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플라톤주의와 플라톤의 사상은 다르다는 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역시 상동함을 밝힘.

플라톤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철인정치나 학교 체육 교육의 나체 교육을 필수로 지지한다는 뜻은 아님.

보통 실재론에 있어서 사용하는 말.


요제프 하이든의 천지창조 오라토리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세기 1장 1 ~ 2절)


모두들 알 것이다. 이 장엄한 서사시의 시작. In principio creavit Deus caelum et terra. Terra autem erat inanis et vacua et tenebrae super faciem abyssi et spiritus Dei ferebatur super aquas.

기록은 (= Scriptura)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은 영이심을, 정신이심을. 영이신 신께서 전무의 심연 위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셨다.

존재 그 자체. 전무의 세계에서 홀로 유로서 존재하시는 분. 그것은 그 분의 초월성을 이야기한다. 물질계의 공허의 위에, 초월계에서 거하시며 물질계를 내려다보신 것.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살덩어리일 따름이니, 나의 영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백이십 년밖에 살지 못한다.” (창세 6, 3)

일찍히 점토에 숨결을 불어넣으시어 인간을 만드신 것의 연장선에서, 하느님의 생명의 영이자 숨은 모두 우리 안에 기거한다. 우리를 진흙과 구분하는 것은 바로 생명. 하느님의 숨이 우리를 떠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점토가 될 뿐.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 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탈 33, 18 ~ 23 : 십계판을 새로 받고 모세가 빛나는 얼굴로 내려오기 전)


얼굴은 무엇인가? 우리는 얼굴의 고유성에 대해 논해야 할 것이다. 얼굴. 각 개인은 무엇인가? 각 개인은 다시는 중복되지 않을 개별자 중의 개별자이다. 그런 개별자의 표상을 무어로 들 것인가? 바로 얼굴이다. 우리는 인식에 있어서 각 개별자의 얼굴을 보고 인식한다. 만약에 갑과 을이 있을 때, 우리는 두 사람을 얼굴로 보고 갑이 갑임과 을이 을임을 알지만, 여기서 얼굴을 서로 바꾼다면, 얼굴은 갑이나 몸은 을인, 또 얼굴은 을이나 몸은 갑인 꼴이지만 결국 외면적으로는 갑과 을이 바뀐 것이다. 몸만 보고 개별자를 구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께서는 얼굴을 볼 수 없다 하신다. 무한자의 유한의 구속받지 아니함이자 무한자의 모든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당신 무한자의 무한됨은 이 전에 계시된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탈 3, 4 ~ 6 : 불타는 떨기나무)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께서는 나타나신다.
무릇 불타는 것은 재가 되어야 하거늘, 그 나무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난다.
물질계를 초월한 현존을 증명한다.

모세는 신을 벗어야 했다. 거룩한 땅에서는 왜 신을 벗어야 하는가?

신은 우리 외부의 것. 하느님이 계신 초월계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외부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표징인가? 모르는 일이다.

어쨋거나 스스로를 정의하신다. 세 성조의 주님으로.

모세는 묻는다. 대탈출의 임무에 앞서 당신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이에 응하시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탈 3, 14) 

말장난인가? 초등학생들이 할법한 말장난이다. 너가 뭔데? 하면 나, 나는 나지 뭐야 식으로 되치는 꼴이다.

그러나 나는 나다라는 말은 동일률 그 자체이다. A는 A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A는 '있는' 이기에 존재한다. 

세종대왕을 정의해보자. 조선시대 제 4대 왕, 남자, 한글문자의 창제자, 육식 애호가, 조선초기의 황금기를 이끈 군주, 정복군주, 수많은 인재들을 거느린 군주, ... 더 나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창 2, 19 ~ 20ㄱ)


누군가는 사과를 사과라 부르고, Apple이라 부르고, Apfel이라 부르고, Malus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다양한 호칭은 인간의 편의가 가미되어있지만, 전적으로 사과됨을 향한 길이다. 사과의 사과성, 혹은 사과됨이 여러 명칭으로 불릴 뿐.

그렇다면 사과의 이름 이전에 우리는 사과의 사과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과됨의 물질적, 언어적 표상으로 사과라는 이름은 기능한다.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각 개별자의 무한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과됨을 온전히 몰라도 사과됨을 알고 지칭한다. 

사과는 사과의 각 개별자적 특성을, 드러나던 드러나지 않던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별자적 특성을 모두 알아야만 사과의 사과임을 알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과는 사과로 있을 뿐이고, 우리는 그것의 모든 속성을 통칭할 뿐이다. 개념, 속성, 등 모든 것이 말이다.


이름은 인간을 만나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한다.

모든 인간은, 결코 다시는 중복될 수 없는, 특별한 개별자이다. 홍길동은 홍길동 생전에 없었으며, 사후에도 없고 또 없을 것이며, 생애 중에도 홀로이다. 그 특별하고도 고유한 개별자만의 고유한 명칭으로 이름은 인간에게 기능한다. 홍길동의 신체적, 물리적 특징, 심리적 특징, 생애, 부모의 계보, 자손의 계보, 모든 것이 총망라된 개념의 집합체로서의 홍길동. 우리가 개별자의 특징을 먼저 알아야 이름을 쓸 수 있다면, 세종대왕이 어떤 일을 했던간에, 내가 정복군주의 특징만을 알고 있다면 내가 말하고 사용하는 세종대왕은 철저히 정복군주의 면모만이 존재하고, 이외의 면모는 제거되고 무시된다. 또는, 세종대왕의 정복군주의 특징과 한글문자 창제자의 특징만을 안다면, 내가 사용하는 세종대왕은 철저히 육식애호가 등등의 속성은 무시되고 제거된다.

