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프로이센과 메멜란트(클라이페다)지역 지도

Memelland, 메멜란트(독일어)

Klaipėda, 클라이페다(리투아니아어)


  *1차 세계대전 종전과 베르사유 조약까지

메멜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의 동프로이센주의 일부였고,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자유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메멜 지역의 상황은 리투아니아계가 다수였으나 그것과 별개로 리투아니아계 독일인들은 독일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데다가 리투아니아 본토는 카톨릭, 메멜은 루터교회로 종교도 차이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41.9%가 독일계, 27.1%가 독일화된 리투아니아계, 26.6%가 리투아니아계였다. 그런 이유로 메멜은 리투아니아와의 통합을 바라지 않았으나, 리투아니아는 메멜을 회복해야할 영토로 간주하였다. 독일계 리투아니아인들은 소수라는 불안에 메멜 자유주(Freistaat Memelland)를 수립한 후 자르(Saargebiet)처럼 독일에 반환되기를 시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유제프 피우스트스키의 폴란드는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의 일부가 될 지역으로 보아, 리투아니아의 메멜 편입을 통해 발트해로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려 하였고,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의 지지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국제 연맹에 의해 메멜 강(네만 강) 이북의 영토는 프로이센에서 분리되어 프랑스의 관리 하(정확히는 국제연맹의 Council of Ambassadors의 관리)로 이전되었고, 1920년 'Territoire de Memel'로서 지정되었다.

  * 1923년 클라이페다 봉기(Klaipėda Revolt)

1923년 1월 9일, 리투아니아는 프랑스 관할 하의 메멜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자국도 독일의 루르를 점령하고 있었고, 리투아니아의 진입에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1월 19일 메멜은 클라이페다로서 리투아니아에 합병되었고, 1924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1924 클라이페다 협정과 자치

1924년 5월 8일 파리에서 서명된 클라이페다 협정으로 클라이페다 지역은 무조건적인 리투아니아의 주권과 동시에 자치를 보장하게 되었다. 클라이페다는 자체적 의회, 세금, 2개의 공용어, 법원, 관세, 농업, 문화, 종교, 시민권, 사회보안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발트해에서의 부동항을 얻게 되었으며, 항만의 재개발은 전간기 중요한 국가 주도 사업이었다. 이전에도 리투아니아는 팔랑가(Palanga)지역 해안선을 라트비아로부터 넘겨받아 가지고 있었으나, 항만 기능을 제대로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어느 국가에 속할지 택할 수 없었으며, 국민투표도 불가능했다. 앞서 말했듯이 리투아니아어 화자들 역시 동프로이센 사람으로 스스로 생각했으며 또한 클라이페다 사람이라는 독자적 정체성 또한 있었다. 전간기 모든 선거에서 친독일 정당이 80% 이상 득표했으며, '리투아나아 국가'로의 통합을 원하지 않았다. 1927년 클라이페다만의 교회회의가 설립되기도 했다. 반면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들을 재리투아니화될 독일화된 리투아니아인으로 간주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반발은 종교적 차이에서 부터 심화되었고 독일도의 재통합 운동도 전개되었다. 리투아니아 정부의 리투아니아화 또한 진행되었으나 더 큰 반발을 가져왔다.

  *1926 쿠데타& 안타나스 스메토나의 군부독재

1926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군부 독재 체제가 되자, 클라이페다는 '민주주의의 오아시스'가 되었다. 리투아니아 본토인들은 자유로운 결혼을 위해서나 민주주의 활동을 위해서 클라이페다로 이동하였고 클라이페다는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안타나스 스메토나의 '심기를 건들었'고, 이전보다 더 강한 리투아니아화가 추진되었다. 독일/독일-리투아니아계 교사, 공무원, 성직자들이 해직되고,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주지사(Governor)가 임명되지 않았다. 이들의 빈자리는 리투아니아 본토인들을 '식민'함으로써 채웠다. 이에 반발하여 리투아니아의 주권을 부정하는 시도가 1934년 있었으나 해체되었다.

  *나치 독일의 최후통첩과 클라이페다 반환

1930년대 초반, 리투아니아 정부는 친나치 정치인들을 테러 범죄 혐의로 재판하였고, 이는 나치 독일의 반발을 불러왔다. 나치 독일의 정치/경제적 압박으로 이들은 나중에 풀려나게 된다.

1939년 3월 23일,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의 구두로 통보된 최후통첩의 내용은 "리투아니아는 메멜을 독일에 반환하는 대신 99년간의 항구 자유 이용이 가능하다"라는 것이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메멜은 독일에 재통합되었다. 거주민들은 이를 환영하였다. 이후 빠르게 메멜은 군항으로 요새화되었다.

조약상 거주민들은 국적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를 선택한 가정은 303가구 585명이었으나 받아들여진 것은 20건에 불과하다. 또한 리투아니아 통치 기간 동안의 이민자들은 돌아가도록 조약에 명시되었다. 1300명의 리투아니아/독일-리투아니아 유대인들과 20명의 독일-리투아니아인들이 추방되기도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리투아니아로의 재통합

2차 세계대전 말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에 진입하자 민족 구성에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이 위험에 처했고, 군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서쪽으로 피난했다, 1945년 1월까지 이어진 메멜 전투 이후, 도시에는 6명밖에 남지 않았다.

종전 이후, 클라이페다는 리투아니아 SSR의 일부가 되었고, 1950년까지 8000명이 동독으로 추방되었다. 독일-리투아니아어 이중화자는 독일인으로 간주되었다. 1958년 이주가 허가된 뒤, 남아있던 독일-리투아니아계는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전쟁 이전 독일 정당에 반대하던 지역 유명인들의 가족들은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다. 이들의 빈자리는 리투아니아인들이 채우게 되었다.

 클라이페다가 리투아니아에 반환되었음에도 현재까지 이 지역의 자치는 시행된 적이 없다.


*현존 국가 말고 국기지도 만들만한 국가/지역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