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방용





배경


1950년 11월 중공군은 유엔군의 방심을 이용해 청천강 전투에서 크게 한 방 먹이는데 성공한 중공군은 평양을 목표로 남하했으나 파병 준비도 제대로 안 하고 그냥 사람만 압록강 건너로 보냈는지 혹한의 날씨에 벌써부터 심각한 보급 문제에 시달렸고 청천강 남하 이후 급속하게 느려진 진격(평양-원산 연락 차단을 위해 내려보낸 어떤 부대는 사단채로 얼어죽은 경우도 있었다고) 유엔군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고 평양 방어에 총력을 기울임. 결국 중공군은 평양 점령에 실패하는 한편 화력에 하면서 이듬해 2월에 처음 대치한 청천강 유역까지 올라옴. 유엔군은 두 번은 안 당한다는 듯이 청천강을 따라 방어선을 굳건히 구축하였고 중공군 역시 보급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청천강 이북에서는 병력 보충과 물자 보급이 빠르게 이루어져 전선은 청천강 유역에서 고착됨.


상황이 이렇게 양측 모두 전쟁에 피로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모택동한테 연대보증시키고는 입 싹 뗀) 소련의 제안으로 휴전협상을 시작함. 김일성은 평양은 어떻게든 되찾아야 한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지만 기껏 미국한테 크게 한 방 먹였는데 어떻게든 다시 회복해서 올라오는 미군의 위력을 본 모택동은 학을 뗴고 완충지대 확보에만 만족한 채 더 이상의 남진을 포기함. 유엔군 역시 중공군을 경험한 후 역시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하면서 청천강 유역 일대에서의 고지전만 이어짐. 2년이 넘는 줄다리기 끝에 휴전협상이 타결되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이 코앞인데 여기서 멈추냐"고 거세게 항의했지만 미국이 휴전 동의 조건으로 동의 직후 이북 지역의 주권을 모두 넘겨주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겠다고 달래면서 결국 휴전이 성립됨.


실제 이북 지역의 주권 이양은 이런저런 문제 끝에 휴전 이후 1년 정도 미뤄줬고 1954년 제3대 총선과 함께 이북에서도 첫 총선거가 치뤄진 뒤 1954년 7월 27일 38선 이북 지역의 주권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양됨. 비록 완전 통일은 이루지 못했으나 먼저 침공을 당하고도 한반도의 영토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결국 "Korea"의 정통정부로 인정받음(유엔에도 "Korea"라는 이름으로 일찍이 단독가입,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대부분 역시 중소결렬 이후 북한을 버리고 일찍이 대한민국이랑 수교함)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는 일단 승전으로 간주중. 1954년 이승만이 승전 1주년 및 이북 5도 주권 이양 기념식 연설에서 한 "미완의 통일" 선언은 이후 대한민국의 국가적 기조가 되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완전 통일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음.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특수한 지위도 아니고 그냥 반란군 취급중.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하여 영토를 완전히 수복하고 "미완의 통일" 완수라는 국가적 사명을 실천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 대한민국 헌법 제4조


한편 북한의 경우 전쟁의 주범인 김일성은 패전 책임을 지고 쫓겨났고 이후 행적은 불명(모택동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가 수용소에서 죽었다는게 통설). 쫓겨난 김일성을 대신해 연안파가 정권을 장악함. 연안파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지금도 친중 기조는 변함없이 유지됨. 오히려 중소결렬로 공산권 대부분이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북한은 중국에 더 종속적으로 달라붙으면서 사실상 중국의 괴뢰국으로 전락함(그와중에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에도 같이 휩쓸림). 주한미군에 대항해 인민해방군 북부전구 산하 부대가 북한에 영구주둔 중이며 조선로동당의 당군이라는 조선인민군은 인민해방군 지휘를 받게 됨.





평양


평안도, 나아가 북부지방 최대도시 자리를 그대로 유지중. 평안도의 주요 무역대상이던 중국과의 교류가 죽의 장막으로 닫히는 바람에 냉전기에는 동남권에 비해 성장이 지체된 면이 있으나 북부지방의 중심이라는 위상은 변하지 않았고 한중수교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재개되면서 다시 성장이 시작됨. 서울과의 전통적인 라이벌리는 서울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사실상 체념하다시피 했고 대신 한반도 제2도시 자리를 두고 부산과 라이벌리가 붙는 중. 북부지방 내에서도 함경도 제1도시인 함흥과도 알력이 좀 있음.


