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마을

1954년 오무마을 항공사진/출처 국토지리정보원 항공사진/문제시삭제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 오무마을

신라시대 수비부곡 고은현->울진군->영양현->영해부->영양현->영양군

오무마을의 지명

오무(梧茂) 마을 마을을 산능선이 한번 감싸고 있다. 지명고시에는 오무의 무가 茂로 나와있다. 영양국제밤하늘보호공원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오산(梧山) 산 마을 앞에 있는 산. 이 산 둘레로 밭이 있고 마을이 있다.

장수포천(長水浦川, 수하계곡) 마을 동쪽에 흐른다.


지지조서의 오무마을

수하동(水下洞)으로 오무마을은 찾아볼 수 없다. 수하동 인구 969명

하천은 장수포(長水浦), 본면에서 동북으로 흐름이라 함.

오무마을 당제 당고사


지명조사철의 오무마을

오산동(梧山洞, 오산(梧山), 수하동) 인구 15/92


오무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 암벽 아래에 동제당이 있다.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옭겨졌다는 동제당은 시멘트로 만든 제단에 입석을 세우고 한지로 덮어 흰 실로 감아두었다. 덩제는 복인을 제외한 깨끗한 남자 2명을 제관으로 정하여 음력 동짓달 10일 저녁 6~9시쯤애 지낸다. 당일 새벽 제관 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에 뿌리며 그 금줄을 가져다 동제당에 친다. 제물로는 백편, 과일. 어물, 미역국, 송이버섯 등을 쓰며 동제에 딸린위토는 동회에서 정한 다음 해 제관이 경작한다.


출처 영양군지 하(2020)


오무마을 지명유래

장수포천 하류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주위에 오동나무가 무성하고 산의 모양이 아름다워 오산9梧山)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오무는 '오목하다'의 의미로 추정할 수 있으며 마을의 형태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오무는 다시 '오미'로 소리가 변하였으며, '미'는 우리말에서 '뫼(山)'가 동일하게 사용되므로 한자로 정착할 때 의미를 좋게 하고자 벽오동나무 '오(梧)'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영양군지 상(2020)



오무마을은 약 300년전에 흥해배씨가 개척한 마을로서 장수포천 하류에 자리잡은 따뜻한 마을인데 옛날 이 마을 주위에는 오동나무가 무성하고 산의 모양이 아름다웠다 한다. 냇물이 맑고 골이 깊어 고기가 많으니 지금도 오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우리말로 오무는 우묵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바 골이 깊고 우묵한 것을 이르는데 뒤에 오동나무와 걸림을 두어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고 더 이상 나아갈수 없는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http://www.suhaecotour.com/bbs/content.php?co_id=m1_4


오무마을은 골이 깊고 우묵한 산골짝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오지인 ‘깊고 깊은 경상도 영양 골짜기’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간다.  

  

행정 구역으로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  

  

예부터 나라에 큰 난리가 날 때마다 사람들이 숨어 들었다는 이 마을에 다다르는 길은 오늘날도 여전히 고단하다. 영양 군청에서 100리 가량 떨어진 오무마을. 수비면에서 하루 세 번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송방마을까지 간다. 다시 계곡을 따라 비포장길을 지프차로 20여분을 가야만 마을 어귀에 다다를 수 있다. 대중 교통편이 없는 비포장 길은 4륜 구동형 지프형 자동차를 이용한다. 그래야 얕은 하천을 건너며 이동할 수 있다. 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에는 그나마도 고립되기 일쑤다. 그러나 여기서도 끝은 아니다. 다시 마을 어귀에서 절경의 수하계곡 구절양장을 몇 굽이 돌아야 비로소 주민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다.


오무 마을에는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그 중 다섯 집이 배씨이고, 한 집은 박씨다. 배상복(76)씨는 약 300여 년 전 난리를 피해 들어온 조상의 30대 후손이라고 전한다. 손자 손녀, 아들 내외 3대가 함께 살고 있는 박용덕(73)씨 부부도 외갓집이 이곳에 있어 오게 되었다니 외지인으로 볼 수 없다. 주민은 노인 13명에 청년 3명, 아기 3명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참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얹은 굴피집이 40여호 정도 있었으나 70년대 새마을운동 때 함석지붕과 슬레이트로 교체되었다. 지금은 굴피집이 한 채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채인 ‘굴피 헛간채’도 지은 지 35년이 넘어 몇 해 전에 허물어져 내렸다.  

