안경 낀 샌님이 무슨 사업을 하냐며 걱정도 했지만 그는 이 분야에 잘 맞았다. 하긴 그는 교수들 대신 공무원들과 술을 마셨고 교수들 대신 공무원들에게 붙임성 좋은 말들을 했을 뿐이었다. 가끔 그가 천직을 찾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열심히일했다. 나는 마을에 남아 걸려오는 전화와 서류들을 처리했는데, 대부분 남쪽 사람들의 땅값이 얼마냐, 통일 경제촉진정착 지원금은 얼마냐 하는 류의 전화였다. AB시엔 재개발 열풍이 불었고 주민들은 속아 넘어간 건지 아니면 사상의 억압 이후 처음으로 본 거액의 돈이 신기했던 건지 여름에 땅을 팔아 버렸고 부동산 가격은 날마다 치솟았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AB시는 남쪽 사람들로 가득 찼다. 나는 향수를 느낄 시간도 없이 매일 전화 업무에 시달렸고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나의 말에 이 교수는 벌써 정교수가 된 듯이 강사 자리 TO 하나 곧 알아봐주겠니 조금만 기다려라 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전화기인지 사람인지 헷갈렸다. 붉었던 창문이 다시 붉어진다. 나는 지쳐버려 전화기에 달라붙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조수인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지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을 찾은 이교수를 원망했다. TO를 빌미로 채찍질하는 이교수가 싫었고 굳이 나무에서 손을 덴 김Xx가 싫었고 이 나무를 노래한 A가 싫었다. 그때였다. 공사 중인 건물 뒤로, 벽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나무가 보였다. 나무가 서있었다. 나는 홀린 듯 사무실을 빠져나와 언덕 위를 뛰어갔다. 다 올라갔을 때쯤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느티나무는 시끄러운 세상과는 달리 시간이 멈춘 듯 서있었다. 그 때였다. 햇빛이 느티나무의 등 뒤로 오자 나무는 시인이 되었다. 흑백사진이었던 A가 나를 보고 있었다. 햇빛이 잠시 비켜나와 나를 감쌌다. 온갖 잡념이 허리를 타고 빠져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시인은 이파리들 사이로 숨고 말았다. 느티나무의 짧은 허리를 미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찰나이기에 중독적이었고 그때부터 나는 매일 새벽 나무가 있는 언덕에 올랐다. 곳에 오르면 언제나 그렇듯 해가 기어 나오려했고 그 순간에 나는 A와 마주하고 있었다. 느티나무 이파리 사이로 빛이 새어나올 쯤엔 그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한순간의 눈 맞춤을 잊지 못해 다시 오르고 말았다. 그 사이 나무는 인파를 맞이해야 했다. 남쪽의 아주머니들은 검은 물결을 이루어 산을 올라갔다. 민둥산은 어느 샌가 가느다란 금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민둥산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40분 남짓이었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데 30분 정도 잡는다면 그들은 고작 10분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모니터링 중 그들의 글을 발견했다. -오늘은 국민시인 A가 사랑했던 느티나무를 보고 왔습니다. 느티나무가 언덕 들판 위에 있는 것이 참 예쁩니다. 제 마음도 힐링이 되는 것 같습니다.-라며 나무를 배경으로 그녀의 등을 찍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