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

- 중국 속담


카자흐스탄.


나같은 카작뽕이 사랑하는 나라.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이자 튀르크계 국가들 중 가장 잘사는 나라.


오늘은 카자흐스탄의 건국 서사를 정리해볼까 한다.


- 알라쉬 임정과 대기근...소련의 가혹한 식민지배



푸틴과 러시아 정부 측에서는 '소련 전에는 카자흐족이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다'는 뉘앙스의 발언들을 수차례 한 적 있었다. 카자흐스탄 정부 측에서는 국가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니 당연히 부정하지만...사실 카자흐인들과 만나보면 본인들도 인정하긴 한다. 또한 역사를 보면 사실 카자흐 칸국이니 하는 것들은 가야급 부족연맹에 불과하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금의 카자흐스탄을 만든 건, 소련의 러시아인들이 아닌, 소련의 카자흐인들 그 자신이라는 것을 러시아놈들은 알았으면 한다. 러시아인들이 현대의 카자흐스탄을 만들었다는 말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발전시켰다 급의 개소리니 말이다.


알라쉬 임시정부와 흐루쇼프 대까지의 카자흐스탄은 비극의 역사이다. 러시아 내전을 틈타 카자흐인들은 독립을 시도했다. 이것이 카자흐스탄 최초의 근대적 정부인 '알라쉬 임시정부'이다. 사실 스탈린 이전까지만 해도 현재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인'과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키르기스인'들은 따로 명확히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단지 중앙아 북부의 '유목민 튀르크계 부족들'을 한데 묶어서 '키르기스족'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당시 '키르기스인'들 중 스텝에 사는 유목민들은 '카라-키르기스인'이라고 불렀는데, 이 카라-키르기스인들 중 '이슬람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지식인들이 세미팔라틴스크(현재의 세메이)에서 세운 나라가 '알라쉬-오르도'였다. 당시 지도자는 전직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제국두마 의원을 지냈던 '알리한 부케이하노프'였다.


알라쉬는 백군, 그 중에서도 멘셰비키 계열와 손을 잡았으나, 1920년 전세가 볼셰비키로 넘어가자 알라쉬 임시정부 당원들은 볼셰비키로 전향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약속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특히 지도자인 부케이하노프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시 러시아SFSR 산하의 키르기스ASSR 설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공산당이 통수를 안 칠리 없었고, 당시 알라쉬의 구성원들을 비롯한 카자흐스탄 내 지식인들과 온건파들은 대숙청 시기 '민족주의자'라는 죄목으로 숙청되어 굴라그에서 잔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기근.


정말이지 20세기 초반 카자흐스탄의 역사는 비극의 연속이다. 수많은 유목민들은 무상으로 전재산인 가축을 내놓고 도시의 공장에서 강제로 일하라는 러시아인들에게 저항했지만, 이 저항이 먹히기는 커녕 더 큰 학살과 숙청으로 공산당은 대답했다. 그리고 집단화에 대한 저항으로 유목민들은 그냥 가지고 있던 가축들을 전부 다 죽이거나 먹어치우는 식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먹을 것이 남지 않게 된 카자흐스탄에서는 약 200만명이 죽고 약 60만명은 먹을 것을 찾아 동투르키스탄으로 도망쳤다. 우크라이나는 유럽과의 거리도 가깝고 '백인'이었기 때문에 서방에서도 많아 취재를 간 인원도 많았지만, 카자흐스탄은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인지 관련 사진자료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카자흐족의 40%가 사라졌다. 정주민족인 우즈베크족에겐 대기근이 없었고, 그 결과 현재까지도 우즈베키스탄의 인구는 카자흐스탄보다 거의 3배 가까이 많다.



- 카자흐스탄의 별, 카자흐 민족의 할아버지, 딘무하메드 쿠나예프 제1서기



대략 20세기 시작에서 반세기가 지나갈 무렵까지,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에 복속된 이후부터 대략 200년 넘게 사실상 '러시아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제국 시절은 물론이고, 소련에 들어와서도 사실상의 식민지배가 이어졌다. 지방 서기장은 모두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러시아인들이 도맡았고, 카자흐인들은 그냥 러시아인들이 시키는 걸 하면 되는 거이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적어도 그쪽은 차별은 안 당했다. 러시아와 같은 민족인 그들은 소련 내내 러시아인과 동급 취급을 받았다. 카자흐인은 2등 민족이고, 피지배 민족이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 최초의 실권있는 서기장, 카자흐스탄 최초의 카자흐인 서기장, 딘무하메드 쿠나예프는 1960년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오른다.


유목민의 아들으로 공산당에 입당하여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간 쿠나예프는, 1946년 대조국전쟁 때 카자흐인의 기여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카자흐인으로서 카자흐SSR 장관회의 부의장직에 올랐으며, 스탈린의 사망 이후인 1955년 카자흐SSR 장관회의 의장직에 올랐다. 이 당시 카자흐SSR 공산당 제2서기->제1서기가 브레즈네프였고, 둘은 같이 일하며 친분을 쌓았다.


