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개전 당일

북괴 제2군단(제2사단, 제12사단, 제15사단)은 춘천 방향으로 진격해왔다.


사실 전쟁의 조짐은 그 전에도 보였다고 전해진다.

당해 6월 23일, 현재는 춘천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남북을 연결하는 다리 모진교에서

노인 하나가 다리의 지뢰를 밟고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괴군은 춘천을 격파, 인제-홍천방향으로의 진격을 수월하게 진행하야

경기도 방면의 아군을 포위섬멸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아군 6사단에서는 춘천의 7연대, 홍천의 2연대, 원주의 예비대 19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6월 11일 김종오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 적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각 주둔지 경계를 강화하였다.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군은 사북면 인람리와 지암리 방면의 전초기지를 시작으로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춘천의 38선은 원평리-송암리-고성리를 관통하는 형태라서 신포리는 공산치하의 지역이었다.)

압도적인 기갑전력과 수적우세를 바탕으로, 1개 연대의 주둔지였던 춘천에는 북괴 2사단이 진격해왔다.


한편, 춘천분지의 북쪽으로의 통로는 모진강(북한강)을 따라 나 있는 신포리 방향, 소양강을 따라 나 있는 내평리 방향이었는데,

이 중 내평리 방향으로는 소양댐 건설 이전 북산면의 중심이었던 내평리의 내평지서가 홀로 서 있었다.


강원도 비상경비사령관 윤명운 경무관은 경찰들에게 위치사수 명령을 내렸고,

6월 26일 전초기지를 박살낸 북괴군은 본격적으로 춘천 방면으로 진군해왔다.

내평지서에는 12명의 경찰관과 3명의 대한청년단 단원들이 있었고,

내평리 방면으로는 북한군 3천여 명이 진군해왔다.


이들은 적의 진군을 1시간 가량의 교전으로 끌었고, 북괴군 정규병력 20여 명의 사상이라는 전과를 거둔다.

이후 북괴군은 82mm 박격포를 대거 동원한 뒤에야 내평지서를 점령할 수 있었고, 춘천 침공은 3시간 이상 지연되었다.


이 전투로 노종해 경감, 설창길 · 김석진 경위, 심윤흠 · 최성환 · 최인철 · 배영섭 · 김삼봉 · 이봉춘 경사가 전사하였고,

6사단의 7연대 2대대는 콧구멍다리라 불리는 현재 세월교 부근 원진나루 남쪽에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이 방어선은 북괴군의 소양강 방면으로의 진격을 방어함으로서 적군이 춘천을 빠르게 피탈하는 것을 막게 되었고,

이로써 한강 남쪽을 점령하여 아군을 포위섬멸하려든 북괴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 전투를 춘천 내평 전투 혹은 내평지서 전투라고 부르며, 현재 소양강댐 아래에 춘천내평전투 호국경찰추모상이 세워져있다.



추모상의 사진이며, 이 옆 윗샘밭 길은 4월 중순 춘천에서 벚꽃이 피면 벚꽃 명소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6.25 사변 70주기 D -1개월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사변의 아픔이 서려있는,

선조들이 피로써 지킨 접경지역에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