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구는 다음 논문으로부터 인용하였음: 로마노 과르디니, 「놀이로서의 전례」, 『신학과사상』30, no.0, 신학과사상학회, 김영국, 1999, 188-199쪽.


아동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필자는 놀이지도라는 강의를 수강하고 있는데, 놀이의 특성 중 전례의 특성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음을 인지하였다. 마침 과르디니가 이에 관하여 저술한 논문이 있기에, 필자는 이를 중심으로 하여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먼저 여러 놀이의 특성 중, 전례와의 비교를 위해 중요한 특성을 꼽자면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1) 내적 동기: 자발적으로 행함 & 행위 자체가 목적 ▷ 향유

2) 내부로부터 부여된 규칙: 스스로 놀이에 규칙을 부여하고 이를 따름


먼저 과르디니가 논문에서 전례의 목적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


전례는 원래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미 어떤 "목적"도 가질 수 없다. 전례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본다. 하느님에게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화로우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영혼이  하느님 앞에 현존하며, 자신을 그분 앞에 드러내는 데에, 그리고 그분의 삶 안에서 신적인 실재, 진리, 신비 그리고 표지들의 거룩한 세계 안에서 생활하는 데에, 즉 자신의 참되고, 고유하며, 실제적인 삶을 갖게 되는 데에 전례의 의미가 있다.


아동은 놀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을 인식하며, 놀이라는 행위 자체를 그 목적으로 한다. 우리도 전례를 통해 -과르디니의 설명을 반복하자면- 자신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그분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을 관조하며,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즉, 하느님을 향유하는 데에서 전례를 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전례의 규정, 즉 규칙에 관하여 과르디니는 무어라 설명하고 있는가? 이는 다음과 같다.


예술과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전례 안에서 말, 움직임, 색깔, 복장, 도구들에 대한 수많은 규칙들이 엄격하고 조심스럽게 규정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이 놀이를 위해서, 어떻게 운무를 해야 하고, 손은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또 이 막대기는 무엇을 의미하고 저 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한 규칙들을 세우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이들의 의미를 짐작하지 못하고 어느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목적들을 제시해야만 한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것이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전례 역시 한없는 세심함, 어린 아이의 온갖 진지함, 위대한 예술가의 엄격한 양심을 가지고 거룩하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영혼의 삶을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 (중략) … 전례는 진지한 법칙들을 가지고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펼치는 거룩한 놀이를 규정했다.


과르디니가 예시를 든 것처럼 아동의 놀이는 한없이 진지하다. 술래잡기에서 술래가 몇을 세고 나서 돌아다닐 수 있는지에 관한 규칙이나, 얼음땡에서 얼음이라는 말과 함께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등을 얼마나 철저히 준수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전례에서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전례가 술래잡기나 얼음땡보다 얼마나 소중한지를 안다면 그 답은 매우 간단히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례에 여러 '목적'을 인위적으로 부여하느라 그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를 자주 목도한다. 몇 년 전 서울대교구의 청소년 견진 미사가 가져온 스캔들, 지금도 세계 어디에선가 행해지고 있는 콘서트식 미사 등 큼지막한 사건들이 있겠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신자들이 빨리 마치는 것을 좋아해서', '성체 분배하기 힘들어서', '연령대에 맞추기 위해' 등등의 갖가지 사유가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게 우리 전례의 현주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이가 되어야만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곁에 머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례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어린 시절 우리가 진지하게 뛰어놀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면, 응당 우리 삶의 중심인 전례에까지 확장되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