1960년 쿠나예프는 능력을 인정받아(라고 쓰고 처녀지 개간사업을 찬양해) 흐루쇼프에 의해 카자흐SSR 공산당 제1서기 직에 올랐다. 그러나 1962년 쿠나예프는 제1서기 직에서 해임되었는데, 중앙정부에서 제2도시였던 쉼켄트 지역을 우즈베크SSR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쿠나예프는 이것을 거부하고 홧김에 안 그래도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처녀지 개간사업에 반기를 들며 1962년 해임당하고 한직으로 좌천된다.


그러나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쿠나예프의 절친 브레즈네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자,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는 쿠나예프는 다시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받은 쿠나예프는 소련 모든 공화국들 중 유일하게 실권을 가지게 된다. 먼저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던 공산당 제2서기 직을 카자흐스탄만 유일하게 쿠나예프가 직접 임명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인 중 최초이자 당시로선 유일하게 중앙권력에 편입되어 쿠나예프는 1971년부터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1960년 40만명에 불과했던 알마아타의 인구는 1982년 100만명을 넘겼으며 카자흐SSR 전체에서 카자흐인의 인구는 1980년을 기점으로 러시아인의 인구를 넘어섰다.


현재 카자흐스탄의 경제성장도 쿠나예프가 초석을 닦았다. 철도가 없던 카자흐 전국에 곳곳을 연결해주는 도로와 철도가 닦였고, 자원 탐색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아 이 당시 카자흐스탄 최초의 광산과 유전이 열렸다.


카자흐스탄 노인층에게 쿠나예프는 '행복했던 시절'을 상징한다. 본격적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카자흐스탄이 변방 유목국가에서 현대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복지수준도 꽤나 높아졌다. 적어도 그들은 지금보단 조금은 못 살았어도 낭만있던 시절이 쿠나예프 시절이라고 말한다.


1984년, 브레즈네프가 죽고 2년 뒤, 젊은 공산주의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새 서기장이 되었다. 쿠나예프는 자신도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44살의 젊은 공산당 카라간다지부 제1서기,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카자흐SSR 장관회의 의장으로 임명한다. 철강노동자 출신이었던 나자르바예프는 쿠나예프에게 국가경제의 문제점과 비효율성을 지적했지만, 보수파였던 쿠나예프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쿠나예프와 나자르바예프는 본격적으로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결국 1986년 나자르바예프는 쿠나예프 앞에서 딘무하메드 쿠나예프의 동생이었던 아쉬카르 쿠나예프 카자흐SSR과학연구원 원장에게 쿠사리를 먹였고, 빡칠대로 빡친 쿠나예프는 모스크바로 향해 고르바초프에게 나자르바예프의 해임을 건의했다.


그러나 상황은 쿠나예프에게 불리했는데, 내심 이미 관뚜껑 닫고 들어간 브레즈네프 절친 틀딱 노인네가 페레스트로이카에 발맞추긴 커녕 무슨 70년대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고르바초프가 쿠나예프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이야기이다. 쿠나예프는 나자르바예프를 해임시키긴 커녕 1986년 카자흐SSR 공산당 제1서기에서 해임당했고, 1987년 초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해임당했다.






문제는 고르바초프는 모착녀였다는 것이었고, 카자흐스탄 근처에도 안 가본 러시아인 겐나디 콜빈을 카자흐의 새로운 서기장으로 임명한다. 당연히 카자흐인들은 이것을 식민지배라고 여겼고, 추산 약 3만명에 달하는 시위자들이(자료에 따라 다르다. 러시아 측에서는 200명이라고 주장하나 현 카자흐스탄 정부는 3만명이라고 주장하고, 당시 주최측에서는 6만명이라고 주장한다) 쿠나예프의 복귀를 요구하며 1986년 12월, 행정수도 알마아타의 중앙광장에 모였다.


소련은 이걸 어떻게 대응했냐고? '천안문'했다. 최소 천명이 죽었고 7천여명이 체포되었다. 일주일 사이에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나 서방은 우크라이나와 발트는 기억하지만 카자흐스탄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들과 크게 관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보다.


쿠나예프는 격하당했다. 1989년 카자흐인이 다시금 카자흐SSR 공산당의 서기장이 되었지만 그는 바로 쿠나예프와 갈등을 겪었던 나자르바예프였기 때문에 쿠나예프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소련이 붕괴되자 쿠나예프에게 남은 것은 시골집 한채와 쥐꼬리만한 연금이 전부였으며, 1993년, 독립 카자흐스탄에서 카자흐스탄 민족의 할아버지는 고향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나자르바예프의 재임기간동안 쿠나예프는 그저 지나간 옛 지도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2년, 토카예프는 쿠나예프를 '민족의 할아버지'로 치켜세웠다. 드디어 쿠나예프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는 이제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