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 2.0. 돌아온 내각제 - 제2공화국 수립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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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장면 정권과 여당은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다. 구파와 신파의 갈등은 끝내 구파가 신민당으로 분당하며 루비콘 강을 건너버렸고, 2공화국 10개월간 무려 세 차례의 개각이 거듭되며 당시 정부 각료들의 평균 임기는 2개월에 불과했다.

게다가 10여년 간 자유당 독재에 억눌린 요구들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앞서 2공 수립에서 말했듯 하루 평균 7~8건의 데모가 발생했고, 수없이 탄생한 언론은 사회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정부의 비난에만 초점을 맞췄다.

거기에 더해 군부 역시 포화상태였다. 전쟁 발발 당시 95000명이었던 국군은 1961년엔 무려 70만명에 달했고,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고급 지휘관들은 미국 유학까지 갔다. 그러나, 문제는 인사적체였다. 육사 1기부터 7기 까지는 전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는 진급 적체로 만년 중령들이 대량 발생했다. 특히나 불만이 강했던 것이 육사 8기생, 엎친대 덮친 격으로 장면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드는 비용의 일부를 국군 감축으로 조달하려 했다. 지금도 대우가 개판이지만 당시에는 퇴역 군인에 대한 대우가 더욱 개판이었기에 장교들은 정책에 반발했다. 게다가 봉급도 쥐꼬리보다 작아 부정부패와 횡령, 뇌물도 성행했었다. 이런 개판에 홀연히 존재감을 드러낸 이가 바로 소장 박정희였다.


-야망에 찬 남자

박정희, 1917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시 출생으로 아버지도 소위를 지낸 군인 가정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근대식 교육을 받은 그는 교사 재직 중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지원하나 나이 제한으로 거절당한다. 그러자 탈락 재고를 위해 혈서를 학생시험 용지에 써서 보내고, 고향 선배이자 시험관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가 이를 보고 후원자가 되어 입학한다.

1942년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졸업한 박정희는 창씨개명하여 그 유명한 '타카기 마사오'로 불리며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 1944년 4월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되어 같은해 7월 만주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단 소대장으로 근무한다. 최종적으로 중위까지 진급한 박정희는 일본 패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복무 중 셋째 형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 사살되며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여순사건 직후 숙군 작업 중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백선엽 대령과 채병덕, 정일권을 비롯한 육군군관학교 출신 군인들의 구명 및 박정희 본인의 군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 제공으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다.

그렇게 군에서 쫓겨난 박정희는 첫 결혼 생활을 내연녀 문제로 파탄내고, 매일 술이나 마시는 폐인이 되었다. 일반인이었다면 그렇게 살다 객사할 운명이었으나, 역사는 그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박정히는 포병 소령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중령으로 진급하고 육본 수송지휘관을 맡은 그는 그해 12월 육영수 여사와 재혼한다.

전후 준장으로 승진해 장군이 된 그는 1955년엔 5사단 사단장 자리까지 오른다.

1957년엔 소장 진급까지 하게 되고, 이때 진급 담당자들이 구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자 백선엽 장군이 직접 그를 두둔하였다. 제6군단 부군단장에 오른 박정희는 곧이어 7사단 사단장, 육군 제6군관구사령관,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부(현 육군군수사령부) 사령관, 혁명 이후에는 육본 작전참모부 부장까지 오르고 당시 국방부 장관 이종찬의 건의로 장면 국무총리의 관심까지 받는다. 

하지만, 장면 총리가 이 문제를 미 육군 제8군사령과 카터 매그루더와 논의하다 그가 남로당 활동 전적이 있음을 알게 되고, 결국 중용되지 못한다.

문제는, 박정희가 고작 육군 소장에서 머무르다 전역할 정도의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교사 시절부터 하숙집에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붙여 놓을 정도로 야심이 넘치던 40대 박정희는 끝내 군인으로써 최악의 행동에 돌입한다.


-계획

박정희는 정변을 계획했다. 그리고 1961년, 4.19 혁명 1주년 기념으로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이때의 혼란을 틈타 집회 진압 명분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조용하게 끝나 결국 거사일은 한달 미뤄지게 된다.


-한강을 넘은 군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청와대, 방송국, 육본을 비롯한 서울 주요기관을 점령하기 위해 육사 8기생 중령들과 궐기하여 영등포 제6군관구사령부를 제1지휘소로 삼고, 부평의 33사단, 서울 서부 수색의 제30사단, 서울 동부 육군 6군단 포병대 5개 대대, 육군 제1공수특전단(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그 외 대구, 광주, 부산 등의 전투부대, 일부 육본 부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권할 밖의 김포 주둔 해병대 제1여단(현 해병대 제2사단) 등 6천명이 넘는 군인이 동원되었다.


