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제, 세상의 추악한 악들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거기에 하염없이 빨려들어가며
악의 문제가 그 순간부터 우리를 쇠사슬로 감아서 저 바닷속 깊이 연자매라도 매단거 마냥 떨어지게 만들고 우리의 인간성을 해치곤 해
이것은 비단 나의 말이 아닌, 우울증 대처 방법이기도 해.
극단화와 부정적인 것들이 쉽게 떠오르고 가감없는 욕설과 혐오표현의 인터넷 커뮤, 그리고 뉴스.
뉴스는 어지간해서 선행이 보도되지 않지
연말연초나 되어야 익명기부자 뉴스 정도 뜨지
결국 악의 문제가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리 옭아매고 괴롭게 만드냐,
수많은 지성인들이 4세기 이후로 탐구해온 결과 악에 대해 여러 설명을 내놓지만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악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구멍, 즉 선의 결핍임.
그리고 인간은 결핍자라는 점에서 인간은 늘 악을 이고 사는 존재임.
악은, 하나의 구멍임.
구멍이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나?
아니, 절대 아님.
구멍은 전체가 있어야, 옷이나 벽, 도로 등의 전체가 있어야 그 존재가 있는 존재라고.
기본적으로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거임
악은 실체가 아닌 하나의 accident적, 유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으로 제시가 됨.
우리가 악에 집중할 수록 악에 빨려들어가고 거기에 매몰되는 이유?
아주 간단함.
그것은 하나의 구멍이기 때문임.
내가 계속 구멍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데,
구멍에 빠져서 서서히 거기에 잠식되가는거임 개미지옥이나 수렁 마냥.
그러면서 우리는 점차 악만 바라보게 되고 미치게 됨
근데 세상의 선은 당연한듯 누리며 산단 말이지
우리는 이 선을 재조명할 줄 알아야 함
악을 외면하지 말란 소리가 아니야
결국 악은, 선의 결핍이다 그 이상으로 논해질 수 없는 거야.
유한 세계에서 유한존재자가 유한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 한계로서 악이 작용하기 때문에 악은 필연하나 동원되지는 않는다 부가적으로 따라올 뿐이다 는 관점임
얼마나 썼으면 저게 자동완성으로 튀어나오냐
악은,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의지의 오남용, 더 작은 선을 추구함으로 벌어진 일.
여기에는 인간의 결함된 판단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최선을 지향해야 하는데 인간이 스스로 그러지 않음으로 그 책임이 인간에게 돌아간다는 소리.
판사의 오판은 신의 탓이 아닌 판사의 탓
부당한 연결고리를 결부지으면 안된다는 소리
흄도 놀라서 자빠질 소리임
결국 우리는 그 선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옴.
결국 악에 대한 탐구는 무용함이 세상에 드러났고 악 역시 그러함에 신비로 남는다.
그리고 하느님은 악을 일정 허용할 뿐, 마지막 그 순간에 임계치에 다한 악에 대해 전폭적 개입을 할 뿐.
유한계에 거주하는 이상, 악은 허용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악들 마주하면 정말 분노가 오르고 그렇지
세상이 얼마나 추악하냐
그러나 악이 신께로 온게 아닌만큼 그 책임은 인간 개개인에게 돌아갈 것이며,
고통당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내세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을 깨끗이 만들어 저런 악들을 최소화시키는게 우리의 일
빛과 소금이 되라한 말씀을 우리는 들었으니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세상의 것은 세상에게.
그러나 세상 조차 하느님의 것이기에 세상을 우리가 하느님처럼은 아니여도 유한한 한계 아래서 최선의 깨끗함을 추구하고 살아가며 우리의 주번을 선한 표양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악을 대면하는 우리의 삶의 이정표
창세기는 결국 신이 악에 짓눌리는 인간에게 역사하는 이야기
욥기에서 그 절정을 찍는 그 이야기
하느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탓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우리의 영역 안에서 최선 다해 살 뿐
결국 하느님도 사람 통해 세계에 역사하시기 때문 하느님의 도구가 되길 바라는 그 마음이 여기서 오는 것
이전에 쓴 우리는 소망적 사고를 버리고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
우리가 무한을 깨닫고 무한을 포용하고 인정하는 순간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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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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