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깨달음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 밝힘)

이거를 쓸 까 말 까 하는데 점점 머릿속에서 잊혀져 가는걸 보아하니 일단 글로 옳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학기는 무언가 조금 다른 느낌의 힘듦이다

귀찮은 삶 안에서 수동적인 철학을 하며 삶의 발자국들을 내딛는데, 고통과 악의 문제에 예기치 못하게 부딫혔다.

사실 대단한 문제 아니다. 심신이원론을 주장하고 싶을 정도로 몸이 마음을 따르지 않을 뿐이었다.

당위함에 대한 무위는 분명 악이다. 이를 잘 앎에도 불구하고 실행이 안된다. 

나는 존재와 존재자의 실존에 대한 탐구를 안 할 수 없었다.

왜 나는 이리 게으른가?

그냥 내가 모자라서 로 퉁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보다는 성의있는 답변을, 설령 메시지가 같더라도 어느정도 정돈되고 포장된 답변이 필요했다.


악, 선의 결핍이다. 좋다. 받아들인다. 딱히 이견은 없다. 성 아퀴나스에 의하면, 악은 우유적인 것으로 그 실체성이 부정된다. 악은 존재하지만, 악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선의 결핍으로 부족한 만큼 선에 기생하여 존재하는 꼴이다.


근데 어쨋거나 악은 존재한다. 당장 과제를 두고, 800p나 되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을 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안하고 있다. 악이다. 망할 양반 왜 이리 책이 두꺼워.


나 자신의 부족함은 순순히 인정한다. 부정할 생각 없다. 그것이 우리가 실로 인간으로 남게 해주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신이겠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Malum est defectus boni, 악은 선의 결핍. 악을 다루자니 삶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악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참 고단하게 산다. 낙원에서 쫓겨나 가죽옷을 입고 땅을 일구며 살아간다. 가난을 본의 아니게 실천하며 살아간다. 개인 삶 안에서 개인 존재자의 부족함들이 여럿 드러난다. 


나의 앎을 최대한 끌어모은다. 하라는 학교 공부는 안하고 이딴 짓만 한다. 끌어모은다. 고대적 사고부터 현대적 사고 까지, 끌어모은다. 플라톤의 전통 아래 하이데거 까지, 끌어온다. 


나의 삶을 짧게 반추해본다. 이번 학기 나의 발표과제는 헤겔의 양심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리고 해당 부분에는, 선악과 설화가 다뤄지고 있었다. 헤겔은 창세기의 설화를 통해 신기한 해석을 제시한다. 정신의 본질은 최초의 원초적 통일 상태에서, 상처를 입으며 그 원초적 자연 상태가 분열되며, 그것이 다시 재통일, 회복하는 것이 그 본질이랬다. 순수한 첫 인간은 자연적이었고, 선악과를 취함으로 하느님과의 단절이 일어나며, 그 전의 자연적인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서로의 나체를 깨닫는) 그러나 이 상태는 계속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통일을 이루며 화해가 이뤄진다고 한다. 인간은 쭉 분열된 상태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신과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헤겔은 이 타죄신화를 인간 정신 혹은 본성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이라 보았고 인간 일반을 아담에 대입하여 인간 본성을 사건으로 서술한 것, 하나의 실존적 모델을 제시하는 설화로 제시했다.


썩 동의하지는 않는다. 우선 공부를 하며 발표를 하는데, 토론이라 해봐야 전부 문자주의적 오류에 빠진 대화가 오간다. 아니, 아까 전에 아브라함이 야곱을 바치는 것은 그럴 생각 없는 시험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면서 이거는 또 왜 거기에서 제외인것인지. 나는 그러한 문자주의에 대한 배척을 기반으로 약한 변신론을 제기했다. 그것은 설화이다. 인간 존재와 그 본성에 대한 통찰이 담긴 설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Felix culpa 같은 개소리를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후에, 스스로에 대해, 또 인간 일반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소크라테스로부터 내려오는 희랍 전통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수용하여 확장한다. 내면의 신. 우리 마음의 무한함. 정신의 무한함. 우리의 정신은 무한하다. 그러나 그것은 유한한 육체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정신은 육체를 통해 외부에 기능한다. 요즘은 육체가 말을 안 들어 심신 이원론이 맞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둘 다 실체지만 모두 정신에서 나온 것이니. 이에 든 생각. 무한한 정신과 유한한 육체에 관한 문제, 즉 정신 신체 문제는 심리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신나게 두들겨 패며 진행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것은 신비로운 것이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신비, 생성된 신비이다. 유한과 무한이 하나로 종합된 것. 정신과 육체가 그 결합을 이루어 낸 것이 그 신비이다.