이 경우, 우리는 세종대왕을 온전히 지칭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세종대왕의 드러나지 않은 특성 또한 세종대왕의 특성이고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복군주로서의 세종은... 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오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있는 나다." "Ego sum qui Ego sum (= Ego (sum) qui sum. I am who I am)"

예흐예 아셰르 예흐예로 발음한다는 이 구절. 나는 무엇이다 무엇이다를 넘어선 나는 나다. 오로지 존재 자체로밖에 정의되지 않는다. 적어도 이름이란, 이름 밖의 영역과는 배타적이다. 홍길동은 성춘향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있는 나다. 나는 곧 나됨이다. 지극히 당연한 존재자이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 나는 무엇인가? 이름이 계시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탈 3, 14)

존재하는 나 가 곧 이름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어느 것이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다.'는 명제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간다. 하느님의 무한성이 계시된다. 이는 개인에게도 드러난다. 우리의 무한성은 육체라는 유한성 안에 가능성의 형태로 무한성으로 드러난다. 무한한 선이 유한 물질계에 내려옴에는 무한의 포기가 선행된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큰 배려를 하신다.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탈 3, 15)

모든 것이신 분께서 스스로 모든 것됨을 내려놓고 이 네글자, 신성사문자 아래 예속되기를 택한다.

예수의 육화가 미리 드러난다. 모든 것임이 모든 것임을 버리고, 문자인 이름에 예속되어 그 이름임과 그 이름이 아님이라는 경계로 넘어온다.


하느님의 초월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진영에 있던 백성이 모두 떨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 그때 시나이 산은 온통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님께서 불 속에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 뿔 나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세가 말씀을 아뢰자, 하느님께서 우렛소리로 대답하셨다. 주님께서는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갔다. (탈 19, 16 ~ 19)

온 백성은 우렛소리와 불길과 뿔 나팔 소리와 연기에 싸인 산을 보고 있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떨면서 멀찍이 서 있었다. ... 백성은 멀찍이 서 있었고, 모세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먹구름 쪽으로 가까이 갔다. (탈 20, 18,21)


주님의 영광이 다시 한번 가지계에 내려오시었다. 흘러넘치는 무한함 그 자체께서. 짙은 구름 속에서, 유한함은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함 앞에 진동하며 굉음을 동반한다. 모세가 아뢰자, 하느님께서 답하신다. 우레 소리가 광야에 퍼져나간다. 그러나 우렛소리를 알아듣는 이는 모세 뿐,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제약하고 제약하면서 까지 유한계에 내려오셨지만, 그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우렛소리였다. 익숙지 않은가?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 (요 12, 27 ~ 30. 예루살렘 입성)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우렛소리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서. 진리는 우리가 섯불리 다가가거나 이해할 수 없는 '그 너머'에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요한 18, 36 ~ 38)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당신은 어디서 왔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요한 19, 9 ~ 11)


직접 우리 밖의 정신적 세계를 인자께서 직접 언급하신다. 진리에 속한 자, 주님의 영을 받은 자는 진리를 듣는다. "주님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니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담겨 있다. (2사무 23, 2)" 길이요 진리요 생명께서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를 듣노라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를 반문한다. 답은 없다.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듣기 때문이니 (마르 4, 9).


가지계 외부의 무한초월계. 하느님이 거하는 곳. 태초의 영이 있는 곳. 낙원. 하느님 나라. 등

전체이자 무한이신 분. 모든 이치를 스스로 안에 품고 계시고 또 그 모든 이치들을 가지계에 흘려보내시는 분.


결국 나는 이 때문에 플라톤주의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

개념이나 의미의 플라톤주의 (바벨탑을 보라. 모든 언어를 섞어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언어는 하나의 시스템에서 흘러나왔다는 점이 중요하고, 이 시스템은 바로 개념과 의미이다.), 실재의 플라톤주의 (수많은 실재), 수와 수학법칙의 플라톤주의, 무한의 긍정, 영의 존재.

유한은 스스로를 근거지을 수 없다.

무한이 있기에 유한이 존재한다.

무한이 스스로를 제약함이 있기에 유한이 존재한다.

전진(眞), 전선(善), 전미(美)의 끝봉우리. 진선미의 최고봉 (모 정치인의 이름이 저래서 검색하거나 할 때 좀 짜증나긴 한다.)

그로부터의 부분적 분유.

생명은 생명에서 나오지, 생명의 부재에서 나오지 않고
아름다움 역시 아름다움의 부재에서 나오지 않는다
선 역시 악에서 나오지 않고
빛은 어둠서 나오지 않는다.

빛은 어둠을 내쫓지만 어둠이 빛을 내쫓지는 못한다.

찰나는 영원에서 나오고

생성소멸도 영원에서 나온다.


우리 위의 영원에서.

그리고 나는 플라톤주의에 입각해 공부를 하니까 머리가 자꾸 빠진다.

탈모는 실존하지 않고 머리카락의 결핍 Capillorum damnum est Defectus Capilli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