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대해 알기 위해선 그것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개인 이름인 야훼 YHWH로 하느님을 부를 수 있도록 한 것은 특별하다. 또한,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 신적인 계시에 대한 이스라엘의 증언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스라엘 전승에서 거룩은 야훼와 관련된다. 야훼라는 거룩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변화와 다양함 속에서 신학적으로 계속되었다. 거룩의 개념은 모든 종교가 만나는 토대이기에 거룩은 제사, 예언, 지혜의 다양한 전승들에서 반영되고 반사된 하느님에 관한 이스라엘의 지식의 주된 자료이다.

 거룩의 의미는 두려움 즉, 경외와 매혹 즉, 황홀한 상태라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거룩의 독특한 본질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며 거룩은 신성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초월적이며 전적인 타자이다. 그렇기에 잘못하면 거룩을 인간의 의식으로만 제한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으나, 고대 세계와 이스라엘에서 거룩은 인간 세상 속으로 쳐들어와 존재를 위협하고 매혹과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힘으로 경험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질이나 의식의 상태가 아니라 대단히 활동적이고 활력적이며 역동적이고 심지어 위협적인 힘이다.

 이스라엘에서 거룩이 표명되는 고전적인 예는 십계명의 반포와 계약 수립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시내산의 하느님 현현에 대한 묘사이다. 하느님의 임재는 불로 상징화되었다. 하느님의 거룩은 주변 사물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불이나 전류처럼 인간세상을 파괴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와 달리 세미한 소리로도 나타나는데 엘리야 이야기에서는 시내산에서의 현현과 달리 하느님은 부드럽게 나지막한 소리 또는 속삭임 아니면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거룩은 언제나 그들 곁에 있었다. 강력한 힘이든 세미한 소리든 말이다. 그렇기에 토라는 이스라엘이 경배한 하느님을 우리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이라고 고백하게 한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거룩은 초월적이며 동시에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내재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이름은 어떤 것인가? 발터 아이히로트는 거룩은 속성과 작용을 신적인 단신으로 설명하는 데 적당하게 보이는 칭호로 설명한다. 거룩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구원하는 능력과 윤리적인 관심으로 나타나는 힘이다.

 제사문서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오경에서 야훼의 이름을 대단히 강조한다. 창조에서 아브라함까지는 엘로힘을,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는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느님)을, 모세로부터 그 이후로는 야훼(주)로 나타난다. 창세기의 전승에 의하면 야훼의 이름은 모세 이전 시대에서 사용되었다. 야훼는 하느님의 축복을 빌거나 이름을 부를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제의적 이름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개인 이름을 갖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은 관계, 정체가 있는 존재, 사람과 제휴하는 존재로 알려졌다. 그의 이름은 개인적인 관심과 윤리적인 요구를 가지고 사람에게 향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고자 정체를 갖고 유한한 것과 인간적인 것을 가지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로 하셨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모르는 하느님께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알려져 경외하며 신뢰하는 하느님께 제단을 쌓았다.


 야훼의 어원을 단어 그 자체(사역동사로 “그가 있게 하다”)의 발음과 글자, 출애굽기 3장 13절 ~ 15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her ’ehyeh)의 신성 4문자(tetragrammaton)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살펴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야훼의 이름은 어원을 살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맥락이 없으면 이름이 의미를 상실하는 것처럼, 야훼는 근본적으로 거룩한 분이 구속하고 강요하는 힘을 가지고 노예의 세상에 들어온 이야기 혹은 역사에 속한다. 야훼의 이름은 간접적으로 주어졌다.(불타는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언어유희로 전달된 것처럼 말이다.) 유대인이나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초월성, 신의 신성한 무한성을 알아차렸다. 랍비들은 하느님에 대한 경이의 표시이자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후에 아도나이(’adonai, 주)의 모음들을 거룩한 자음들(YHWH)에 연결시켜, 신성 4문자가 기록될 때마다 이 대체어로 읽었다. 흠정역 번역자들은 이러한 문학규정을 이해하지 못해 자음과 대체 모음을 같이 읽음으로써 "여 호 와" 라는 혼종어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은 기도나 예배에는 적절하다. 십계명 중 하나는 “너는 네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우리가 하느님을 말할 때 일종의 숭고한 당황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한, 틸리히가 지적했듯이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예언자들이 주장한 대로, 하느님의 이름이 사회의 부정을 옹호하거나 국가의 이익에 소용되는 데 불러지게 될 때마다 (렘 7:3~4) 하느님의 이름은 잘못 사용된다. 하느님이 거룩하다는 것은 하느님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며 하느님은 파악하기 어려운 임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의 계시를 드러낸다. 구약은 세상에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나와 당신(I – Thou)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증거한다. 하느님의 계시는 고대 이스라엘이 살았던 역사적인 세상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고통과 기쁨, 곤경과 소망의 현실 세계이며 더 깊은 의미로 폭력, 압제 그리고 비극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활동과 하느님의 말씀(렘 1:9, “말”)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고대 헬라 세계의 영지주의의 제의들이나 내세적인 종교나 철학, 불교와 같은 무신론적 종교들과 철학에서는 고통과 변화의 시대에 하느님의 뚜렷한 부재에 대해 크게 고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현세의 이 세상에서 행동과 말씀을 통한 하느님의 임재하심의 계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기에, 신정론의 문제, 폭력과 고통에 직면하는 하느님의 공의의 문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직시하며 고심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