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물마냥 좀 써볼 생각임.


첫번째인 마산포는 좀 특이한 동네여서 흥미롭게 봤던 동네임. 보통 몰락한 동네는 태백처럼 원래도 읍 정도의 인구는 있다가 말도 안되게 인구가 폭등한 뒤, 다시 읍 수준으로 감소하거나, 벌교처럼 원래 뭣도 없는 동네였는데 정책이라든가 여러 이유로 폭증한 뒤 다시 원래의 인구로 되돌아간 경우가 대부분인데 마산포는 원래 전통적으로 인구 밀집지역이었다가 완전히 유령마을로 전락해버린 경우라서. 적어도 몰락한 지역 중에서 제일 비극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음.


일단 마산포의 역사는 다음과 같음(출처는 네이버 백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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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는 시화호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포구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1960년-70년대만 해도 대부도, 탄도, 불도, 어도, 형도, 우음도, 선감도, 제부도 등 주변 지역의 섬주민들과 상인들로 붐볐던 곳이다. 마산포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해상교통에 큰 비중을 차지했고 서해의 섬들을 연결하는 뱃길의 중심지였다.

현재 고포리의 중심지 부근인 마산포는 조선 최대 항구 중 하나이며 신라시대부터 중국과 교역을 하던 가장 중요한 항구이기도 했다. 조선말기에는 청나라가 조선으로 배를 타고 들어와 정박하던 포구이기도 했다. 이 포구에서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마산포는 인천의 제물포가 개항하기 이전에는 가장 번창했던 포구다. 마산포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은 서울과 거리가 멀고 교통 또한 불편해서였다. 따라서 마산포는 작은 포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천에서 대부도 나루터와 마산포를 왕복했던 여객선은 하루에 2회 다니면서 2시간 30분 소요됐다. 당시에 화물과 100명 정도의 많은 승객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예전에는 육로교통이 미비하여 선박을 많이 이용했고, 버스가 대중화되기 전인 60년대에는 생활권이 인천이었다. 대부도와 선감도, 탄도, 불도 주민들은 마산포로 건너가서 화성의 사강장을 보았을 정도로 마산포를 선호했다.

과거에는 마산포가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으나, 이제는 바다가 막아버려 배도 끊기고 더 이상 사람들이 거쳐가지 않는다. 예전에 비해 마산포는 고립된 섬처럼 되어 버렸다. 이제는 대부도와 시화호가 9.3km의 긴 뚝으로 연결되자 관광객들로 대부도와 선감도, 탄도, 불도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부도는 선재도, 영흥도와 함께 시화호 건설로 인한 교통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 되었다. 대부도는 뜨고 그 화려했던 마산포는 이름도 없이 잊혀진 포구가 되었다. 맨 처음 마산포를 가게 된 것은 23년 전에 어도를 방문했을 때이다. 그 뒤로도 3번 이곳 마산포를 지나서 어도에 들어갔다. 선착장의 모습은 오래 전에 사라졌고, 포구 입구의 식당은 폐허가 된 채 철거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어도 [魚島] - 도시인들의 레포츠 메카로 변신 중인 섬 (한국의 섬 - 인천광역시·경기도, 2017. 3. 15.,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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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러함.


실제로 과거 1917년도에 삼성여객, 지금의 제부여객이 구군포-수원서부 간 완행버스를 개통시켰을 때에도 반월, 어천, 매송, 비봉, 음덕(지금의 남양읍), 마도, 사강을 거쳐 마산포로 들어갔음. 그 버스의 후신이 현재의 330번 시내버스인데, 90년대 지나고 제부도가 관광지로 뜨면서 지금의 노선이 되었다고 함. 실제로 330번 버스는 만들어진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최초 개통시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고 시점이 금정역으로 조정되었다는 것 정도만 다름.


송산면의 인구 추이를 보면 다음과 같음

-1925년 8606명

-1944년 8662명

-1955년 12119명

-1966년 16114명

-1975년 15296명

-1985년 11668명

-1990년 11914명

-1995년 9971명

-2000년 9918명(외국인 14명)

-2005년 9398명(외국인 49명)

-2010년 8835명(외국인 238명)

-2019년 10933명(외국인 1030명)


써놓고 보니 인구 추이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음.


원래 조선시대에는 마산포가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고 함. 먼저, 구 부천군 소속의 도서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 그리고 제물포 개항 이전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했었던 곳이 바로 이 마산포라고 함. 청나라가 흥선대원군 납치했을 때도 이 마산포로 끌고 갔음. 하지만,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이 제물포를 개항하게 되면서 한성과 거리가 지나치게 멀었던 마산포는 몰락을 하게 됨. 특히나 갯벌이 많아 일제의 수탈이 많았기 때문에 송산면에서는 3.1운동 당시에 만세운동이 굉장히 크게 일어남. 일제 순사하고 헌병이 분노한 어민들한테 밟혀 죽고 총기를 탈취당했다는 무시무시한 야사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무서운 동네임. 그래서 해방 전후에는 인구가 8천명대로 바닥을 찍었음.



(1975년, 마산포 갯벌, 경기도청)


이후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가 마산포의 전성기임. 어업이 엄청나게 발달하게 되고, 갯벌에서 나온 해물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됨. 서울에서도 차 끌고 일부로 찾아오고 그랬다 함. 실제로 이때 삼성여객에서 고터에서 마산포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굴리기도 했음. 갯벌에서 굴을 캐고 양식도 대규모로 함. 어업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고, 사강시장으로 장 보러 온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룸.


마산포의 몰락은 1987년 시화방조제 건설과 함께 찾아옴. 주민들은 처음에 크게 반발했다고 함. 그야 삶의 터전을 빼앗기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주민의견이니 뭐니 중요치 않던 시절이라 정부는 시화방조제 건설을 강행함. 갯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마을을 떠남. 시장 건물과 집들, 포구는 폐허로 방치되었음.




실제로 마산포에 가보면 사람이 사는 집이 거의 없어서 을씨년스럽게 느껴짐. 교통도 폭망해서 이젠 그나마 하루에 2번 들어오던 수원행 버스도 폐선, 1시간에 1대씩 들어오는 사강행 레스타 타고 나가야함.

그와는 반대로, 송산면 전체의 인구는 2010년 최저점을 찍은 후 다시 5자리를 회복했는데, 그 이유는 공단개발 덕분임. 안산 이북이 거의 포화상태를 맞으면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화성으로 내려옴. 화성 동부는 땅값도 비싸고 개발도 되어있으니 대부분이 비봉 이서로 들어감. 송산에도 많이 있어서 중소기업 덕분에 많이 증가함. 이는 증가한 인구 약 2000명 중 거의 절반이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음.

이상. 나는 본가가 그 근처이니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