  

경북 울진 평해면 온정리에서 150리 길을 걸어와 혼례를 올렸다는 손분금(76) 할머니. 시집 와서 장날이면 울진까지 100리길을 가기 위해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야만 했다고 한다. 감이라도 내다 팔아야 식량과 바꿔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에 잔뜩 이고 가서 사라는 말도 못하고 기다리다가 밤 9시가 넘어 돌아오곤 했다고 회상한다. “고생스러워도 도망갈 데도 없었다니깐. 도망갈 수가 있나? 고랑이 콱 막혀서. 어찌 살았나 몰라….”  

 

오무 마을로 가는 도중에 있는 수하리 비지미골도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맑기가 거울 같은 계곡물을 쳐다 보고 있노라면 기울어진 초가집 한 채가 그림을 드리운다. 뒷산에는 방목한 건강한 흑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금실 좋은 동갑내기 노부부는 저녁을 짓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배경의 이 초가집은 200여년이 넘었음직하다.  


  

오무는 산골마을이지만 젊은이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다른 농촌에 비해 활력이 넘친다. 인근 송방마을 젊은이들과 5년 전 작목반을 만든 덕분이다. 달팽이 무공해 농법으로 쌀농사를 짓고 산채와 더덕을 재배해 적잖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박성철(40)씨는 앞으로 오염되지 않은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마을 발전에 활력을 불어 넣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최근 청정수역에서만 볼 수 있는 천연기념물 수달이나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오지 탐험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반딧불이천문대와 청소년수련관은 가족 단위로 찾는 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물 흐르는 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새벽.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운무(雲霧)가 서서히 걷히자 계곡 마을의 비경이 드러난다. 눈 앞에 펼쳐지는 무채색의 산수화…. 고요함과 청량함에 마음과 몸이 깨끗해진다. 오무마을에서 아침을 맞는 사람의 행복이자 튿권이다


2007 https://m.seoul.co.kr/news/2007/05/09/20070509026003



명경지수는 계곡을 따라 흐른다. 바람은 냉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영양군내 대부분 하천들은 반변천 지류로 낙동강으로 흐른다. 그러나 유독 장수포천 만은 북동쪽으로 길을 내 불영계곡을 거쳐 울진 왕피천과 합류한다.  

  

왕피에서 일어난 바람은 수비면 수하리에 이르면 더욱 드세진다.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고추따기에 바쁜 아낙네들의 손놀림이 가볍다.  

  

여름이 익는 소릴 들으며 오무마을을 찾아간다. 오무까지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버스는 송방에서 멈춘다. 지난해 태풍때 허리가 잘린 길이 한창 새롭게 단장되고 있다. 오무로 가려면 반딧불이공원 심천에서 급조된 계곡길을 따라 2㎞ 더 내려가야 한다. 수비면소재지에서는 50여길이다. 길이 나기 전에는 면 직원들이 오무까지 출장가려면 이틀씩이나 걸렸다고 한다.


  

  

송방에서 오무까지 내려오는 동안 바짓부리를 서너차례 걷어 올린다. 길이 없는 오무는 장마철이면 산 속의 섬마을이 된다. 면사무소에서 도랑에 흄관이라도 묻어 놓은 덕택에 피서객들은 오무까지 내려와 여름사냥을 즐긴다. 아이들은 개헤엄치고 어른들도 덩달아 동심으로 돌아간다.


  

  

은어, 피라미, 꺽지 등의 무리가 물 속에서 장관이다. 사발무지에 잡힌 고기들은 매운탕이 돼 피서객들의 입맛을 돋운다. 계곡으로 내려갈수록 바윗돌이 윤기가 난다. 흐르는 물에 몸통의 때를 말끔히 닦아낸 탓이다.  

