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 사실 한반도 이북의 고대국가랑 중세-근현대까지의 고려-조선을 같이 보면 안되지.. 발해나 고구려 더 예전의 부여는 반농 반유목 국가여서 저 드넓은 만주벌판을 한때 차지할수 있었고, 완전 농경국가였던 조선이나 고려가 만주를 차지해서 실효지배를 장기간 유지했을 확률은 0.01% 정도.
북벌못한 조상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왜 수천년동안 한족 계열 국가가 만주나 이민족에게 시달리면서도 그 북방 오랑캐를 복속시켰지 못했는지 생각해봐야 함. 농경민족인 한족이 뿌리잡고 살수가 없는 환경이었거든
자기 마음대로 역사에서 고구려랑, 발해를 아주 배제해버리네. 한국인 맞냐? 농경민족이라서 북벌을 못했다??? 고려말-조선초기, 중국식으로 볼때 원명교체기 한반도 주변 상황을 입체적으로 다시 공부하시기 바란다.
조선이나 고려가 만주를 차지해서 장기간 지배했을 확률이 누구 마음대로 0.01%???
ㅋㅋㅋㅋㅋㅋ 하여튼, 반도사관 좀 자제 해라. 고구려, 발해 자체가 반유목 반농경이라고 하는데, 반농경이라는게, 밀이나 보리를 대규모 경작한 수준도 아니고, 기껏해야 Dwa 기후에서도 재배가능한, 구황작물로 분류하는 기장같은 것들하고, 약간의 과수 종류가 다다. 똥땅이냐 아니냐를 구분짓는건 오롯하게 곡물생산량에 기초하는 건데, 중국의 거대한 규모의 강 하류 곡창지대에 비교하면, 한반도 자체가 똥땅이다.
역사적으로 접근할때 대동강 이북이 똥땅이라서 신라가 북진을 멈췄다는건, "신라 기준"이고. 가야 흡수 전까지 애초에 신라의 영역자체가 똥땅인 현재의 경남일부와 경북지방에 있었던걸 감안하면, "똥땅"운운이 얼마나 ㅋㅋㅋ 웃기는 소리인지 답이 나와야지. 자, 그럼 레알팩트참트루는 뭐냐. 신라가 애초에 고구려를 흡수 하지 못한게 원인이다. 즉, 신라사람들, 또는 백제 사람들을 북방으로 올려보내거나, 고구려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편입시켜야, 생경한 지형과 기후의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데, 신라는 애초에 그런 노력을 제대로 안했고. 고구려 사람들도 신라에 편입되겠다고 달려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 땅에 자체적으로 생겨난게 발해 아니냐.
반농경, 반유목을 해야 하는 함경 이북의 만주에서, 드높은 기상을 떨치고 같은 로망까지 안가고, 그냥 인류학 관점에서 보면, "유목"이라는 생업을 이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하등하다고 볼 근거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뼈한번 때려줄까?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는 지역들을 유목문화를 가진 민족이나 나라가 무력으로 정복해서 왕조까지 바뀐 사례가, 그 반대의 사례보다 월등하게 많다. 정착해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활패턴과 떠돌아 다녀야 하는 사람들의 생활패턴이 다른건 너무 당연하고, 그게 낮은 인구밀도를 가지는 지역 사람들을 융합시키는 강력한 리더쉽이 등장했을때,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는데, 고구려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당연한 예고, 여진의 금나라, 거란의 요나라, 몽골의 원나라가 그 대표적인 예다.
신라가 고구려의 귀족계층을 적극적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북진하는 것이라면, 기껏해야, 댓글에 있는대로, 약간의 군사력, 즉 전방을 경비할 병력을 북진시키면서 이주민과 원주민을 통제하는 행정력을 확장하는 정도. 쉽게말하면, 존나 느린 방법을 택한건데, 사실, 북진은 듣기 좋으라고 쓴 표현일 것이고, "행정공백지역을 차지해나가는 과정"으로 보면 고구마 열개 물없이 처먹는 수준으로 답답하고 느린 실적이었다. 인구밀도가 증가한 조선건국기 당시 북진상황에 비하면, 신라가 고구려 멸망 직후 북진할때 받았을 저항이, 조선의 그것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없는데도, 북방경계 확장이 더뎠던건, 신라의 행정체계가 워낙 비효율적이라거나, 구시대적인 한계를 가졌다고 볼 측면도 있고, 신라 정치체계 자체가 쓰레기였다는 방증일 수도 있고. 교수들 마다 견해는 약간씩 다르겠지만, 21세기 현재 강원도 인구밀도도 우리나라 최저인데, 그때 당시를 생각해봐라. 고구려 유민들이 자발적으로 신라에 편입되려 하지 않아서 북방경계가 느리게 확장됐다고 보는 시각이 맞다고 할 수 있겠냐? 고려나, 조선의 강계, 경성지역 정벌때 보면, 그냥 어택땅 하고 주민들 와리가리 이주시키면서 적절히 섞고, 적대적인 부족이나 지역은 철저히 분산시키면서 행정관 앉히면, 통제가 된다. 신라는 그런 능력이나 노력이 없었다는 거고, 신라보다 훨씬 안좋은 상황에서 북진한 고려나, 여진 인구밀도가 강성해져서 핏물로 북진한 조선에 비하면, 신라는 변명할 꺼리가 별로 없지.
