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많은 설들이 있다. 더러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 말한다. 더러는 그것이 아주 악하다고 말한다. 또 더러는 그것이 그저 기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피조물로서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원조들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우리는 이 결함을, 너무도 선명한, 죄로 향하는 결함을 떠안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 피조물들에게 이런 결함을 주셨는가?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죄로 향할 수밖에 없게 하셨는가? 애초부터 당신 뜻대로 움직이도록, 그렇게 선한 존재로 인간을 지을 수는 없으셨다는 말인가?


성경은 하느님의 세상 창조의 목적을, ‘당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창조한 세상을, ‘당신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더라고도 말한다. 당신 모상대로 창조한 인간과 교감하고, 또 이 인간들이 당신과의 실존적 관계 속에서 당신의 뜻을 따를 때, 창조주의 사랑뿐 아니라 창조주의 영광이 가장 크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이 죄의 유혹을 마다하고 자신의 의지로 하느님을 섬기겠노라고 결심할 때, 우리가 그 자유로운 결단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할 때,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영혼의 구석에 새겨두신 당신의 이름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미사 때마다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간청한다. 자비는 라틴어로 Misericordia, 곧, ‘불쌍하게 여기는(Misereri)’ 마음(Cor)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그 슬픔과 연민 속에 우러나는 사랑이다. 아담이 처음으로 죄를 짓고 하느님 곁을 떠났을 때, 성경에는 단호하고 완고한 하느님의 모습만이 나온다. 그러나 아담을 꾸짖으시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의 가슴 한켠은 무척이나 쓰라렸을 것이다. 죄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넘어가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내려보내셨다.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십자가형을 보며 눈물을 흘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금요일에 십자가 경배를 하면서,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영화를 보면서, 또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마치 우리 가슴이 창에 꿰찔리는 듯 아파오는 체험을 하곤 한다. 이것이 무엇 때문일까? 예수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닐까? 너무도 비천하게 살다 너무도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저주와 모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십자 나무에 매달려 돌아가신 우리의 구세주를 보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이 너무 불쌍하다!”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비탄과 연민 속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랑이고, 자비(Misericordia)이다.


옛날 중국의 맹자는 ‘측은지심’을 가르쳤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지고 태어나는 마음이라는 것이요, 최고의 가치인 ‘인(仁)’의 단서이다. 이 측은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야 사람이라고 했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그 곤궁의 늪에서 함께 빠져나가기 위하여 서로를 견인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떠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열십자 형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하느님 자비(Misericordia)의 크신 표상이요, 선물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당신께서 그러셨듯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씀인 것이다. ‘나만 불쌍하다’가 아니라, ‘우리는 불쌍한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서로를 눈물로 위로해주고 돕는 세상. 자기연민보다 남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아무 흠이 없이 태어났다면, 그저 하느님의 말씀을 로봇처럼 따르며 살았다면, 남을 바라보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하느님을 우리 의지로,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당키나 했을까? 하느님께서도 그런 세상을 바라지 않으셨을 것이다. 더러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하느님께서는 미리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무정한 분이시라고도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자의로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중심주의적이고, 신성모독적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천사들처럼 하느님을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하느님 편에 서는 것과, 죄악의 유혹을 달고 사는 존재들이 그것을 뿌리치고 하느님과 교감하고 그분을 찾는 것 중 무엇이 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일까? 선택받은 자들 외의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것에는 무관심한, 심지어 진노를 퍼부으시기까지 하는 하느님과, 모든 인간의 죄악과 타락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 고통받으시는 하느님 중 어떤 것이 더욱 신성모독적이고 어떤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훼손하고 가리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