  

수십구비를 돌아 오무마을에 도착했다. 독산을 둘러싸고 경사를 이루는 마을에 8가구가 흩어져 있다.  

  

‘오무’라는 말은 우묵하다는 뜻. 이름처럼 오무에는 예부터 골이 깊고 고기가 많았다. 마을 주변 산에는 오동나무가 많아 ‘오산(梧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마을에는 ‘거무방우’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 굴이 있어 곰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곰’이란 발음이 약해지면서 ‘오무’로 변해 이 마을 이름이 오무가 되었다는 속설도 있다.


  

  

장수포천이 길을 막는 바람에 오무의 자연은 그대로 천연이다. 마을 앞에 있는 산은 홀로 있다고 해서 ‘독산’이라 불린다. 사람들은 독산을 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긴다.  

  

오무는 본래 수하리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공수골, 깨밭골서본동, 내앞, 뿔밭, 새터, 솔비, 오무, 지푸내 등 여러 자연마을이 됐다. 그 중 오무마을이 최고의 오지다.


  

  

오무에는 30년 전 40여가구가 있었다. 그때는 모두 굴피집이었는데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함석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됐다.  

  

“마을이랄 게 뭐 있어?”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배상복씨(72)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입향시조가 300여년 전 난리를 피해 들어왔다. 덩굴을 걷어내고 땅을 파니 좋은 흙이 나와 명당으로 알고 지금까지 3대를 이어 살고 있다고 배씨는 말했다. 일곱집이 배씨이고 박씨가 한집이다. 배씨들은 사촌, 오촌 멀게는 십촌이다.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박용덕씨(68)네는 그래서 왠지 모르게 외롭다고 한다. 그래도 박씨는 배씨의 외손이다.  

  

독산에는 입향시조의 묘소가 있어 후손들이 300여년을 내려오면서 제사를 모신다.  

  

그는 “감나무가 있는 곳은 모두가 집터였다”고 손가락으로 이곳 저곳을 가리켰다. 오무에는 감나무가 지천에 널렸다.  

  

오무 사람들은 담배·고추·천궁 농사를 짓는다. 토질이 비옥해 밭농사는 매년 풍년이었는데 올해는 채소값이 떨어져 농사를 망친 사람도 있다.  

  

“장마와 폭설 등 기상이변이 심해 이곳 생활이 어려워 떠나야 한다고 마음먹으면서도 가진 것 없는 처지로 어쩔 수 있나. 죽을 때까지 가꿔온 텃밭에서 농사나 짓는거지. 그렇다고 누가 우리네 입장을 알아주기나 하나….” 박용덕씨는 교통불편으로 생필품과 농필품 구입이 어렵다고 하소연이다. 차라리 장수포천댐이 건설돼 보상금을 받아 마을을 떠났으면 하는 눈치다.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올 담배농사가 그런대로 잘 됐다며 박씨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북부지역개발촉진지구인가 뭔가 하며 읍내와 왕피리간 도로를 닦더니 댐을 막는다며 몇년째 중단됐지.” 열아홉에 시집온 박씨의 부인 김씨(60)는 길이 없어 살아온 고생담을 걸쭉한 입담으로 이야기했다. 송방에서 오무까지는 산기슭으로 소로(小路)가 나 있어 10여년 전까지 등짐을 지고 다녔다. 요즘은 힘센 트럭이 하천을 따라 다니지만 비가 오면 길이 끊겨 이마저 어려울 때가 많단다.  

  

읍내에서 고추값 6천원일 때도 이 곳에서는 5천원에 팔린다. 잎담배 판매를 낼 때도 수송비가 많이 들어 이중고를 겪는다. 마을 사람들은 길만 난다면야 물 맑고 공기 좋은 오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일이 세상 부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는 100수를 넘긴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숨을 거둘 때까지 병원 신세를 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환자가 있더라도 길이 없어 병원행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지금도 일흔을 넘긴 노인들이 마을에서는 청년이다. 몇집 안되지만 경운기와 트랙터까지 구입해 농사를 짓고 있다. 집이래야 볼품 없는 초가에 슬레이트만 올려 놓았을 뿐이고 부엌에는 가마솥이 걸렸다. 소도 한지붕 밑에서 함께 살아간다.  