5월 16일로 딱 넘어가는 순간, 박정희는 시간을 끌다 술까지 마신 채 영등포 제6군관구사령부를 장악한다. 비슷한 시각 일부 해병대가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 요충지 김포를 비워두고 한강을 타고 남하, 서울로 향한다.


새벽 2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총리 집무실이 있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809호실에 전화를 걸었다.(당시 총리 공관이 없었다.) 장면 총리는 장도영으로부터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염려할 필요 없다는 내용을 보고 받는다. 장면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는지를 묻고 보고했다는 대답을 듣고선 "내게 직접 와서 사건을 자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새벽 3시 경, 주한미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가 주한미국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반란 소식을 전한 뒤, 쿠데타와 미국은 무관하며 결코 지지하지 않음을 서로 확인했다.(바로 3주 전 미군이 특공대를 쿠바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었다.)

비슷한 시각 장도영도 국방장관 현석호의 자택에 전화를 걸어 반란 소식을 전하고, 육군 방첩대 서울지부에 있으니 나와 달라고 말했다. 현석호는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을 찾으려 했으나 통신기술의 부족으로 연락이 되지 않아 지시사항만 내린 뒤 반도호텔로 향한다.


끝내 새벽 3시 40분, 6군단 포병단이 남산 육군 본부를 장악하고, 박정희는 한강 건너 헌병과 1시간 가량 대치를 벌인다.


새벽 4시,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에게 군사봉기를 승낙하고 진두지휘를 간청하나 장도영은 끝까지 거절한다. 장도영은 "군이 시내에 들어왔고 진압될 것 같지 않다"는 소식을 장면과 윤보선에게 전한 뒤 곧바로 카터 매그루더에게 "폭동인지 반란인지가 일어났다"고 보고한다.


4시 20분 경, 국방장관 현석호가 총리 집무실로 향하던 중 총성을 듣고 검찰총장 이태희등과 함께 장면을 피신시키려 했다. 장면은 거부했으나 둘은 장도영이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다며 장면과 장면의 아내, 경호대장, 운전기사 까지 4명을 차에 태워 피신시키고 의전 비서관 이홍렬을 집무실에 남긴 뒤 검찰총장, 경감, 국방장관은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다.

장면이 떠나고 10분 뒤 박종규와 특수부대가 들이 닥쳤으나 장면은 이미 피신한 상태, 그러나 군은 이홍렬을 체포하고 장면과 연락을 취하기로 한 전화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 즈음, 대구가 쿠데타 세력에게 떨어지고 경북도청과 경찰국, 경찰서 3개, 소방서, KBS 대구방송국 등이 반란군에게 점령당했다.


새벽 5시, 육군본부와 중앙방송국(KBS 라디오) 5시 뉴스가 군사혁명을 알렸다.

이미 육본도, KBS도 군대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실제론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장악하지 않았지만 방송을 통제해 이를 알리며 국민들에게 착시 효과를 보이고, 이원엽 등 주요 인물들이 L-19 연락기 5대로 삐라 10만 장을 서울 시내에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새벽 6시, 장면은 안국동 주한미국대사관 등으로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아내와 자녀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들어가 은신했다. 장면은 총리 집무실의 이홍렬이 체포되고 비밀전화 역시 반란군에게 몰수당했지만 외부 상황을 끊임없이 주시하며 5월 16일 당일 미 대사관과 차분하게 통화를 주고받았고 이후에도 여러 사람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 받았다.


아침 7시, 부산에 주둔 중이던 헌병 2개 중대가 부산 내 주요 시설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KBS 부산 방송국, 남전 부산지점, 부산 전화국 등을 점거했다.


9시 경, 대통령을 살려두기로 결정한 반란군은 그 즉시 박정희와 대령 유원식의 명령 하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공군참모총장 김신, 해병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장관 현석호를 끌고 청와대 응접실에 찾아가 윤보선을 불러내 계엄령을 추인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완강히 거부, 결국 30분 뒤 전원 철수한다.


10시 경, 연합참모본부가 북한군이 휴전선 일대에 집결 중이라는 보고를 올리고,  10시 18분에는 미 8군 대변인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는 미8군방송과 미국의 소리에서만 보도된다.


10시 30분, 윤보선은 카터 매그루더와 마셜 그린을 불러 2시간 가령 회담을 나눴다. 주요 쟁점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국군을 차출하는 것이 남북한 어디에 더 이로운가 였는데, 매그루더는 원칙상 유엔군은 내전에 개입할 수 없지만 진압은 가능하다고 밝히며 또한 군 내부 균열이 오히려 북한의 침략이나 그와 유사한 공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 했다.

윤보선은 헌법을 지켜도 적화되면 무용이라 판단, 북한의 동태에 근거해 국군 동원을 허락하지 않고, 매그루더는 본부로 돌아간다.

