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6일에 걸쳐 세상을 만드시고, 그 마지막 날에 사람을 지으시고는 ‘심히 좋게’ 생각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손으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바로 절망이라고 했다. 유한한 인간이 그 유한함에 좌절하며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의 이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분이 계신다. 그분이 바로 초월자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무한함을 통해 우리는 절망과, 그로 인한 영혼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국의 저명한 문학가 C. S. 루이스 역시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동차 엔진과 비슷한 것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진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본래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무신론적인 집안에서 자라났기에, 내 마음에 신앙이 피어나기란 바위 틈에서 꽃이 피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한때나마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적이 있기에, 내게 있어 신앙이라는 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자기위안’ 정도로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죽음’ 때문에 극도의 불안과 절망에 사로잡혔을 때도 미처 하느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하느님께서 내 마음의 문을 먼저 두드리셨던 것 같다. 꿈에서나, 깨어 있을 때나 나는 하느님을 찾았고,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신앙은 마치 풀뿌리처럼 내 마음의 금간 곳을 파고들어 이어붙였고, 나는 신앙 때문에 다시 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한다. 혹은 하느님을 증명할 수 없는데 신앙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날 하느님을 체험했고, 하느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분께서 존재하심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이 참으로 가슴 벅차오르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을 수도 있고, 신앙이 그들 말대로 인간 두뇌 기능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신앙으로써 새 삶을 얻게 되었고, 하느님을 몸소 만남으로써 삶에 큰 희열을 얻었다. 내게 이렇게 큰 의미를 준 신앙이라면, 나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지만,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신앙 그 자체에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짧은 쾌락과 속물적 욕구가 넘치는 현대 사회를 ‘타락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힌두교적 표현을 빌린다면 바야흐로 ‘칼리 유가’의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과 자극을 찾아다닌다. 하느님이 설 자리가 없어진 그들의 텅 빈 마음 속을 그것으로 채우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하느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기에 그들은 방황하다 끝내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삶의 방향을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들도 나처럼 하느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기쁨 속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저는 사실 주사파를 했었고 절에 다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