  

인기척에 배재욱씨(66)가 맨발로 마당에 나온다. 여름휴가차 찾아왔던 딸부부와 손녀들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며 서운해 한다. 좀더 있었으면 하는 눈치다.  

  

담배농사로 자식 모두 출가시켰다는 배씨는 20대에는 곶감을 수비 장에 내다팔아 용돈을 보탰다.  

  

독산이 숨겨주는 마을, 피난처로 이곳만한 곳이 없는 듯했다. 6·25때 인민군이 산을 따라 내려왔을 때 15세이던 배씨는 “인민군이 신기해 따라다니며 구경했다”고 웃는다.  

  

박옥녀씨(68) 댁에는 7남매가 찾아왔다. 출가한 딸들과 사위들이 여름휴가차 온 것이다. 손자·손녀들의 재롱을 지켜보던 박씨는 “영감이 무엇이 바빠 그리 빨리 갔나”하며 이태전에 돌아간 남편을 애석해 했다. 혼자 살고 있는 박씨에게는 이 며칠이 1년중 가장 행복한 날 같아 보였다.  

  

오무마을을 굽이흐르는 장수포천의 물줄기는 가지각색의 모양의 바위들을 만들어냈다. 메기, 꺽지, 뱀장어, 은어 등 각종 민물어류의 천국이다.


  

  

여름철만 되면 울진지역에서 꺽지, 뱀장어, 은어를 잡으려는 많은 조사들이 찾아와 낚시를 즐긴다. 하천 주변에는 산딸기, 머루, 다래넝쿨이 우거져 먹거리가 지천에 가득하다. 농사일에 바쁜 틈을 타 주민들은 봄에는 산나물를 채취해 팔고 가을에는 송이버섯을 채취한다.  

  

300년전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처음으로 찾아왔던 오무마을. 몇 안되는 주민들은 조상들이 그래왔듯이 욕심없이 고향을 지키면서 살아간다.


2003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030818.00000014.000390#google_vignette


길은 인적이 없어 적막감마저 감돈다. 영양군 수비면을 출발해, 북동 쪽으로 뻗어 울진 왕피천에 합류하는 장수포천을 따라 올라가기를 한참. 반딧불이 생태체험마을과 수하청소년수련원이 나타났다. 하지만 목적지인 오무마을로 가는 이정표는 아직 보이지않는다.


청소년수련원에 들어가 길을 묻기로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김강규(48) 담당이 마침 있어 반갑게 맞아준다. 대충 설명은 들었지만 영 찾아갈 자신이 없다. 어쩌랴! 김씨를 반강제로 승용차에 태웠다.


"대체 그 골짜기에는 왜 갑니까." "글쎄, 그냥 골짜기니까 가보자는 거지."


다시 한참을 가다보니 산딸기가 온 숲을 벌겋게 물들인 마을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 곳은 오무가 아니다. 송방(소나무가 많아 생긴 이름) 마을이란다.


"오무는 여기에서도 3km는 더 가야 됩니다. 계곡을 궁(弓)자로 몇 번은 건너야 해요.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차를 세워두고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산길을 따라 걸으면서 김씨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장수포천이 교통의 오지로 만들고 독산이 세상과 단절시켜 놓은 곳. 오무에서 처음 만난 집은 박용득(70)씨네였다. 박씨는 송방마을에 잎담배 수확하러 나가 없었고 아들 성철(38)씨가 마당에서 여물을 작두로 자르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성철씨는 안동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사회생활을 하다 8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부친과 함께 잎담배·고추·벼농사 1만 평을 짓고 있다.


성철씨와 농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분명 아기 울음소리였다. 이 첩첩산중에!


"5년 전 결혼했는데 이제 첫 아들을 얻었어요. 생후 7개월됐지요."


수하리가 고향인 부인 이옥이(38)씨가 낳은 세원이는 이 마을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3년만의 '탄생'이었기 때문. 마을 여기 저기 거의 허물어진 채 버려져있는 빈집들이 새삼 우리 농촌의 현실을 깨닫게 한다.