그놈의 신라 중심 역사관, 반도에 갇힌 역사관 탈출해라. 아예,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를 중국에 통째로 넘기자고 하지 왜? 현대 한국인들이 조선 사대유학자들 처럼, "유목은 야만 문화. 우리 말고는 무조건 오랑캐. 쌀밥만 식사."라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는게, 일본군국주의자(아직도 잔존하고, 그 잔당이 자민당에 많다) 중화패권주의자(쉽게 좌표찍어주면 중공 상무위원들 중에 온건파라 할 놈들은 없다)들이 원하는 그림이라는 생각 안해봤음?
조선도, 시기가 딱한게, 명조 등장 +왕조교체와 왕권강화랍시고 벌어진 여러 내정문제들로 요동회복 호기를 놓쳤다는게, 두고두고 문제였고, 실제로 이게 후금굴기의 화근이 된게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 보면 알겠지만, 조선건국기에는 수십년동안 만주지방 통제를 놓고 조선이 숭명사대를 결정한 이후에도 명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타이밍을 잰 기록들이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경성지역 수복한걸로 그쳤다. 그리고 그때 실록에 등장한 여진족들 중에서 누르하치 직계조상들이 나온다.(먼터무, 맹가첩목아 등) 늦어도 세종 재위기까지 이빨 꽉깨물고 피를 볼 각오하고 북진 했으면, 숭명사대나 일본의 침략이 바뀌진 않았을지 몰라도, 최소한 조선 지도가 바뀌고, 후금은 등장못했거나 한참 밀렸을 것은 확실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세종의 여진 정벌이 먼터무 등의 유력한 여진 부족장들 처단까지 성공하고 회령 이북까지 통제권을 확보했으면, 요녕까지는 몰라도, 두만강을 넘어서는 지역의 통제권이 확보될 수도 있었다. 실록 보면 알겠지만, 여진족이 부족단위로 흩어져 있을때에는 복속 여부 또는 귀순, 편입 여부를 가름짓는게 부족장 성향에 따랐는데, 경성 지역 수복도 어떤 마을은 순순히 통제에 응하는가 하면, 어떤 마을은 말을 듣는건지 안듣는건지 수시로 말썽을 일으키는 마을도 있었고, 그 경향이 북으로 갈수록 심했다고 한다. 두만강 압록강이 경계로서 굳어진것은 오직,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 도하가 불편하여 수비가 쉽고 여진족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므로 그런 것이지, 유력 부족장이 친조선 성향의 인물이었다거나 하는 이유(즉, 먼터무가 사로잡히거나 죽고, 친조선 부족장으로 교체된 경우)로 회령 인근 여진족의 통제가 용이해졌다면, 오도리부 남하가 조선의 국경을 새로 긋게 되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세종대왕 재위기에는 요동성(요녕성)은 언감생심 수준으로 어려워졌지만, 홍건적을 막아본 태조 때에는 공민왕 휘하때 이미 요동성을 점령해봤고, 재차 정벌을 준비했었기 때문에, 이빨 꽉 깨물었다면, 최소한 홍건적 경로이자, 후에 조선, 명, 여진의 3국무역 중심지가 되는 요동성을 조선이 통제할 수도 있었다. 역사가 통째로 바뀌었겠지. 물론, 유교를 근간사상으로 건국된 조선이 숭명사대를 결정한 이후에는 가능성이 0에 가까워졌다고 보는 사람도 많으니 논쟁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빨 꽉 깨물고 기승전 조선만이 레퍼런스인 학도들이 있다면, 시야를 좀 더 멀리, 넓게 가졌으면 좋겠다. 환빠새끼들 덕분에, 만주수복이라는 단어가 금지어 처럼 되어서 그렇지, 세종대왕님도 재위기 내내 고토수복이 꿈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