1957년 구(區)제가 실시되어 6개 구(중, 서, 남, 동, 대동강, 보통강)가 설치됨.

1963년 평양의 지속적인 특별시 승격 요구에 따라 (정부 직할) 평양시로 승격. 승격과 동시에 평안남도 대동군 남관면, 용산면, 용연면, 율리면, 청룡면(일부는 승호시로 편입), 고평면 대부분, 남형제산면 동부, 부산면 남부를 편입.

1966년 서구 일부를 만경대구로 분리, 설치. 보통강구 일부를 용산구로 분리, 설치. 대동강구 일부를 북구로 분리, 설치. 남구 일부를 강남구로 분리, 설치. 남구 및 동구 일부를 송화구로 분리, 설치.(11개 구)

1973년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잔여지역을 만경대구로 편입.

1976년 북구 및 대동강구 일부를 대성구로 분리, 설치. 강남구 및 남구 일부를 역포구로 분리, 설치.(13개 구)

1988년, 강남구 일부를 남관구로 분리, 설치. 송화구 일부를 무진구로 분리 설치.(15개 구)

1993년 역포구 북부를 유경구로 분리, 설치.(16개 구)

1995년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과 평안남도 강선시를 각각 대보산구와 강선구로 편입.(18개 구)

2001년 무진구 동부를 서경구로 분리, 설치함.(19개 구)

2019년 구 출신 인물인 안창호 기념 차원에서 강선구가 안창호의 호인 도산에서 유래한 도산구로 개명.


시, 군 목록


평성시: 도청소재지이자 남포에 이은 도내 제2의 도시. 1963년 평양이 독립시로 승격하면서 더부살이 신세가 된 평안남도청을 이전하게 되었는데 여러 지역이 후보에 오른 결과 순천군 사인면과 후탄면이 최종 부지로 선정됨. 도청 이전과 함께 계획도시 건설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1976년 사인면, 후탄면 전역과 은산면 대동강 이남 지역에 평안남도 직할 평성출장소가 설치됨. 이름의 유래는 평양(平)을 지키는 성채(城)라고(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만 넘어가자). 계획도시가 완공된 후 1980년 계획도시가 완공된 후 평성출장소가 평성시로 승격되고 평안남도청이 이전함. 1983년 대동군 용악면이 편입되었고 1995년에는 강동군 고천면과 봉진면 대동강 이북 지역이 편입됨. 현재는 도청 소재지이자 평남 중심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자 관서공업단지의 중추, 평양을 방어하는 군사도시로 용악면 쪽으로 시가지가 확장되어 평양과의 연담화가 진행중.


남포시:  도내 최대도시이자 최대공업도시, 평양의 외항이자 인천에 이은 서해 제2의 항구도시. 평안남도 제2의 도시 자리를 유지 중. 특히 1970년대 관서공업지대 조성에 따라 대규모 중공업단지가 들어서 도시가 크게 성장함. 도시 성장에 따른 시역도 확장되어 1955년 용강군 대대면 편입을 시작으로 신령면, 금곡면. 양곡면 남부, 귀성면 대부분을 편입해 옛 삼화면 영역의 대부분을 찾은 상황(정작 중심지였던 삼화면은 아직 용강군에 남아있음). 진남포가 일제가 붙인 지명이라는 이유에서 1995년 '진'을 떼고 남포시로 개명. 최근에는 제조업의 쇠퇴와 더불어 지구온난화 때문에 부동항 지위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고민이 깊어지는 중.


강동시: 1959년 승호읍이 승호시로 분리, 승격함. 1983년 고천면과 봉진면 대부분을 평성시에 내어줌(잔여지역은 고봉면으로 통합). 1978년 강동면이 강동읍으로 승격함. 1995년 승호시와 강동군이 통합해 강동시가 됨. 철저한 평양의 위성도시로 시내동지구인 구 승호시 일대는 이미 연담화가 완료됨.