잠시 후 성철씨가 이종사촌인 배영석(48) 반장 집으로 안내했다. 배씨는 아직 총각이어서 19살 때 울진군 왕피리에서 시집와 55년째 살고 있는 어머니 임춘하(74)씨와 단 둘이서 지내고 있다.


"반장이면 뭐 하니껴, 손주는 커녕 장가도 못 들었는데. 좋은 며느리감 혹시 아는데 없니껴."


임씨의 아들 걱정이 태산이다.


현재 오무에는 여섯 집이 산다. 그 중 다섯 집이 배씨 가족이고 한 집만 박씨 가족이다. 유일한 타성씨인 박용득씨도 사실은 외갓집이 이 곳에 있어 어릴 때 들어오게 되었단다. 그러니 이 곳에서는 위, 아래, 옆집이 모두 친척이다.


사실 오랜 옛날부터 오무는 환난을 피할 피난지로 일컬어져 왔다. 마을의 배씨들도 약 300년 전 난리를 피해 들어온 조상의 30대 후손들이라고 한다.


어느새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좋은 곳에 산다며 인사를 건네자 불만이 터져나온다. "좋은게 뭐니껴. 나이 많은 사람만 사는데. 워낙 구석진 '고랑탱이'라 차도 안다니고. 젊은애들은 마캉 객지에 나가 농사 지을 할 사람도 없구마. 우예 살겠노."


오무에는 수십년 전만 해도 30여호에 160명 정도 살았다고 한다. 당시 집은 모두 굴피(나무껍질)집이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함석·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다.


배재욱(67)·김분선(62)씨 부부가 "옛날 굴피집은 비가 새고 겨울이면 추워서 엄청 고생했다"고 하자 "임춘하 할머니가 "박정희 할바이(대통령) 살았을 때 지붕을 개량해줘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도 박정희 할바이가 너무 고맙다"고 거든다.


남편 배재선(71)씨와 함께 온 김숙녀(72) 할머니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처음 시집왔을 때는 말도 못할 정도였다"며 "명절에 혼자 디딜방아를 찧어 제사상 차리는 동안 신랑은 마을만 다녔다"고 눈을 샐쭉 흘긴다.


맛깔스런 김치와 풋고추를 곁들인 푸짐한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주민들의 하소연은 계속 이어졌다. 청정환경이 좋다며 찾아오는 관광객들에 대한 성토였다.


"물가에 와서 노는 것까지야 괜찮아요. 길이고 강가고 쓰레기 마구 버리고 가면 그건 누가 치우니껴. 우리는 일손이 모자라 하루종일 죽도록 일하는데....."


다음날 아침. 작별인사를 해야하는데 주민들은 아직 전해줄 이야기가 더 많은 눈치다. "도로가 닦이면 다니기가 더 좋을텐데...."


속시원하게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위로의 말을 또 건네기도 힘든 상황. 선물이라며 약간의 용돈을 넣은 봉투를 배영석 반장에게 부끄럽게 전하고 은근슬쩍 일어섰다. 주민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동안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세원이 동생, 세원이 사촌도 어서 태어나고 오무에 좋은 일만 생겼으면....."

2005 https://m.imaeil.com/page/view/2005073009431276903




https://youtu.be/uOKvhDlVFFk?si=Fq5eFlu5bd4EzwUI



https://youtu.be/jzQXkAXaOa8?si=vZNCk3ckHFkTyaF0






https://youtu.be/YqMfin6GJiQ?si=t3UodkLZZH62ElNv



https://youtu.be/e5IPuqN0r5c?si=lvrBXKj2QwED-Y8l



https://youtu.be/oQpjv3qjgo0?si=rYo_zwmSvaIaFCR6



https://youtu.be/doDSa8oWxWE?si=IjqMflooQRExO81q



https://youtu.be/d14kt-9_d98?si=jKdWf-Z6_ZOTDVFD



https://youtu.be/qp5LTmcBOtI?si=WCYWdPdC_Tkmh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