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급하게 쓰느라 내용 짤려서 다시 올림. 디시 시발 제목 제한 안늘리냐


DD-692 알렌 M. 섬너는 워썬더 미국 해상 트리 BR 4.3에 위치한 구축함이다.


  알렌 M. 섬너급은 플레처급을 좀 더 다목적 구축함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함급임. 플레처가 디자인될 당시에는 주포의 사격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상적인' 방법으로 올릴 수 있는 대공포탑은 1기 정도가 한계라 평가되었고, 이에 불만이었던 미 해군은 플레처의 주포화력과 어뢰투사능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대공화기를 증설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이에 대한 답은 5인치를 연장포탑에 올려 주포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줄여 남는 공간에 대공포를 올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기존에 전함들이 쓰고 있던 Mk.32 포탑을 구축함에 올릴 수준으로 경량화시킨 Mk.38 포탑이 세기 올라가게 되었다. 이 결정 덕에 알렌 M. 섬너는 플레처급에 비해 대공포의 증설 면에서 자유로워졌으며, 주포 화력 역시 증가하였다.


1944년 항해중인 USS 알렌 M. 섬너


  설계 변경 덕에 이뤄진 대공화력의 증가는 절륜했다. 플레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4연장 40mm 보포스의 탑재 역시 가능했으며, 후기형에서는 심지어 1기 더 탑재되어 총 3기의 4연장 40mm 보포스를 탑재할 수 있었다. 2연장 보포스 역시 2기 탑재되었으며, 이를 보조하기 위한 20mm 오리콘도 10기가 설치되었다. 여기에 카탈로그 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여유공간의 증가 덕에 함교를 늘려 CIC를 키움으로써 좀 더 효율적인 대공전투 지휘가 가능했다. 어뢰는 플레처와 마찬가지로 533mm 5연장 발사기 2기가 설치되었다. 이외에도 추진축은 2개였지만 방향타는 하나였던 플레처급과 달리 방향타가 둘로 늘어남으로써 조향성이 더 좋아졌다.


1959년 지중해상에서 촬영된 USS 알렌 M. 섬너


  하지만 알렌 M. 섬너는 대전기 미국 구축함 답지 않게 70척만이 계획되었고 그 중에서도 58척이라는 적은 숫자만이 완성되었는데, 이는 알렌 M. 섬너의 상부구조물이 차지하는 공간은 플레처급보다 적지만 그 무게는 플레처급보다 큰 탓에 무게중심이 불안해지고 항속거리가 짧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미해군은 선체를 4.3m 늘려 해당 부분을 추가 연료적재공간으로 삼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기어링급으로 관심을 돌려 알렌 M. 섬너급은 70척만 건조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중에서 12척은 다시 고속 기뢰부설함인 로버트 H. 스미스급으로 전용하기로 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알렌 M. 섬너급은 58척만 만들어진다. 다만 로버트 H. 스미스급 역시 알렌 M. 섬너급의 무게중심 문제 때문에 어뢰발사관을 전부 걷어내고 기뢰 설치능력을 부여해놓고는 기뢰를 탑재하지 않고 대공함으로만 쓰였다(...)


1967년 홍콩에 입항하는 USS 알렌 M. 섬너


  종전 후 알렌 M. 섬너급은 가장 신형인 구축함에 속했기 때문에 퇴역하지 않고 주력구축함으로 쓰였다. 그러나 1950년대 말이 되자 알렌 M. 섬너급이 냉전시기에 모든 임무를 만족스럽게 수행하기에는 힘들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FRAM II라 불리는 개장사업을 통해 마지막 남은 5연장 어뢰발사관과(하나는 이미 1945년 말의 개장에서 보포스 4연장 대공포로 교체되었다) 모든 40mm 보포스 대공포를 제거하고 대신 대잠무장을 확충하고 무인 헬기 운용능력을 확보하였다. 남아있던 알렌 M. 섬너급들은 함선의 노후화가 심각해진데다 FRAM II에서 탑재가 결정된 무인 헬기 DASH가 쓰레기 같은 능력을 보여준 탓에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 녹스급 대잠프리깃으로 대체가 시작되어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퇴역하였다. 퇴역 후 29척이 미국의 우방국 각국으로 공여되었으며, 이 중에는 DD-703 USS 왈라스 L. 린드와 DD-727 USS 드 하빈 2척을 공여받은 한국 해군이 포함되어있다. 두 척을 각각 DD-97(80년대부터는 DD-917) 대구와 DD-98(마찬가지로 80년대부터는 DD-918) 인천으로 개명하여 운용하던 한국 해군은 1994년까지 이 둘을 운용하였다.


