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운영하는 꽃집에 왔다. 작고 예쁜 곳이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그 애의 꽃집에 들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약속없이, 혹은 몇번의 연락 후 불쑥 찾아가면 h(친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차 마실래?’ 라고 물어본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다. 별 거 아닌 이야기를 하는 순간들을 사랑한다. 삶에는 그런 순간들이 필요하다.

오늘은 어딘가를 다녀오지 않았다. 서촌에 있는 빈티지샵을 가볼까, 아니면 메가박스에 영화를 보러 갈까 생각했지만, 다 내키지 않아서 그만둬버렸다. 대신 룸메이트와 장을 보고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 집 근처 마트에 가서 감자와 당근, 햄 같은 걸 사서 도마에 놓고 사각으로 잘랐다. 카레를 만드는 과정은 다른 음식을 만드는 과정보다 아기자기하다. 주황색 당근을 볶고 있으면 룸메이트가 그 위에 노란색 감자, 분홍색 햄을 떨어뜨린다. 색색의 직육면체를 뒤집개로 볶고 있으면 공기놀이를 하는 느낌이 든다.  

신해욱 시인은 카레를 ‘조용한 음식’ 이라고 불렀다. 그건 아마 야채위에 카레가루를 뿌린 뒤 완성된 카레를 일컫는 표현일 것이다. 카레가루를 뿌리기 전의 사각형의 야채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기름을 두른 직육면체의 야채들은 재잘거리며 프라이팬을 뛰어다닌다. 그러다 카레가 그 위에 얹어지면 언제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는 것이다.

야채가 볶아지는 과정, 카레와 같이 끓여지는 과정은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 딱딱하고 설익은 직육면체의 야채들은 어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색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고,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잘 썰리지도 씹히지도 않는다. 그들은 뛰어다니고 재잘거리며 프라이팬 위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생생함이 잘 살아있는 음식은 아마 샐러드일 것이다. 신선하고 아삭거리며 차가운 당신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불에 의해 달궈지기 시작하면 야채들은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좋게 말하면 부드러운 것이지만, 물러지는 것이다. 물기가 생기는 것이다. 물기를 품은 물체는 슬프다. 물기를 품은 물체들은 뚝뚝 소리를 낸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물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볶아지는 야채들은 고유의 맛을 잃어간다. 프라이팬이 뜨거우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못내 슬펐던 순간들이 있었다.

나에겐 선배들이 그랬다. 싱싱한 야채같았던 나의 대학 선배들. 질기고 설익고 싱싱해서 반짝거렸던 나의 선배들. 우리는 볶아지는 것도 모른 채 많은 이야기들을 했었다.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많이 울었다. 아직도 하단에 가면 그 물기들이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다. 나는 그것들을 못본 채 하고 지나간다.

룸메이트가 고체 카레를 물에 풀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죠?’ ‘응, 그럴 것 같은데?’

걸쭉한 카레가 선배들 위에 덮이기 시작한다. 조용해지는 나와 선배들.

오랫동안 야채가 들어간 카레를 저으며 생각한다. 조용해진다는 건 슬픈 일 일까. 물기를 머금은 물체가 되면 안되는 걸까.

한동안은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선 안된다고. 도대체 뭐하는 거야. 왜 다들 바보가 되는거야. 왜 당신은 예전같지 않은거야. 왜 당신은 더이상 나에게 충격을 주지 못하는 거야.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살아보니 뭔가 알 거 같았다. 당신들도 어딘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존재하고 있구나. 단지 카레가 안개처럼 짙어서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한 거구나.

당신이 물러지고 부드러워진 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내가 변한 건 나의 잘못이 아니야. 프라이팬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궈지고 있는데, 예전같은 모습으로 있으라고 하는 건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비비드했던 나와 당신 위에 소복한 카레가 덮인다. 후추와 소금이 눈처럼 덮인다. 당신과 나는 비슷한 맛을 내게 된다. 도시는 우리를 조용한 짐승으로 만든다. 도시에서 살아남는 짐승은 개보다는 고양이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

‘형 다 끓은 것 같은데요?’ 

룸메이트는 조용해진 카레를 플라스틱 그릇에 담는다. 우리는 상을 펴고, 고요한 점심을 먹는다.

‘맛있는데요?’

그래, 맛있으면 됐지. 맛있으면 된거야.

 

 

앞에서는 친구가 주문받은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

그 애에게서도 카레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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