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하이웨이는 본래 조차되기 이전에는 청나라 북양함대의 기지였다. 1895년에는 일본군과 청나라군 사이에 웨이하이 전투가 있었고, 일본군은 1898년까지 웨이하이웨이에 머물렀다.

한편 1898년에 러시아가 반대편 해안에 위치한 뤼순을 조차지로 삼자 영국은 러시아가 뤼순에 머무는 것을 조건으로 웨이하이를 조차했고, 영국은 이곳을 웨이하이웨이로 부르며 오늘날의 웨이하이시인 포트 에드워드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뤼순 항을 넘겨받자 영국은 일본이 뤼순에 머무는 것을 조건으로 조차지를 유지했다.

그리하여 웨이하이웨이는 영국이 1898년부터 1930년까지 불리는 영토의 일부가 됐던 것이다.

조차 후 영국은 류쿵다오에 해군기지를 건설했고, 이곳을 영국 왕립해군 극동함대의 하계 주둔지로 삼았다.

조차 당시 웨이하이웨이의 총독은 영국 왕립해군의 장교였고, 이후 영국이 웨이하이웨이를 요새화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웨이하이웨이는 군에서 전쟁사무국으로 이관되었고, 시민이 총독으로 선발됐다.

이후 1930년에 웨이하이웨이는 중국으로 반환되고 특별행정구로 삼았으나, 류쿵타오는 1940년까지 영국이 영유하고 있었다.

한편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1938년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했고, 1940년에는 류쿵타오에 상륙해 점령했다.

이후 1945년 중국은 웨이하이웨이를 수복했으며 동년 5월 산동성에 편입했으나, 1949년 중공이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하고 웨이하이로 개명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