강서시: 1963년 강서면이 강서읍으로 승격하였고 평양과의 연담화로 인구가 빠르게 늘던 잉차면과 초리면이 1989년 강선시로 승격함. 1995년 도농통합 당시 강선시와의 재통합을 통해 시 승격을 노렸으나 강선읍은 평양이 가져감. 대신 강서읍이 동으로 전환되고 2007년 신도시가 건설된 동진면이 동으로 전환됨. 2015년 역시 신도시가 건설된 보림면이 보림읍으로 승격하면서 강서권을 중심으로 평양의 위성도시로 성장중(평양과 멀리 떨어진 함종권과 증산권은 그저 안습)


개천시: 풍부한 석탄을 이용해 한때 탄광으로 호황을 누렸음. 1963년 조양면이 조양읍으로 승격했고 1965년 개천읍이 개천시로 승격하면서 잔여지역은 개주군으로 개칭됨. 그러나 1980년대부터 석탄산업이 쇠퇴한 이후 완전히 몰락함. 그나마 시내동지구가 있는 청천강 쪽은 평지가 있기도 하고 최전방 군사도시로 먹고 살면서 낫긴 함. 1995년 개천시와 개주군이 도농통합시 개천시가 됨.


대동시: 1963년 평양 대확장으로 대동강 이남 전체와 임원면, 용산면 전역, 고평면 대부분, 남형제산면 동부(면 이름의 기원인 남형제산이 평양에 편입되는 바람에 나머지 지역은 승룡산에서 유래한 승룡면으로 개칭), 부민면 남부를 평양에게 뺏겨 군역이 대폭 줄어듦. 1973년 고평면 잔여지역도 평양에 편입되었으며 그나마 1981년 평양에 있던 군청이 부산면으로 옮겨와 대동읍으로 승격되었으나 1983년 용악면 대부분을 평성에게 내어주고(나머지는 대동읍에 편입), 1995년 대보면까지 평양에게 내어줌. 그래도 1990년대 초 대동읍과 승룡면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97년 대동시로 승격함. 대동읍은 동으로 전환. 2004년 승룡면 역시 읍으로 승격. 역사적으로 평양이었다는 이유로 평양 편입을 원하고 있으나 평양시의 반대로 지지부진.  2021년 재경리면을 재경면으로 변경.


안주시: 평북이 그 모양 그 꼴이라 경의선은 제대로 못 써먹지만 평남과 평북출장소를 이어주는 요충지이자 평남을 방어하는 군사도시 역할을 수행중. 1958년 안주읍과 신안주면을 통합해 안주시로 승격하고 잔여지역은 안북군으로 개칭함. 1984년 안북군 동면이 동읍으로 승격했고 1995년 도농통합으로 안주시와 안북군이 안주시로 통합됨. 2021년 2020년대 면 이름 개칭 열풍에 합류한 대니면이 을지문덕면으로, 동읍이 청남읍으로 변경됨.


중화시: 1967년 중화면이 중화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군 동부가 상원군으로 분리되어 나감. 하지만 1990년대 당정면과 양정면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인구가 늘어 2003년 시로 승격됐다. 동으로 전환된 곳은 시청 소재지인 중화읍이 아니라 신도시가 들어선 양정면과 당정면 일대. 강서, 강동, 대동과 함께 위성도시 역할을 열심히 수행중.


덕천군: 1974년 대규모 댐(덕천호: 원 지구의 금성호 자리) 건설로 군청 소재지인 덕천면이 수몰되자 군청을 잠도면으로 이전한 후 잠도면을 덕천읍으로 고침. 덕천면과 함께 덕천호 건설로 수몰된 풍덕면, 성양면을 통합해 덕풍면을 만들고 보상으로 개천군에서 봉양면을 편입함. 이재민 대부분은 새 덕천읍과 새로 편입된 봉양면으로 이주함.

맹산군: 1974년 맹산면이 맹산읍으로 승격함. 성천, 평원과 함께 존재감이 없는 군(1).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영원, 양덕과 함께 산중삼읍을 담당하는데 양덕은 평양과 원산을 있는 교통로가 지나고, 영원은 최전방 군사도시인데 여기는 아무 것도 없음.


상원군: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일제가 강제로 중화군에 편입됐다는 이유로 상원군 복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1989년 드디어 상원군이 분리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원래 중화군 소속이던 동두면도 같이 가지고 감. 하지만 이후 중화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혼자 군으로 남게 됨. 시가 넘쳐나는 평남 남서부 일대에서 용강과 함께 군으로 남아있는 동네. 동두면과 풍동면을 중심으로 개발이 시작되고 있지만 시 승격은 아직 요원해 보임.


성천군: 1966년 성천면이 성천읍으로 승격함. 맹산, 평원과 함께 도 내에서 존재감이 없는 군(2). 그래도 중심지인 성천읍이 규모가 꽤 큼. 제2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군 서부 영천면이 평성으로 편입된다는 떡밥이 있음.


