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인천항과 인천연안부두의 명칭을 경인통합 30주년인 1993년부로 서울항, 서울연안부두로 변경할 계획을 발표하자 원인천 지역사회에서 인천 말살정책, 내선일체화의 서울판이라며 부들부들하기 시작. 그리고 경인통합으로 서울로 편입된 지역 국중고교생에게 서울시가 암송 등을 강요함.


부평, 부천, 시흥, 양천 지역은 정부의 적극적인 신시가지 개발 정책으로 서울의 신흥부촌(현실 역사에서의 강남3구를 생각해보셈)으로 성장하여 서울의 일부로 완전히 자리잡았지만, 원인천 지역은 서울시의 대단위 도시개발에서 소외되었던터라 경인통합 이전의 지역정체성이 강하게 남았음.


그런데 1992년 5월 6일 관교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음악시간에 서울특별시가를 제대로 외우지 않는다고 특전사 출신 교사에 의해 구타당해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그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원인천 지역에서는 격노하여 다음날 주안역 앞에서 집회가 열림. 관교중, 서울고 학생 수백명도 참여. 이게 폭력 시위로 비화되어서 주안구청, 주안경찰서가 불에 타고, KBS 주안별관도 피습당하기도 했음.


주안역 시위에 참여한 서울고(1980년 주안교 관교동으로 이전), 관교중(구 서울중이 1986년에 서울고 옆에 재개교) 학생 수백명이 서울시교육청에 의해 무더기로 퇴학당하자 원인천 중고교생들이 시위에 가세. 경찰 진압 병력은 시위대에 탈탈 털림.


성난 원인천 주민 수십만명이 부천 상동에 있는 서울특별시 신청사로 가기 위해 진격하던 중에 안양천 이서지역에 계엄령이 떨어짐.


제17보병사단도 시위 진압 명령을 받았지만 사단장이 원인천 토박이라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시위대에 합류하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서울 신청사를 점거하고 서울시장과 시청 고위공무원들을 인질로 연행해서 사단 본부로 끌고감. 그리고 시위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 전원을 총살하고 정부청사와 청와대를 포격하겠다고 위협. 심곡동 서울지방경찰청 청사와 부평, 부천 지역 경찰서들도 점령당하여 경찰력도 발묶임. KBS 소래송신소(711kHz)도 17사단에 점령당해 KBS 제1라디오 중파송출이 끊기고 자체방송(인천혁명방송)으로 대체되자 정부는 고양시에 있는 예비 송신시설(1080kHz)을 KBS 제1라디오 송출용으로 긴급전환함. 소하구 개봉동 소재 KBS 개봉송신소(639kHz)도 KBS 제2라디오 송출을 중단하고 제1라디오로 긴급전환하고 진압군은 개봉동과 철산동 일대의 경비를 강화함.


한편 소하구 하안동이 고향인 17사단 참모장은 몰래 도망쳐서 진압군에 투항하여 213여단 작전처장으로 보직.


이에 정부는 수방사 예하 제213보병여단(영등포, 시흥, 양천 관할 위수부대), 3군 예하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8보병사단, 특전사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이 된 17사단 병력을 소탕하기로 함. 신월동-온수동 전선에서 이 둘은 충돌하여 피비린내나는 시가전이 발발. 17사단 병력은 겨우 진압되었지만 정부측도 진압군의 절반이 손실되는 큰 타격을 입음. 이 와중에 서울시장과 고위공무원 몇명은 사단 연병장에서 살해됨. 17사단장과 시위대 주동자들, 그리고 사건의 발단을 일으킨 그 음악교사는 반란죄로 다음해에 사형 집행. 반란에 참여한 17사단 예하부대 지휘관 전원은 이등병 불명예제대 크리. 수방사 예하였던 제17보병사단은 1994년에 육군본부 직할의 제59보병사단(부평, 부천, 김포 관할)과 인천지구경비단(원인천 관할)으로 해편.


험악한 원인천 주민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정부는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서울특별시 중 원인천 지역을 인천광역시로 분리시켜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