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생 부부가 있었어. 둘 다 시골출신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서 무사히 졸업, 남편은 서울시 공무원,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서울에 정착했으니 나름 그 시골동네에서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 두 사람은 친구 소개로 만나서 결혼했고... 딸도 하나 낳고 그럭저럭 잘 살았어. 하지만 80년대 당시 이 가정에는 한가지 너무나 서러운 점이 있었어. 바로 집없는 설움. 전세값 올려달라는 집주인 갑질에 매년 한번꼴로 전셋집을 전전하는 서러움이었어.

그러다가 아마 80년대 후반이던가 90년대 초반이던가 하여튼 그 무렵, 이 부부는 듣던중 반가운 소리를 들었어. 상계동 지역에 새로 짓는 아파트 중 일부는 공무원에게 우선적으로 분양한다는 거야. 당연히 부부는 신청을 했고, 운 좋게도 당첨됐어. 물론 계약금 내고 잔금까지 치르느라 부부가 그때까지 모았던 돈은 싹 털렸지만. 어쨌거나 서울생활 십여년만에 처음 마련하는 자기 집, 해마다 전세값 올리겠다는 주인 등살에 쫒겨날까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꾸미고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을 갖게 된거지.

사실 이 집은 지금 우리 기준으로는 별로 좋은 집일리가 없어. 고작 28평에 복도식, 방 두개에 거실과 주방. 화장실 한개. 지금 기준으로는 30년된 노후아파트이기까지 하고. 하지만 그때 기준으로는 제법 깨끗하고 번듯한 좋은 집이었지. 생활 편의시설도 그때나 지금이나 제법 충실한 편이었고. 부부는 이 집에서 20년이 넘게 살면서 딸을 키웠어. 처음에는 서울 특유의 부동산 스노우볼링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러기엔 별로 욕심도 없고 재테크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었거든.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방 하나 더 있는 집으로 키워보려고 했겠지만 부부방에 딸 방까지 있으니 주거공간에서 부족함은 크게 없다고 느낀 모양이야. 큰 집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그대신 조금이나마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길을 선택한거지. 그리고 이 집에 산 기간이 20년을 넘어가면서... 부부는 30년도 더 전에 떠난 옛 고향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를 진짜 고향이라고 느끼게 된 것 같아. 친구도, 삶의 공간도 다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부부는 그 집에서 자신들의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그 무렵부터 계속 흘러나오던 재개발 이야기를 오히려 달갑지 않게 여길 정도였어.

그리고 시간이 흘러... 부부의 딸도 어른이 되고, 결혼을 전제로 한 남자친구도 생겼지. 결혼 이야기도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고 양가 부모가 서로 인사를 나누자는 이야기가 나올 무렵... 무서운 일이 일어난거야!

신부측 부모가 주공아파트에 살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신랑의 부모가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한거야. "주우고오옹아파트으으으으으!?!? 감히 임대 사는 그지같은 집구석이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넘보냐!!" "우리 아들 등골에 빨대 꽂아서 노후 해결할 작정이냐!?" 라고 비명을 질러댔지. 신부측 부모로써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어. 그 집이 임대아파트였던것도 아니고, 부부 모두 공무원 연금도 받고, 저축도 있는 부부로써는 딱히 자식들에게 노후를 의존할 생각이 없었거든. 오히려 연금과 함께 노후에 대비한 어느정도의 저축을 남겨두고도 결혼하는 딸에게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사줄 여력이 있었어. 대신 '결혼식과 집 이외에 다른 큰 지원은 못 할 것 같으니 기대하지 말아라. 노후자금하고 지금 사는 집은 쓸만큼 쓰다 운 좋게 남으면 니들이 물려받는거고 남는거 없으면 니들 팔자다' 라고 선을 그어두긴 했지만. 그에 비해 신랑쪽 부모는 신부쪽보다 불안정한 자영업자였고, 전세 보증금은 반정도 보태줄 수 있지만 용돈+생활비 형태로 갚으라는 입장이었거든.

신부 부모 쪽에서는 상대쪽이 기우는 결혼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랑측이 완강하게 나오자 몹시 당황했어. 그리고 신부 및 신부 부모의 결혼비용 및 노후대책에 대해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던 신랑은 어떻게든 자기 부모를 진정시켜보려고 노력했지만... 신랑 부모가 가진 주공아파트에 대한 혐오와 멸시는 완강했지. 주공아파트는 가난뱅이들이나 사는 임대아파트고, 그런 집에 사는 거지네 식구와의 혼인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버텼어. 뭐... 그래도 신랑이 열심히 설명하고 설득한 모양인지 이삼일 뒤엔 신랑측 부모도 상황을 파악하긴 했다는 눈치지만. 그 이삼일은 신부측의 마음이 돌아서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 신부측은 비교적 전향적이었던 이전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양가에서 반씩 보태서 좀 더 큰 아파트를 사준다. 명의는 공동명의에 아이들에게 돈 갚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아니면 자신들로써도 결혼에 반대할 수 박에 없다는 입장으로 변해버렸거든. 그리고 안타깝게도... 신랑측 집안에서는 그 아파트값 절반을 낼 여력이 없었어.

그래서 이걸로... 누군가에게는 잔혹하고 누군가에게는 전화위복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미있는 씹을거리가 된 이야기는 끝. 심심해서 대충 끄적이고 가는 이야기니까 재미없으면 욕만 하지 말고 빽스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