인간은 생성된 신비이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비이다. 그렇다면 '나'는 논해질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없어도 논해야만 하는 것인가? 신이 신비이듯 우리도 신비이다. 그러나 나는 당장 나를 짓누르는 악에 대한 답을 찾진 못했다.


악. 결핍. 구멍. 구멍이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구멍은 구멍날 대상이 전제된다. 구멍은 구멍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무나, 옷, 창문, 무엇이던 기생할 대상이 전제된다. 그러나 그런 주제에, 구멍은, 전체를 짓누른다. 실체도 없는 우유적인 것 주제에, 나머지 전체를 짓누른다.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예전에 내가 주로 하던 말이 있다. 고통 없이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다. 막상 그 고통의 대상이 내가 되니 좀 어지럽다. 예수의 부활도 고통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고 난 말했다. 그 부활의 영광조차도 고통과 죽음이 전제된 것이다.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여러 밀알로 자라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5년전 읽은 헤겔의 철학적 성금요일에 대한 통찰이 새롭게 느껴진다. 


악은 이렇게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는 유한자로, 악에 짓눌린다. 무한의 일부를 점거할 뿐인데. 이 부분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존재성은, 인간 존재는 바로 그 유한성임을. 당연한 말이지만 새롭게 다가온다. 이윽고 나는 정의내렸다. 인간 존재의 표상은 바로 고대 희랍 신화 아틀라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시지프스와는 다른 느낌이다. 시지프스는 그 돌을 깨부수거나 안하고 도망이라도 갈 시도라도 할 수 있지, (물론 복수의 여신들이 가만 안두겠지만) 아틀라스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안한다고 하늘을 집어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아틀라스가 들쳐메고 있는 거대한 하늘, 곧 하나의 인간 실존의 표상이다. 결함적 존재의 존재성의 당연함에 대한 결함의 억압, 역으로 결함은 전체가 있기에 존재하고 결함은 결함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결함을 죽을 때 까지 버텨내야 한다. 하늘을 포기하면 곧 스스로도 깔려죽는다. 살기 위해서라도 하늘을 버텨야 한다. 


삶의 거대함 앞에 홀로 마주친 인간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 아무리 많은 인간을 동원하더라도 그 거대한 삶의 위압은 닿을 수도 없는 하늘과도 같다.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강하하는 삶의 활로와 수많은 연관들이 우연적으로 필연적으로 얽히고 설키어 인간 앞에 각자 고유하고 독자적으로 나타난다.
같은 하늘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하늘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의 삶은 그 하늘을 마주하며 끌어안는 것이고 그렇기에 인간 삶의 실존에 대한 표상은 바로 고대 희랍 신화인 아틀라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늘을 떠받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을 찾을 수 있다.


인간 일반에 대한 통찰을 마쳤다. 그러면 인간 일반의 존재하는 과정인 삶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이냐, 무한과 유한이 오묘하게 결합된 신비로다.
삶이란 무엇이냐, 존재자의 존재지음이로다.
존재란 무엇이냐, 있음이로다.

인생은 그러면 사람의 존재, 사람의 있음이렸다.
그러니 인생은 그 자체로 신비이며 이해할 수도 없고 개개인 마다 다르기에 섯불리 논할 수 없는 것이로다.
인간 실존의 이야기, 신비의 실존, 가능성의 신비, 신비가 고유성을 띠어가는 과정, 하나의 고유한 신비이다.


인간 일반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신비라면, 인간 삶은 고유한 신비이다. 그러므로 삶은, 삶으로만 정의되는, 동일률으로만 정의되는,

그런 무한한 것으로 제시된다.


