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12월21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학자
St. Peter Canisius
San Pietro Canisi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8 May 1521 as Peter Kanis at Niemguen, Holland
-1597 at Fribourg, Switzerland
Beatified:1864 by Pope Pius IX
Canonized:1925 by Pope Pius XI
Patronage:Catholic press, Germany, writers of catechisms
Also known as:
Hammer of Protestantism; Peter Kanis; Second Apostle of Germany


네덜란드 니멘겐에서 9차례나 선출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베드로 카니스(애칭)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퀼른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파브르 신부(복자 베드로파브르 축일:8월11일)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곧 그의 설교는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트렌트 공의회 두 회기에 참석하였고, 성 이냐시오가 메시나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 번째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바바리아의 윌리엄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를 요청하므로, 그는 
1549년에 인골슈탓트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베엔나에서도 하였는데, 그의 명성은 
이 지역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가니시오는 프로테스탄트를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으므로, 이제 그는 같은 주제에 대하여 저술을 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교리서 첫판을 
발간하자 큰 선풍을 일으켜, 즉시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또 1556년에 
프라그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하여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고,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하였으며,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65년 사이에 그는 아우구스부르그에 있었다.
그는 아주 정력적인 사람이었으니, 30년 동안 도보로 혹은 말을 타고 20,000마일을 
여행하면서 선교한 사람이다. 후일 그는 딜렌겐, 인스부룩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부르그에서 교육에 전념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을 할 만큼, 트렌트 공의회를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의 논객들 가운데에서 가장 예의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을 감지하였으므로,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와 레오(대)의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예로니모의 편지를 
비롯하여 순교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 등등 수많은 저서를 내었다.
흔히들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그는 1925년 시성되었으며, 교회박사로 
선인되었다.

(성 바오로 수도회 홈에서)
1521년 네덜란드의 니이메겐에서 태어났다. 쾰른에서 수학하고 예수회에 들어가 1546년 
사제품을 받았다. 독일에 파견되어 그 곳에서 수년 동안 저술과 설교로써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견고케 하는데 노력했다.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교리서] 라는 책이 
유명하다. 1597년 스위스의 프리부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저서에서
(Edit. O. Braunsberger, Petri Canisii Epistulae et Acta, I. Friburgi Brisgoviae, 1896, 
pp.53-55) 
나의  선교 사명의 원천은 예수 성심에 있습니다. 
독일의 제2의 사도라 칭하여 마땅한 성 베드로 가니시오는 임지인 그 나라로 떠나기 전 
교황의 사도적 축복을 받을 때 자신이 느낀 강력한 영적 체험을 다음의 말로 기술하고 
있다.

"영원한 대사제이시여, 당신의 엄청난 선이 나에게 베풀어 준 사도적 축복은 바티칸에서 
당신의 지도하에 그렇게도 많은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사도들이 확인해 주도록 하셨습니
다. 나는 거기에서 그 중재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은총이 나에게 내려오는 것을 볼 때 큰 
위로를 느꼈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분들은 내가 독일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을 축복하고 
확인해 주며 독일의 사도로 임명된 나에게 그분들의 도움을 약속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여, 당신은 그날 얼마나 신중히 독일을 내 손에 맡겨 주셨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독일은 언제나 내 마음이 집착될 곳이고 또 내가 그를 위해 살고 목숨을 바칠 
곳이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그때 나로 하여금 당신의 성심에서 흘러내리는 은총을 마시게 하시고,
내 구세주여, 당신은 내 구원의 물을 당신의 샘에서 퍼내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그 샘에서 나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오기를 가장 
원했습니다. 그때 나는 가난과 정결과 순명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당신을 
바라보고는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입히시며 꾸며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감미로운 성심에 도달하여 거기서 내 갈증을 충족시켰을 때에 당신은 
내 영혼의 헐벗음을 입히시고 내 사명을 훌륭히 완수할 수 있도록 세 겹으로 된 옷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 겹의 옷이란 평화와 사랑과 항구심이었습니다.
이 구원의 옷을 입을 때 나에겐 부족함이 조금도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어날 것임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홈에서)

베드로 카니시오의 정력적인 생활은 우리가 삭막하고 단조롭다고 생각한 성인의 생활에 
대한 어떠한 고정 관념도 파괴해 버린다. 베드로는 오늘날 같이 급격한 변화의 시대나 
미래의 충격에서도 영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걸음걸이로 76년간의 생애를 
살았다. 많은 재능을 타고난 그는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킨 성서적인 
인물의 훌륭한 표본이다. 그는 독일에서 일어난 가톨릭 반종교 개혁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일찍이 보니파시오의 업적과 겨룰 정도의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독일의 제2사도’라고 불릴 정도였다.

