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수도권과 강원에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음. 


북한 쪽에서 적성국인 중국 국적의 여객기가 무단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 

민항기일지라도 당시 중국 비행기는 사실상의 적기였음. 


특히 중국과 한국은 1953년 휴전 이후 단 한번도 접촉해 본 적이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사실 이 비행기는 심양에서 상해로 갈 예정인 중국민항 여객기였는데, 6명의 납치범들이 대만 망명을 꿈꾸며 비행기를 납치한 것이었음. 

이들은 조종실 문을 강제로 부스고 승무원 2명의 다리에 총을 쏘는 만행을 저지름. 


기장은 몰래 비행기를 돌려 평양 순안국제공항으로 운항하였고, ‘여기가 서울이니 착륙합시다‘라고 했으나 납치범들은 그곳이 평양임을 알아채고 재차 협박하여 평양 착륙은 실패함. 


결국 기장은 당시 미수교국이자 적성국인 대한민국의 영공에 진입해버렸음. 한국에서는 공습경보가 울리고 난리가 났음. 


관제소에서는 청주공항 착륙을 지시했으나, 연료가 없던 중국 여객기 기장은 무작정 당시 미군 소속이던 춘천 캠프페이지에 착륙했음. 





서울 관광을 즐기는 중국 승객들 ㄷㄷ



대한민국은 이 기회를 절호의 찬스로 활용했음.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미국과 수교하며 죽의 장막이 걷어지고 있었으나, 강력한 반공을 국시로 했고 전쟁 당사국이었던만큼 중국과 소통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음. 


그전에 20년간 중국 군항기가 한국으로 귀순한 일이 6차례나 있었음에도 중국은 대한민국의 송환 의사를 아예 씹고 있었음. 중국은 유독 한국에 박하게 굴었고, 결국 한국은 오히려 소련과의 물밑 접촉에 훨씬 적극적이었음.


한국은 이 기회에 베이징과 접촉하고자 했고, 그 사이에 여객기 사람들에게 자연농원(에버랜드) 구경, 삼겹살 대접, 전자제품 공장 견학을 시키며 한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심어주는 체제선전에 나섰음. 


이것은 생각보다 큰 효과를 가져왔는데, 당시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은 평양에서 발간한 선전물 뿐이었기에 ‘한성(서울)은 전기도 없이 거지들이 우굴거리는 자본주의 마굴’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 


하지만 이 이미지가 무너졌으며, 특히 당시 비행기를 이용할 정도의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목격한 것은 중국에서 큰 파장을 일으킴. 




중국은 이례적으로 이 사건에 적극 나섰음. 후일담에 의하면 승객 중에 중국의 1급비밀을 가진 유도탄 학자가 탑승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음. 


중국은 

1.남조선과 직접교섭

2. 미국이나 일본을 통한 간접교섭

3. 국제민항기구를 통한 간접교섭


세 개를 고려했으나 직접교섭을 택했음. 하지만 한국과 연락할 수단이 아예 전무했는데, 

민항총국 국제부 부국장이 이전 싱가포르에서 열린 2차 아태지역 항공회의에서 대한민국 교통부 교통국장 김철용의 명함을 받은 것이 확인되어 그 연락처를 토대로 서울에 연락을 함. 


한국도 중국 접촉은 처음인지라 굉장히 바쁘게 실무자들을 구성했음. 




두 국가는 대표의 급, 국호 및 위상 문제로 처음에 마찰을 겪었음.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를 평양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인정하던 중국은 이 문제를 까다로워했으나 주도권은 서울이 갖고 있었음.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골머리를 앓음. 


결국 양국의 회담장에는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모두 등장했고, 외교문서에는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로 등재되었음. 이 문서는 한국전쟁 휴전 문서 이후 양국이 주고받은 최초의 문서임. 


그리고 승객들은 모두 중국으로 돌아감. 





이 회담으로 한국과 중국의 외교적 접촉이 시작되었음. 


1986년 나카소네 일본 총리가 한중을 중재하여 수교를 맺게 하려고 했으나 당시 평양의 눈치를 본 중국이 바로 수교하지는 못했음 


하지만 중국은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공산국가 중 유일하게 출전하고, 88올림픽때도 얼굴을 보이며 양국의 관계는 확실히 진전을 보였고 1992년 대한민국이 대만과 단교, 중국과 수교를 선언하며 공식 국교가 수립되었음. 




납치범들의 모습. 


대만으로 가려던 납치범 6명은 한국에서 5-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년 후에 인도적 조치로 타이베이로 추방됨. 


국제질서에 따라 비행기 납치범을 처벌은 해야 하고, 반공 분위기에 따라 이들을 배려해야 했을 한국의 중재적인 방안이었음. 


여섯명은 대만에서 ‘6의사’로 불리우며 막대한 환대와 정착금을 받았음. 


세 명은 그럭저럭 사업과 직장인으로 평범하게 살았으나

두명은 결혼 후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투자 실패로 자산 탕진, 유괴살인을 자행하여 사형당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