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이 고도화되고, 혁명의 방향은 일반 노동대중과 평범한 집안 출신의 홍위병들이 당중앙 고위간부들을 공격하는 형태로 전개되어갔음. 


1967년 1월, 상하이 목화농장의 간부 왕훙원은 ‘공청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상하이시 인민정부와 당을 비판하고 혁명을 이루어여 한다고 주장했음. 


사태가 심각해지자 상하이시 정부는 이들을 불인정하였고, 베이징의 당중앙에서는 ‘교통을 유지하고 도시의 경제활동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질서 있는 혁명을 하라’고 지시했지만 통하지 않았음. 





마오쩌둥이 이들을 지지하며 

결국 상하이시 인민정부와 당은 붕괴되었고, 공청단이 세운 ‘상하이 코뮌’이 들어서게 됨.


인민일보 등 사설에서는 ‘파리 코뮌 이후 가장 위대한 코뮌 설립 혁명’이라고 칭송했음. 찐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기존 정부를 붕괴시켰으니 과거 프랑스의 사례를 따 코뮌이라 이름지었지. 




상하이시 당 서기였던 천비셴의 인민재판 모습. 


상하이시의 주요 간부들은 조리돌림을 당하며 비판당했음. 




하지만 마오쩌둥은 ‘코뮌? 그러면 당중앙과 정부는 무슨 존재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며 코뮌설립을 크게 질책하였음. 코뮌이 당중앙과 국가를 아예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임. 


결국 코뮌은 ‘상하이시 혁명위원회’로 변경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존의 당과 지방정부가 붕괴하고 혁명위원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남. 인민해방군도 이를 막을 수 없었음. 


노동자들이 상하이시 당과 정부를 붕괴시킨 초유의 사건은 문혁의 광풍을 더욱 강화시키고 중국 전역의 행정이 마비되는 결과를 가져옴. 



상하이시 혁명위원회는 문혁이 끝난 1970년대 중반 정상화되었으며

1979년에는 해체되고 상하이시 인민정부와 당이 재건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