베드로는 젊었을 때 자신을 게으르다고 비판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게으름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는 19세에 쾰른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 즉시 이냐시오 로욜라의 첫 제자인 베드로 파브르를 만났는데, 
이 사람의 영향은 그가 새로 생긴 예수회에 들어갈 만큼 큰 것이었다.
이때에 벌써 베드로 카니시오는 그가 일생을 두고 계속하게 될 일인 공부, 묵상, 기도, 
저술 등을 실천했다. 1546년에 서품을 받은 다음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와 
성 대 레오 교황의 작품들을 출판하여 곳곳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과 문학적인 경향 이외에 베드로는 사도직에 대한 열성도 지니고 있었다.
가끔 그가 병자들과 죄수들을 방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 만큼 많을 때에도 그러했다.

베드로는 1547년에 트렌트 공의회의 몇몇 회기에 참석했는데 그 회칙들은 그가 후에 
마무리 지어야 했다. 베드로는 메시나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잠깐 동안 강의를 한 다음 
독일 선교를 맡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의 사업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몇 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많은 대학과 신학교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그 시대에 대단히 
필요로 했던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는 교리서를 
썼다.

베드로는 대중 설교가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복음을 선포하는 그의 웅변을 들으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교회는 가득 찼다. 그는 또한 뛰어난 외교 수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싸우고 있는 파벌들 사이를 화해시킴으로써 봉사하기도 했다. 여덟 권의 책으로 된 그의 
편지에서 우리는 삶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사람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주는 말을 발견한다. 
때때로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유례없는 비판의 글을 써 보냈는데 그는 언제나 사랑과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베드로는 70세에 반신불수가 되어 고생했으나 1597년 
12월 2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비서의 도움을 받아 가며 글을 쓰고 설교를 
계속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홈에서)

성 베드로 가니시오 (1521~1597)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베드로 가니시오는 19살에 인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죽을 
때까지 60여 년 간 쉬지 않고 공부하고 일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예수회 사제가 된 
그는 설교자이자 교사였으며 여러 대학을 설립했고, 선교사로서 병자들을 돌보면서도 
저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책으로 여덟 권이나 되는 분량의 편지를 썼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언제 책을 쓰느냐는 질문에 가니시오는 “해야 될 일이 
아무리 많아도,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면 필요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이 옳다. 우리가 도움을 구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신다. 
문제는 도움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오는지 식별하는 데 있다.
홍수가 나자 지붕에 올라가 하느님에게 구해 주시기를 간구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앞에 구명보트와 구조선과 헬리콥터가 왔으나 그는 하느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탈 수가 없노라고 잘라 말하였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그 사람이 하느님에게 가서 
왜 기도했는데도 구해 주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하느님이 대답하셨다. 
“너에게 구명보트와 구조선, 나중에는 헬리콥터까지 보내 주었건만 네가 그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았느냐?” 하느님의 도움을 구할 때 그것이 분명히 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도움이 어떤 형태로 올지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일이 과중하다고 느낄 때 기도하자. 하느님은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까리따스 수녀회 홈에서)

주여, 당신은 그때 나로 하여금 당신의 성심에서 흘러내리는 은총을 마시게 하시고, 
내 구세주여, 당신은 내 구원의 물을 당신의 샘에서 퍼내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그 샘에서 나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오기를 가장 원했습니다. 
그때 나는 가난과 정결과 순명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당신을 바라보고는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입히시며 꾸며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감미로운 성심에 
도달하여 거기서 내 갈증을 충족시켰을 때에 당신은 내 영혼의 헐벗음을 입히시고 
내 사명을 훌륭히 완수할 수 있도록 세 겹으로 된 옷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 겹의 옷이란 평화와 사랑과 항구심이었습니다. 이 구원의 옷을 입을 때 나에겐  
부족함이 조금도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어날 것임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저서에서 

“해야 될 일이 아무리 많아도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면 필요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