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city/858173 1탄

https://arca.live/b/city/858780 2탄


이번엔 언급한대로 임진왜란당시 의병으로 이름을 남기신 분들임.

회재로 위에서 회재 박광옥에 대해 검색하는데 기분 미묘하더라


11. 회재로

 백운동에서 풍암동, 서창동로 돌아 대촌동으로 가는 큰 길. 시가지를 벗어나면 지난번 눌재로에서 언급한 대로 대략 대촌동이나 남평가는 길 정도로 설명이 된다.

 시내에선 특히 풍암지구의 핵심 도로가 되는 회재로. 이름 회재는 이 풍암지구 땅 일대를 가졌던 부잣집 출신 박광옥의 호이다.


 박광옥은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지만 사정상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집안을 지켰다. 늦게나마 40대에 운봉현감에 올라 그가 남긴 흔적는 다름아닌 황산대척비. 운봉에서의 정치는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정여립옥사에 연루, 파직되어 광주로 돌아온다. 그런데 곧 나라가 어두워지자 그는 아낌없이 재산을 열었고, 이는 의병에게 큰 힘이 되었다. 충렬공 고경명과 이후 광주목사로 부임한 권율이 이끌었던 의병들은 바로 박광옥의 노력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 공으로 나주목사로 재임한, 마무리도 아름다운 케이스.



12. 제봉로

 금남로의 대체재. 남광주역에서 광주역을 이어주는 가장 빠른 도로이다. 충렬공 고경명의 호 제봉을 따서 이름지은 도로로, 광주역 방사도로를 이루는 반대편 도로 태봉로는 태봉산에서 따왔는데, 이 산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박광옥의 길 회재로를 따라 대촌동으로 가면 그가 따르던 사람을 모신 사당이 있다. 포충사, 충렬공을 기리는 곳이다. 대촌동은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훈구파의 자식으로 태어나 붕당이 판치는 세계에서 인정받은 범상치 않은 인재. 그를 향한 주변 시선들에 의한 복직과 파직의 연속에서 결국 다 내려놓고 고향땅으로 돌아오니 왜란이 일어난다. 곧 의병을 모아 왕의 곁으로 가려다 전라도를 지키겠다는 판단하에 금산으로 가 일본군과 맞선다.

 결론적으로 대패하였다. 많은 의병을 한순간에 잃고 본인도 전사한 것은 분명한 실책이다. 그러나, 최초의 의병으로 보여준 의지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3. 충장로

 조선시대의 읍성 북문길, 일제시대의 혼마치. 광주의 도로원표가 있으며,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무대가 된 광주 그 자체인 곳이다. 광복 후에 왜색을 지우기 위해 광주 출신 의병장 김덕령의 시호를 빌렸다. 마찬가지로 이름을 빌린 부대가 광주를 지키고 있으며, 그의 넋을 기리는 충장사가 무등산 산자락에 있다. 빗대자면 수호성인처럼 그 또한 광주 그 자체가 되어있는 듯 하다.


 문무를 겸비한 그의 서사에 출현하는 인물만 해도 정철, 고경명, 곽재우, 권율, 이순신 등. 그런데 이 전설의 충장공은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활약에 대한 기록이 적다. 그의 전공은 대부분 항간에 말로써 전해지는 통에 진위여부마저 대두될 지경. 그래도 당시에는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아 유명해졌음은 사실이며, 모순적이게도 그 인기가 그를 죽인다.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고, 신문당하던 가담자가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당시 알려졌던 이름인 김덕령을 언급한다. 때마침 김덕령에게 불만이었던 장수 신경행이 그를 체포해버리고, 연이은 고문에 억울하게 숨을 거둔다.

 이후 현종때 복권되고 정조에 의해 충장공이란 시호를 받게 되지만 씁쓸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14. 서하로

 국립광주박물관 앞 교차로에서는 하서로와 서하로가 만난다. 여기서 뻗어나온 길은 매곡동을 거쳐서 각화동으로 이어진다. 호남고속도로 북쪽에서 평행하게 달리며 북구를 동서로 이어주는 한편, 매곡동과 문흥동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간선 역할을 해준다.


 임금의 은혜를 갈구하던 정철이 왕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쓴 가사가 있다. 성산별곡 도입에 나오는 '서하당 식영정 주인', 그가 바로 서하 김성원이다. 식영정은 서하가 그의 장인을 위해 지어 선물한 건물이었다.

 그는 왜란당시 동복현감으로써 지역을 사수하는 책무를 다하고자 군량확보와 의병모집에 노력하였는데, 그 때 모인 의병 중에는 자신의 조카가 함께 있었다. 그 조카는 두각을 드러내며 의병들을 이끄는 존재가 되었고, 장안의 화제가 되어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참으로 대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카가 조정에 무고되어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에 크게 상심해 김성원은 세상과의 연을 접어두고 은둔한다. 그 조카의 이름은 김덕령이었다.



15. 금남로

 광주의 정신이 담긴 도로, 금남로이다. 아직도 광주의 대표 금융가로 남아있긴 하지만 도청이 빠지고 ACC가 들어온 지금은 문화적 아이콘으로의 가치가 더 높은 모습이다.

 정치적 역할을 상실한 금남로에 한때는 암울한 전망이 지배적이었는데, 확실히 ACC가 신의 한수이지 싶다.

 도로의 이름은 광주출신 정충신의 군호 금남군에서 따온 이름이다.


 광주 출신의 노비였던 그는 왜란이 발생하자 광주목사 권율을 따라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권율의 명을 받아 선조에게 가는 광주에서 의주까지의 일본군 점령지가 가득한 길을 돌파하는 끝에 어명으로 면천되고, 이항복의 눈에 띄어 충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학문을 배워 병과 급제. 이정도면 라노벨 주인공.

 이항복이 유배길에 오르자 동행하고 여진족과 부대끼는 전방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후금-청이 부상하자 광해군대에는 여진을 상대하던 시절의 경험을 살려 대청외교의 실무진이 되었다. 중립외교의 선봉이었다고.

 인조반정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친구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앞장서서 반란을 제압하던 그는 그야말로 왕가의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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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근대 항일 인물도 여럿 있지만 일단 이정도에서 끊는게 덜 피로하겠지?

다음번엔 인물 말고 다른걸로 모아와볼까 함. 태봉로라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