삶은 무엇으로도 서술되지 않는다. 삶 즉 삶이다.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설명될 수 없기에, 삶은 하느님이다. 

그러나 온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아까 전에 다루었듯, 삶은 고유성을 띤다. "위에서 아래로 강하하는 삶의 활로와 수많은 연관들이 우연적으로 필연적으로 얽히고 설키어 인간 앞에 각자 고유하고 독자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곧 인간이다. 

모든 것은 신비이다. 우리는 무한에 있어서 혼동을 한다. 인간은 유한자인 동시에 무한자이지만, 하느님은 쌍방으로 무한자인, 영원자이다. 무한은 시작점이 있는 무한도 있고, 종말점이 있는 무한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가능세계들이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1분1초의 작은 손짓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가능세계들이 제쳐지고 현실세계가 뻗어나간다. 라이프니츠가 그랬다. 신은 수많은 가능세계들 중에서 최선을 선택한다고. 신의 행함은 곧 최선이다. 


그리고 "악은 허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니 악이 허용되었다니. 성 아퀴나스는 악에 있어서 악은 결핍이기 때문에 선이 생겨난 동시에 존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선이 생겨나면서 같이 우유적으로 생겨났지만 그것의 탓이 하느님께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근데 악이 허용되었다니? 의외로 생소한 개념은 아니다. 창세기를 펼쳐보면 하느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기에 앞서 아브라함에게 이민족들의 악이 다 차지 않았다는 표현을 한다. 또한 대홍수에 앞서서, 이 세상에 악이 가득 찼다는 표현이 나온다. 탈출기로 넘어간다. 탈출기에서 히브리인들의 원성이 하느님 어전에 들릴 정도로 가득 차자 모세를 보내어 세상에 개입하신다. 그리고 악이 가득 찬 고대근동을 히브리인들이 정복하게 한다. 하느님의 행동은 늘 악이 가득 찼을 때 이루어진다. 예언자들의 파견도 비슷한 맥락이다. 신약으로 넘어가자. 복음서와 묵시록 역시 악이 가득 찼을 때의 하느님의 개입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악에서'도' 하느님은 선을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론이 나온다. 하느님은 악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이 발출되면서 악이 우유적으로 생겨났는데 그러한 우유성을 하느님은 어느 수준까지 용납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 어느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놀랍게도(?) 나의 게으름 역시 용납된 것이다. 


근데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되곤 한다. 아니 전선인데 왜 악을 용인하냐? 애초에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전선한 세계를 만들면 그만 아니냐? 전능성에 문제가 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지만 다뤄보았다. 그러한 세계는 유한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 무한계나 영원계에서나 존재한다. 이른바 천국, 낙원이다. 근데 그 낙원은 아쉽게도 유한계에서는 구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한계를 존재지을 때, 그러한 결핍들이 있다는 점이 인정된다. 악을 논하는데 있어서 자연재해도 논해진다. 자연재해에 의한 인명피해 재산피해 등. 그런 걸 들고와서 왜 악이 발생하냐고 묻는다. 그러한 것들은 유한자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또 다른 유한자일 뿐이고 우리가 그 경로에 있던 것 뿐이다. 태풍이나 지진이 사라지면 세상이 자연재해에서 자유로울까? 적어도 지진은 몰라도 태풍은 그 역할이 있다. 우리가 그 우연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 뿐이다. 자연재해 끌고와서 악이 어쩌구 하는 것은 좀 ... 뭐랄까 적절해보이진 않았다.

뭐, 그래도 얘기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악을 온전히 정의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결핍일 뿐. 결국 고통 역시 첫 인간부터 함께 해온 것이다. 

...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인간의 본질은 곧 고통의 대면이다. 악과 고통을 대면하지 않고서는 인간일 수 없다. 그 고통 역시 수없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고통 역시 신비이다. 고통의 신비이다. 묵주를 돌리며 고통의 신비를 바칠 적에 왜 고통의 신비, 왜 고통이 신비인가 생각해본 적이 있나? 예수의 인생이 왜 신비로 제시되고 왜 각 신비마다 테마가 있는지 생각이라도 해봤는가?