순천군: 개천과 마찬가지로 한때 탄광으로 호황을 누림. 1965년 북창면이 북창읍으로 승격. 그러나 석탄산업이 쇠퇴하면서 몰락함. 군 남부인 사인면과 후탄면에 도청이 이전해오면서 시 승격도 기대해볼 법도 했으나 평성시로 떨어져 나감. 개천은 도시이기라도 하지, 여기는 아직도 군이고 기대주인 평성은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평양과 가까워지는 중이라 안습.


양덕군: 단연 석탕온천이 유명함. 1980년대까지는 유명관광지였으나 1990년대 쇠퇴하였음. 이후 군에 스키장이 여러 곳 들어서면서 온천과 스키를 연계해 관광지로 먹고 사는 중. 2005년 온천면이 석탕온천에서 유래한 석탕면으로 개칭됨.


영원군: 청천강 유역과 함흥을 연결하는 전락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두고 치열한 격전이 펼쳐졌고(최남단 영원읍 쪽을 제외하면 전부 파괴됐다 다시 새로 지은 수준) 험준한 낭림산맥을 배경으로 한 치열한 고지전 끝에 국군이 영원군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함. 1954년 희천군 진면이 편입되었고 1972년 희천군 장동면과 신풍면이 폐지되어 성룡면에 편입됨. 1979년 영원면이 영원읍으로 승격함. 2009년 진면이 구 희천군 소속인걸 강조하기 위해 앞에 '희천'을 붙인 희천진면으로 변경됨. 중부전선을 방어하는 최전방으로 오늘도 국군 장병들은 강원도 GP 보다 훨씬 빡센 낭림산맥 천국의 계단을 열심히 오르내리는 중. 그나마 희천군쪽 사면을 장악해서 난이도가 조금은 내려가긴 했는데.


용강군: 1972년 용강면이 용강읍으로 승격함. 평양과 남포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두 도시가 확장으로 인해 연담화되면 시 승격을 노릴 법도 했으나 남포가 오히려 반대방향인 서해쪽으로 확장하면서 도루묵 신세에 놓임. 그리고 확장하는 남포에 의해 1955년 대대면, 1963년 양곡면 남부, 1973년 금곡면과 신령면, 1986년 귀성면 대부분을 뺏김. 작년에 평남선 전철이 개통했으니 그나마 나아지려나...?


평원군: 맹산, 성천과 더불어 존재감이 없는 군(3). 평양과 안주 사이에 애매하게 껴있는 농어촌 지역으로 남았으나 기존의 평양의 대표공항이었던 대보공항이 폐쇄된 이후 신공항인 평안국제공항이 동암면과 양화면 일대에 2001년에 개항함. 공항 유치 보상으로 1999년 양화면이 양화읍으로 승격함.


평북출장소의 배경:

6.25 전쟁으로 수복한 평안북도 지역은 최전방이자 군사적으로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고 때문에 정부는 행정권 이양 직후 군사적 이유로 수복한 평안북도 지역의 민간입 출입을 금지하고 주민들은 모두 청천강 이남으로 강제 이주시킴. 그렇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안북도 지역은 한동한 버려진 상태로 남아있다가 1963년 제3공화국이 출범 이후 청천강과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입 출입을 단계적으로 해제하고 지역 재건을 시작함.


한편 지역 재건을 시작하면서 수복한 평안북도 지역의 행정구역 처분에 관한 문제였음. 행정권 이양 이후 제1공화국은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으로 임시로 평안남도로 편입시켰는데 이때는 민간인이 아예 살지를 않았으니 별 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평안북도 지역의 재건을 시작하면서 민간인이 하나둘 살기 시작하자 문제는 원래 평안남도와 서로 다른 도인데 수복한 지역인 면적도 1개 도에 비해 많이 작고, 인구도 많이 적은데다 신의주나 강계같은 중심지가 될 법한 도시들을 비롯해 도  대부분은 미수복 상태로 남는 바람에 도청을 설치할만한 마땅한 중심지도 없었음.


때문에 제3공화국 정부는 고심 끝에 이 지역들을 그대로 평안남도에 편입시키는 것으로 확정함. 차후 한반도 완전 수복이 이루어지면 평안북도로 환원한다는 조건으로. 하지만 졸지에 다른 도민이 되게 생긴 원주민들의 반발에다 군사적 전방이라는 특성상 제3공화국은 도 산하에 특수한 행정구역을 설치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리하여 1966년 평안북도 정주군 대전면에 평북출장소를 설치함. 평북출장소는 명목상 평안남도 소속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며 일반적인 도에서 처리하는 행정업무를 제공하며 사실상 도와 같은 기능을 수행 중임.


