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시 이야기-활동편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본인은 고3때 페임랩이라는 활동을 했었음 별다른게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간단한 리포트를 쓰고 그 리포트의 내용에 대해 5분 정도 발표자료 없이 발표하는 행사였음 발표 시간이 짧아 보고서에는 핵심만 간결하게 집어넣을 수밖에 없어 매우 아쉬웠던 행사 중 하나지만 그래도 이 행사를 계기로 도시행정학과라는 새로운 학과를 추천받기도 했고 수시지원 때 썼던 네장의 자기소개서에도 빠짐없이 들어갔던 만큼 나름대로 의미없는 일은 아니었음 



 

1. 서 론


행정구역이 변화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해 우리는 행정구역의 변화를 잘 체감하지 못한다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정부의 수많은 정책은 행정구역을 변화 시켜 왔는데 그 정책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행정구역을 크게 바꾼 정부의 정책으로는 부군면 통폐합과 도농 통합시 정책 그리고 직할시 제도를 예로 들 수 있다

 

군면 통폐합은 일제 강점기 일제가 조선의 행정구역이 너무 복잡하여 통치하기 힘들다는 명목 아래에 2~3개의 군이나 면을 하나로 합친 정책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행정구역의 기초를 다진 정책이다도농 통합시 정책은 김영삼 정부에서 도농 균형 발전을 위해 실시한 시와 인근의 군들을 합치는 정책으로 이 정책으로 인해 많은 지방 도시들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읍면 지역이 인근의 도시에 편입되었다직할시 제도는 대도시를 정부 관할의 광역자치단체로 두는 제도로 우리가 아는 광역시들이 이 제도로 인해 광역자치단체에 속하게 되었다

 

 이 세 가지 정책으로 인해 행정구역이 크게 바뀐 지역으로는 현재의 평택시와 대전광역시 지역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번 페임랩에서는 이 두 지역이 각각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II. 본 론


2-1. 경기도 평택시


경기도 평택시 지역은 독립운동가 안재홍과 암행어사로 박문수가 탄생한 지역이지만 박문수가 태어날 당시 박문수가 태어난 곳의 행정구역은 진위군이며 안재홍이 태어날 당시 안재홍이 태어난 곳의 행정구역은 수원군으로 둘은 서로 다른 행정구역 내에서 출생했다두 인물의 태어난 행정구역이 다른데 어떻게 우리는 같은 지역 출신이라고할 수 있는 것일까?


암행어사 박문수와 독립운동가 안재홍 둘은 태어날 당시의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평택시에서는 둘 다 평택시에서 태어난 위인이라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 이유는 박문수의 출생지인 진위면 지역과 안재홍의 출생지인 고덕면 지역이 여러 정책에 의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였기 때문이다원래 조선 시기에는 현재의 진위면송탄 평택 시내 지역에는 충청도 진위군이 팽성읍 지역에는 충청도 평택군이 그리고 현재의 서평택 지역에는 경기도 수원군의 남단 일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4년 일제는 앞서 설명한 군면 통폐합을 진행해 진위군평택군수원군 남단을 경기도 진위군이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합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평택군으로 가칭한다이때까지만 해도 평택시 지역의 인구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구역을 세세하게 나눠 관리하는 것보다 하나의 군으로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평택시 지역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군 하나만으로는 관리하기 어려워졌다상황이 이렇게 되니 정부는 인구 밀집 지역을 시로 분리한 뒤 더 많은 자본과 인력을 투자해서 행정관리를 더욱 용이하게 하는 도동 분리 정책을 시행했으며 그 결과 평택군은 각각 평택시와 송탄시평택군으로 분리되었다이는 개도국이던 당시에는 상당히 능률적인 정책이었고 한동안 유지되었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한 이후 평택시송탄시 지역은 큰 규모의 자본과 인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자치단체를 발전 시켜 나갔지만 평택군 지역은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 시와 군의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영삼 정부는 도농 복합시 제도를 시행했고 그 결과 평택군평택시송탄시는 평택시로 합쳐져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2-2. 대전광역시 지역

지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대전은 들어본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대전은 풍부한 교통시설과 첨단 과학 연구 단지들을 두로 전국구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그 위상은 대전광역시를 누구나 아는 도시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백여 년 전만 해도 대전은 충남 공주군 산내면 대전리라는 마을에 불과했다. 그때의 대전리는 지금의 대전광역시와는 다른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며 아마 그 누구도 전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대전이라는 지명을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전 발전의 주역인 대전역



그러나 1904년 이 마을에 대전역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역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대전리는 산내면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동네가 성장함에 따라 대전리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곧 산내면과 산내면을 편입한 회덕군보다 유명해졌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1913년 겨울 조선 총독부는 산내면을 대전면으로 개칭했으며 1914년 앞서 이야기 했던 군면 통폐합이 진행되었을 때 희덕군진잠군 등을 합친 대전군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대전의 승승장구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대전은 그보다 더 발전하기 시작했고 1935년 대전군이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지역을 관리하는 데 부담을 느낀 일제는 대전부를 설치하고 대전부 이외 지역은 대덕군으로 개칭했으며 해방 이후 대전부는 대전시로 승격된다 이후로도 대전은 계속해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충남도청이 있는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보니 계속 성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로 인해 대전시의 시가지는 넓어져만 갔으며 그 범위는 대전시뿐만 아니라 대덕군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광활해졌다. 그러자 대전시와 대덕군으로 행정구역을 따로 관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며 정부는 이 둘을 합치기로 한다하지만 이 둘이 합쳐지면 일반적인 기초자치단체로는 관리하기 힘든 거대도시가 탄생하는 일은 불 보듯 뻔했고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1988년 12월 정부는 대전시와 대덕군을 정부에서 직할하는 광역자치단체 대전직할시로 지정했으며 이에 따라 대덕군과 대전시는 과거의 행정구역으로 남게 되었다.

 

결 론


행정구역의 변화는 수많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며 지금까지 수없이 바뀌어 왔으며 그에 따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해왔다하지만 만악 행정구역이 변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듣고도 그냥 지나친다거나 너무 성급하게 바꿔버린다면 잘못되고 오래된 행정구역으로 인한 피해는 계속될 것이고 그 피해는 막중할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행정구역에 관련된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지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해 다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며 그 해결책에서 발생할 문제는 없는지 꼼꼼히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대전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

다이쇼 2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박물관 문서 중 지도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동리명칭일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