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령 교주만, 독어로 Kiautschou(키아우초우)라고 불렸던 이곳은 본래 어촌이였으나, 프로이센 왕국이 1860년 교주만 일대를 조사하며 청과의 무역협정을 맺고 리히트호펜이 중국을 조사하며 이곳을 이상적인 항구로서 추천하였다.


그 후 30여년이 지나 독일 동양함대의 사령관인 티르피츠 제독은 이곳을 개인적으로 조사하며 아직까지 다른 열강의 손이 닿지 않았던 산동반도에 주목했다.


그리고 산동성에서 독일인 선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산동반도의 선교사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교주만 점령을 명했고, 이후 동양함대에 의해 점령되고 독청조약이 맺어지면서 교주만은 99년간 조차된다.


이후 교주만에는 칭다오라고 명명된 항구 도시가 건설되었고, 이곳은 독일 함대의 모항이자 독일 해군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장소라는 중요성으로 인해 해군성에 소속되었다.


키아우초우는 모범적인 식민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1914년 일본의 침공으로 인해 결국 함락당했으며, 이후 일본이 21개조 요구를 통해 교주만을 영유하였고, 산동 문제로 인해 결국 1922년 중국에 반환되었으나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으로 인해 일본이 다시 점령했으며, 이후 1945년까지 일본이 지배하다 중화민국이 탈환하였고, 국공내전 당시에는 최후의 보루로서 버텼으나 결국 1949년 중공에게 점령된다.


이후 교주만의 칭다오에는 독일이 남긴 유산들이 남아있었고, 그중 칭다오 맥주가 특산품으로서 유명하며, 와인산지로 손꼽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