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 속까지 지리덕후인 나는 새로운 장소에 가는 걸 좋아하고 그 곳을 구경하는 수준을 넘어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군대에서도 이런 습성이 있었다.

보안사항에 따라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나는 39사단 예하 대대에서 복무했다. 39사단은 경상남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데 후방이다보니 부대가 드물어 대대 하나가 시군 전체를 작계지역으로 삼는다. 이 말인즉슨 시군 곳곳에서 작전훈련을 한다는 소리다. 

주로 산 꼭대기로 출동하는데 남들은 춥다고 덥다고 뛰댕긴다고 싫어했다. 하기야 몇시간 산에 올라가는 고지점령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근데 나는 너무 좋았다. 새로운 곳을 관찰하며 지리적 안목을 늘릴 수 있어서다.

더구나 나는 통신병이라서 중대장과 계속 동행해야해서 다른 병사들은 절대 출입못하는 보호시설에도 나만 출입해봤다. 추가로 육군 타부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해군,공군 막사에도 출입했을 정도다.

소총중대에서 통신병은 통신장비 때문에 군장보다 무겁고 이동거리도 길어 다른 보직보다 빡세다. 그들은 매복해 짱박혀 무한 대기하는게 다였지만 난 아니었다. 내 대기시간은 중대장이 쉴 때 뿐이었다. 힘들어도 대위한테 살살하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리덕후 입장에선 내 보직은 운전병 다음으로 최적의 보직이었다. 여기저기 출동하면서 지형,건물,사람을 파악하는걸 즐겼으니까.

개인다이어리에 출동지의 특성과 느낌을 상세히 적으면 그게 보물이며 지적재산이었다. 그러고 다음 훈련은 어디로 출동할지 한껏 기대하던 나였다. 지금보면 참 변태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