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처우완 식민지는 1897년 프랑스 해군의 바야르함이 우연히 청나라 광둥 성의 레이저우 반도 동쪽 아래에 있는 바다로 들어갔는데 이곳이 상당히 깊은 양항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이후 1899년 이곳을 점령하고 청나라와 광저우만 조계 조약을 체결하며 99년간 조차를 결정하며 쾅처우완을 공식적으로 인도차이나 연방에 추가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이후 쾅처우완의 중심부에 바야르 요새를 쌓고 영국 홍콩에 대응하는 대중국 무역과 투자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쾅처우완은 발전해왔다.


이후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해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프랑스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와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정부로 분열됐고, 중화민국은 자유 프랑스 망명 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쾅처우완은 자유 프랑스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은 1943년 비시 정부 사이에 ‘광저우만 공동 방위 협의’를 체결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고 쾅처우완을 일본-프랑스 공동 관리 하에 두었다. 


자유 프랑스 정부와 중요 항구와 해안가 대부분을 빼앗긴 중화민국 정부는 이에 관여할 수 없었고, 1945년 8월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하자 프랑스 정부는 즉시 쾅처우완을 중화민국에 반환했으며, 중국은 이곳을 잔장 시로 개칭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