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시가지의 통일신라 유적

현재 공주 시가지 일대에선 적지않은 백제와 통일신라의 도시유적들이 확인되었는데...



舊공주의료원 일부(舊 공주목 관아)

 2019년 8월 16일 ~ 12월 13일간의 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5기, 통일신라 수혈유구 3기와 적심 1기, 고려 기와무더기 1기 확인. 이 때 발견된 백제 주거지는 처음으로 발견된 평지 주거지라고 하며, 기와무더기에선 ‘官’명문 기와가 확인되었다. 



웅진동 現공주의료원 (웅진동 253-1번지) 

 인근에 송산리 고분군, 웅진동 고분군, 박산소 고분군 등의 백제 건물과 백제 이후의 사찰인 서혈사(西穴寺)가 소재하고 있어 일찍부터 유적이 존재할 것이라고 본 곳이다. 2012년 부지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 ~ 고려에 이르는 방형 건물지 등 취락 유적과 경작 유적, 고려시대 청자편과 토기류, 기와류,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반죽동 당간지주


 통일신라대 만들어진 당간지주. 조선시대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 때 가루베지온(輕部慈恩, 백제 고분 탈탈 털어간 그 양반이 맞다.)이 원래 당간지주가 있었다는 곳을 뒤져서 ‘大通’명문 기와를 발견해서 한동안 대통사지로 불렸....지만 1999년 11월 한달동안 일대 2천여평을 까 뒤집어보고, 다음해 공주대학교박물관이 또 조사해봤지만 백제 때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금학동 사지(現 공주교육대학교 북쪽)


 현재 공주교육대학교와 공주여자고등학교 있던 곳은 '탑골'이라 불리던 자연마을이었다. 1970년 공주교육대학교 대운동장 공사 중 동서 길이 11m, 남북 너비 6m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일대에선 통일신라 양식의 2단조각의 원형기둥자리를 가진 사각형 초석편, 석조광배, 석조여래좌상 2구, 석조보살입상, 석탑부재, 우물뚜껑, 석제소탑, 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탑골이 있던 두 학교 일대에선 어골문기와, 고식문살무늬기와, 분청사기편등이 확인되었다.

 석조여래좌상의 광배가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호류지 석사삼존상 본존의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절 자체는 6세기 혹은 그 이전 시점, 즉 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물뚜껑과 석조유물들, 와당은 모두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중. 



옥룡동 수원사지(水源寺址)


백제의 절인 줄 알았는데 1989년 시굴조사, 1991년 발굴조사 결과 연화문막새 등 통일신라 유물과 고려 범종 확인되었다.



웅진동 서혈사지(西穴寺址)

절 자체는 망월산 자락에 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공주의료원 일대에 있던 통일신라대 건물, 농경지와 가깝다.  

1927년 '西穴寺' 명문기와편과 석불 3구가 확인되었다.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추측되며 하나 빼곤 머리와 대좌 일부가 날아갔다고.

또  1969년, 1970년 발굴조사에서 절터의 규모가 확인되었다. 기단 흔적만 남은 금당은 동서 10m, 남북 8m에 달했으며, 탑은 적심석만 남았지만 그 놈 길이만 6m 높이 1m에 달할 정도로 대형이었다. 기단 토층과 출토 유물 중에 백제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절은 백제 때 작은 사찰이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중창을 거쳐 큰 사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정리를 해봤더니....


 첫째, 평지 시가지에서 치소를 찾아볼 수 없다. 비록 본관 일대가 1910년 자혜의원 신축, 그 이후의 공주의료원 증축으로 지형훼손이 심각하게 이뤄졌다고 한다. 그 변두리에서 통일신라의 수혈유구, 그리고 고려의 '官'명 명문기와가 나왔다. 한주, 강주의 사례를 생각해보았을 때, 공주목 관아는 고려시대에는 명백한 공주의 치소였겠지만, 그 이전에는 중요성은 높지만, 치소라고 할 순 없는 무언가, 즉 유력자의 주거지, 혹은 대규모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둘째, 다시 말하지만 중세는 종교의 시대. 사원이 도시의 관료, 주민, 그리고 유력자들을 모으는 커뮤니티이자 지역의 세를 과시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시절이다. 이걸 감안하여, 공산성 동쪽 정상부에 위치한 2동의 12각 건물과 28칸 건물을 살펴보자. 건물 자체의 면적은 물론이요, 대지의 면적도 넓다. 또 웅진성의 행정관사와 가깝다. 평지 사찰들의 고위 승려들, 웅주의 유력자(높은 확률로 舊 백제귀족), 지방관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의 장이 아닌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셋째, 이후 공산성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보라


 한반도의 주요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수운의 요지인 공산성은 고려 이후에도 재활용되었다. 성의 남쪽 정상부는 고려 이후에도 행정관사로 사용되었음은 물론, 조선시대 감영의 소재지로 바뀌었다. 이랬던 감영이 사라진 것은 1653년 조선정부가 관아를 공주목 관아로 옮긴 이후였고. 





이 세가지를 감안했을 때, 웅주는 백제이래로 형성된 대규모 평지 도심을 갖고 있었지만, 치소는 웅진성 舊백제왕궁 자리에 두었다고 보는 게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논문

『공산성 내 통일신라시대 이후 건물지의 구조와 분포의 특징』, 최병화, 백제문화(2018)

『고려 시대 전통 대읍 읍치 공간의 실증적 검토와 산성읍치설 비판 -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대읍의 분석을 중심으로』, 정요근, 한국중세고고학(2019)

기사

임석규의 테마가 있는 절터 기행 – 23. 공주 금학동사지, 법보신문, 2018년 12월 11일

공주의료원 신축 부지서 유구 출토, 2012년 3월 9일

구 공주의료원서 고려, 백제, 통일신라, 조선시대 유물 출토, 2019년 12월 18일

공주시, 공주목관아 복원한다, 특급뉴스, 2019년 12월 19일

디지털공주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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