돌아온 카터 매그루더는 긴급작전회의를 열어 존 라이언 장군과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에게 쿠데타 진압 명령을 하달하고 미합참으로부터 작전 승인을 기다렸다. 이한림 역시 원주 1군 사령부에서 참모 회의를 소집하고 유혈 방지에는 동의하나 반란은 지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앞서 5.16 주체세력에게 협조를 강요받은 장도영은 윤보선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고, 윤보선은 민주당에서 임명받은 자가 군부의 전권을 쥐는 계엄사령관에 오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내보냈다. 그 다음 참의원 백낙준, 최두선 동아일보 사장,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홍종인 조선일보 회장 등을 불러 자문을 구했고, 결국 서울의 이 사태는 대통령이 수습할 것이니 야전군은 동요하지 말라,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이른바 출동저지서한을 작성하기로 해 다음날 새벽 6시 경 보내진다.


결국 16시 30분 장도영이 군사혁명위원회의장직과 계엄사령관직을 수락하고, 1시간 뒤 포고 4호가 내려져 모든 국회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국무의원과 정무의원 모두 체포,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구정치인과의 협상 배격을 알렸다.


우리나라는 지금 중대한 시국에 놓여있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에는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막는 힘에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이 나라의 일을 판단해야 하며, 희생없이 최선의 방법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우리의 성의와 노력을 다해야 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중대한 사태에 처해서 혼란방지와 질서유지에 국민 여러분들이 특별히 노력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장 총리 이하 모든 국무위원등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중대한 사태를 성의있게, 합법적으로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국무회의에 출석하는 국무위원의 신변은 보장된다고 합니다.

22시 30분 윤보선은 장도영을 통해 민주당 각료들의 신변보장을 약속받은 것을 근거로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사를 방송을 통해 전달한다.

이로써, 간신히 다시 피어난 민주주의는 군화발 아래에 무참히 짓밟혔다.


-결과

사실 이 쿠데타는 굉장한 도박수였다. 병력 차출은 계획처럼 술술 진행되지 않아 최전방 김포를 방어하던 해병대 제1여단이 돕지 않았다면 쿠데타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사전에 쿠데타 관련 명단을 확보했으나 그것이 쿠데타라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체포는 불가능했다. 5.16 주체세력도 이 정변이 실패할 시를 대비해 평화적인 정군운동임을 입증할 자료도 구비하고 있었고, 장도영도 물증 없이 체포를 시도했다가는 그것을 계기로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고 봐서 체포를 망설였다. 게다가 사후대처도 형편없어 쿠데타 발생 시 제2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출동한 병력은 고작 육군 헌병 1개 중대, 그것도 서울특별시청 앞에서 반란군 편으로 돌아섰다.

장면 총리는 미국과의 오랜 논의 끝에 5월 18일 오후 1시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사퇴 성명을 발표한다.

처음 미국은 이 쿠데타가 공산주의의 반역인 줄 알고 진압할 생각이었으나, 미국은 온갖 핑계로 반대하고 군부도 각장 친미 반공정책을 펼치며 묵인되었다.

한편 육군 보병대위 전두환은 며칠간 주도면밀한 조사 끝에 이 정변이 박정희와 그의 측근이 일으킨 것임을 알고 육사 교장에게 사관생도들이 5.16 정변을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해 퍼레이드를 강요, 전두환은 박정희의 심복이 되어 훗날 박정희의 뒤를 잇는 독제자가 된다.

쿠데타에 대한 어떠한 언질도 못 들은 해군과 공군은 당혹스러워 했고, 특히 해군은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제독이 쿠데타에 펄펄 뛰며 반대해 대규모 감찰까지 받았으나 오히려 부패가 전군에서 가장 적어 박정희의 눈에 들었고, 기어링급 구축함 등 각종 지원을 받았다.

반대로 상관까지 팔아먹고 설치던 해병대는 배트남 전쟁 끝날 무렵 해병대사령부는 해체되고 해병대사령관은 해군 제2참모차장으로 격하, 공식적으로 해병대라는 명칭도 못 쓰게 되었다.


-반응

의외지만, 당시엔 지식인도 국민도 반응이 괸찮았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정변에 대해 비판하면 보복을 받았기 때문에. 게다가 당시 장면 정권의 지지율이 너무 나빠서 더 그렇기도 했다. 또한 당시 제3세계의 군사정변은 대부분 민족주의 적이자 개혁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였고 그 즈음엔 세계적으로 군이 하나의 정치세력인 경우가 많았다.


-기타

참고로 쿠데타 3일 전에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때 덩선된 의원들은 취임 12시간만에 국회 해산으로 의원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이 중에는 4번의 낙선 끝에 강원도 인제군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 김대중이었다. 그리고 박정희와 김대중의 오랜 악연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이 5.16 군사정변은 군사정권 내내 5.16 혁명이었다가 1995년 4.19 35주년을 기해 4.19 의거를 혁명으로 승격시키며 함께 정변으로 강등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