취역 전날의 USS 알렌 M. 섬너


  워썬더에 등장하는 DD-692 알렌 M. 섬너는 알렌 M. 섬너급의 1번함으로 1944년 1월 26일 취역하였다. 이후 일반적인 태평양전쟁 후반기 취역한 구축함들답게 항공모함 호위와 해안 화력지원에 집중하다가 1944년 12월 2일 최초이자 최후의 함대함교전을 치뤘다. 자매함인 DD-693 USS 모알레와 DD-695 쿠퍼와 함께 항해중이던 알렌 M. 섬너는 밤 11시 일본 정찰기의 폭격으로 시작된 공격을 견디던 도중 일본제국해군의 구축함 쿠와와 타케를 만나 교전에 들어갔다. 전시에 급한대로 숫자를 맞추기 위해 찍어냈던 마츠급 구축함 두척을 상대로 세척의 알렌 M. 섬너급들은 화력의 우위를 마음껏 선보여(마츠급의 주포문수는 정확하게 알렌 M. 섬너급의 절반이다) 10분만에 쿠와를 침몰시켰지만, 곧이어 12월 3일 0시 13분 타케가 발사한 어뢰가 USS 쿠퍼의 정중앙에 직격하여 반갈죽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근처에 있던 해안포의 사격과 계속되는 공습에 시달리던 남은 두척의 구축함은 결국 타케가 퇴각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USS 쿠퍼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것 역시 실패한다. 결국 USS 쿠퍼의 살아남은 168명의 생존자들은 새벽 2시 날아온 PBY 카탈리나들에 의해 구조된다. 미 해군 191명이 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1944년 5월의 USS 알렌 M. 섬너. 화려한 위장무늬가 돋보인다.


  1945년에도 USS 알렌 M. 섬너의 운은 별로 좋지 못했다. 1945년 1월 2일 소해작전을 엄호해주던 USS 알렌 M. 섬너는 일련의 가미카제군을 맞이하여 교전하던 중 3기의 제로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중 처음으로 진입하던 항공기는 USS 알렌 M. 섬너가 펼친 화망에 기겁하여 후퇴하지만 두번째 항공기는 기민하게 화망 사이를 배회하며 대공포들의 주의를 끌었고, 결국 세번째 제로는 거의 무저항 상태에서 후방 어뢰발사관 근처에 충돌하였다. 이로 인해 14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했으며, 알렌 M. 섬너는 일선에서의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받아 진주만으로 회항했다. 수리는 4월 10일에야 끝났고, 승무원 보충을 받고 훈련을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가 진주만에 알렌 M. 섬너가 돌아온 것은 1945년 8월 12일이었다. 그렇게 USS 알렌 M. 섬너는 종전을 맞이했다.


비키니 섬 수중 핵폭발 실험(크로스로드 작전)에 참여한 USS 알렌 M. 섬너


  USS 알렌 M. 섬너는 비교적 신형함이었기에 전후 군축기에도 퇴역하지 않고 계속 현역으로 굴렀다. 1946년에는 퇴역함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수중 핵폭발 실험에 핵폭탄 기폭을 위한 지원함으로 참여하였으며, 1947년에는 호주부터 중국,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항해를 수행했다. 하지만 1949년부터 지중해 함대에 배속되어있던 탓에 한국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다만 휴전이 맺어진 이후인 1953년 8월 휴전조약 이행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남해를 지나가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활동하던 USS 알렌 M. 섬너가 태평양으로 돌아온 것은 1967년이었다. 2월 핵추진 순양함 USS 롱비치의 대잠 엄호를 위해 베트남에 배치되었던 USS 알렌 M. 섬너는 8월 1일까지 베트남에서 작전하였다. 이후 돌아온 USS 알렌 M. 섬너는 특이사항 없이 1973년 8월 15일 퇴역하여 1974년 민간 회사에 매각되어 해체되었다.


알렌 M. 섬너급은 1944년부터 1975년까지 58척이 건조되어 4척이 작전 중 피격으로 직접 침몰하였고, 2척이 수리를 포기하고 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