예수의 삶 조차도 앞서 다뤘듯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만의 고유한 신비 안에서 드러나는 테마들이 있기에 우리는 OO의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일반에 있어서 고통은 왜 신비인가? 신은 하고자 하면 이룰 수 있다. 창세기에서 그 모습이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하지 못한다. 시간과, 노력과, 고통을 투자해야 한다. "고통"을 투자해야 인간은 무언가를 취한다. 앞서 제시했듯 고통 없이는 그 무엇도 없다. 피할 수 없고, 짊어져 가야하지만 무엇인지는 모르는, 그러기에 고통은 신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고통이다.(짊어진다는 개념에서)


고통의 이유나 근원 따위 그것에의 탐구는 무용함이 세계에 드러났다. 그냥 고통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그저 솔직하게 모른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악인들이 제 맘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성 아퀴나스의 비유에 의하면, 불륜도 선이다. 다만 거기에는 추악함이라는 악이 딸려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들이 제 맘대로 사는 것, 선이다. 거기에는 더러움이라는 악이 딸려나오는 것일 뿐.

헤겔도 이 부분을 지적한다. 양심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고. 양심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개개인의 가치관과 주관에 지배받는 양심이 어떻게 객관적인가. 물론 양심은 2가지 뜻이 있다. 전선한 마음, 그리고 개개인의 사유. 이 두 가지를 모두 수용한다. 그저 개개인의 사유적 가치적 판단에 불과한 양심은 형식적 양심. 그러나 그 개인의 선 추구가 보편선과 일치할 경우 그 양심은 절대적 양심이 된다고.

악인들에 있어서 그 선이 부럽다면 그 추악함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 추악함을 감당하기 싫으면 부러워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선 추구에 있어서 악은 언제나 딸려나온다면, 우린 그 악을 지성을 통해 최소화하는 것이 맞다. 설령, 과제를 빨리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선을 다해 빨리 끝내는 것이 선임을 우리는 안다. 다만 더 큰 선을 위해, 낮잠을 조금 자서 몸을 충전하여 더 좋은 일률을 뽑아내는 것 역시 선이다. 낮잠이라는 의도된 게으름인 악을 통해 더 큰 선을 취하는 것이다. 


새옹지마의 속담에서는 낙마한 아들이 징병되지 않는 이야기가 나온다. 낙마라는 악을 통해서 징병되지 않음이라는 선이 얻어진다. 악은 이렇게 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를 모른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에서야 날개를 펼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기본적으로 다 논해지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창세기 안에서 다 논해진다. 예전에는 신명기를 좋아했는데, 창세기가 더 큰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창세기는 인간 일반과 하느님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서사적 설화인 것이다. 


창세기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면, 욥기이다. 개인적으로 욥기에 대한 태도가 개개인이 가톨릭을 '깊고 진지하게' 수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린다고 생각한다. 욥기도 고통이 신비임을 드러낸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욥기는 고통의 책이다. 욥기를 읽고 신앙이 흔들리네 뭐하네 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하거나 신앙을 받아들이기 힘든 혹은 없는 사람들이다. 


사실 욥기까지 가지 않아도 창세기 차원에서 다 다루는 내용들이다. 창세기를 위시한 오경에서 전부 다뤄지는 내용들이다.

우리가 다시 한번 복음서를 잠시 내려놓고 오경을, 그리고 오경을 위시한 구약을 탐독해야 하는 이유이다.

쭉 돌아보다가 깨달았다.
발표과제에 선악과가 있던 것도, 과제에 변신론이 있던 이유도, 내가 논술수업을 청강하며 자유주제로 아퀴나스를 고른 것도, 다 그 분이 함께 하면서 당신께 더 한발짝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지성으로 당신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허락하고 도와주신 것임을 돌아서야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들 신앙 안에서의 기쁨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 기쁨을 알게 된다면, 남부러울 것 없다.

그 기쁨을 알고 모르고도 생각해보니, 하느님께 달려있는 문제더라. 그런 초월적인 기쁨을 체험하는 날이 다들 오길 바란다.


우리는 땅 위에서는 무엇이 다가오던 간에 최선을 다해 살고, 우리의 영역 밖의 것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요청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땅 위의 존재적 실존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초월적 실존은 하느님에게 달려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