시, 군 목록


정주시: 관주면, 안흥면, 옥천면 대부분, 고안면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 수복.  1954년 선천군 운종면과 철산군 백량면을 편입함. 제3공화국이 시작한 평북 지역 재건 당시 가장 빠르게 재건된 지역. 군청은 정주읍 대신 대전면에 재설치되었고 재건도 이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짐. 폐허가 된 정주읍은 예전의 위세를 되찾미 못하고 몰락했으며 정주읍 서쪽은 재건도 드물게 이뤄짐. 여기에 1966년 대전면에 추가로 평북출장소가 설치되면서 사실상 도청소재지가 된 대전면은 옆의 고덕면과 함께 1973년 신정주읍으로 승격했음.1999년 운종면이 신미면으로, 백량면이 가도면으로 변경됨. 평북출장소 소재지이자 최전방 군사도시가 되면서 신정주읍을 중심으로 시 승격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시 승격 기준에 미달함에도 최전방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2003년 시로 승격됨. 신정주읍은 동으로 전환. 휴전회담장(일명 사송각)과 살수대첩 기념비 등 여러 안보관광지가 있음.


박천군: 전 지역 수복. 1963년 재건 시작과 동시에 태천군 원면과 장림면이 편입됨. 전쟁으로 폐허가 된 박천읍 대신 평안남도와 가장 가까운 동남면에 재설치되었고 재건도 이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짐. 1977년 동남면이 대령강에서 유래한 대령읍으로 개칭. 다른 평북 지역과 마찬가지로 역시 최전방.


영변군: 고성면, 독산면, 백령면, 소림면, 연산면, 영변면, 오리면 전 지역,  용산면, 팔원면 대부분, 남신현면, 봉산면, 북신현면 일부 수복.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존 중심지였던 영변면은 폐허가 되었고(때분에 읍 승격도 못했다), 군청과 중심지는 군 남부 연산면에 재건됨. 1963년 희천군 남면이 폐지되어 북신현면에 편입되었고 1977년 연산면이 구룡강에서 유래한 구룡읍으로 개칭. 봉산면, 팔원면, 고성면, 남신현면, 북신현면 전역, 용산면 북부가 민간인 통제 지역이며 구룡읍과 독산면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도 출입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음. 묘향산은 군사적 이유로 수십년 동안 폐쇄되었다가 2000년대 들어 군의 통제 아래 제한적으로 관광을 허용중. 명사찰이었던 보현사는 불타 없어졌고 유명한 9층석탑만 가까스로 간수해 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


폐지된 행정구역


선천군: 운종면, 태산면 일부(접도) 수복. 1954년 운종면이 정주군에 편입되어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의 선천군은 폐지됨. 1999년 운종면이 신미면으로 변경. 신미도만 민간인 출입 및 거주가 허용되고 나머지는 민간인 통제 지역.

영변군:


철산군: 백량면 일부(가도 등 서해안 도서 일대) 수복. 1954년 백량면이 정주군에 편입되어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의 철산군은 폐지됨. 1999년 백량면이 가도면으로 변경. 가도와 탄도만 민간인 출입 및 거주가 허용되고 나머지는 민간인 통제 지역.


태천군: 장림면 대부분, 원면 대부분을 수복함. 민간인 통제 지역으로 남아있다가 1963년 원면과 장림면을 박천군에 편입하면서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의 태천군은 폐지됨. 현재 장림면 마평리, 첩남리, 환하리를 제외한 전 지역이 민간인 통제 지역.


희천군: 진면 대부분, 남면 일부, 장동면 일부, 신풍면 일부, 희천읍 극히 일부를 수복함. 1954년 진면을 영원군에 편입(수복한 희천읍 극히 일부는 진면에 편입), 1963년 남면을 폐지하고 영변군 북신현면에 편입했으며 1972년 장동면과 신풍면이 폐지되어 영원군 성룡면에 편입되면서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의 희천군은 폐지됨. 현재 영원군으로 편입된 진면을 제외한 전 지역이 민간인 통제 지역이며 진면은 2009년 희천진면으로 개칭.


P.S. 장장 3일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림은 선 따기 노가다만 하면 되는데 설정은 머리 짜내는게 너무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