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생 최승희. 


그녀는 명문가 태생이며, 강원도 홍천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하지 않으며 사실상 자란 고향은 경성이라고 한다. 





숙명여학교 시절




1926년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의 전설적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된다. 




스승 이시이 바쿠의 시력이 나빠지고 무용단도 어려워지자, 그녀는 스승의 간청에도 동경을 떠나버린다. 


1929년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희. 





그녀는 경성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가 남편 안막을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아직 조선에서는 무용이 그냥 기생 놀음으로만 여겨지고 천대받았으며, 결국 그녀는 낙심하여 동경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동경에서 대스타로 성장했다. 


특히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모든 조선 전통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것을 현대무용에 결합하였다. 


즉 현대 남한과 북한의 ‘한국무용’의 시초이며,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신무용‘이라 불리우는 전통춤과 현대무용의 결합을 최승희가 처음 이루어냈다. 





가마쿠라의 최승희 팬사인회와 공연 인파

그리고 일본과 조선의 광고에 나온 모델 최승희


그녀는 일본제국 전체의 스타가 되었으며 광고를 쓸어담았다. 






남편 안막, 딸 최승희와 함께





그녀는 더 큰 도전을 위해 1937년 뉴욕으로 떠난다. 




그리고 유럽까지 진출하여 전세계 순회 공연을 하고 다닌다. 





파리에서





스페인에서. 





멕시코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길에. 





최승희가 동경으로 귀국했다는 말을 듣고, 춤을 배우고 싶어하는 한 평양 소녀가 무작정 동경으로 가 제자가 된다. 


그녀가 바로 최승희의 제자이자 동서였던 김백봉이다. 그녀는 전후 평양에서 서울로 넘어와 최승희의 한국무용을 남한에 전파했고 부채춤을 창시했다. 





그녀는 1940년대에 일본군 위문공연을 다녔고, 이는 그녀의 커리어에 가장 큰 오점이 된다. 


1944년에는 남편과 북경으로 건너간다.





1945년 해방 후 그녀는 북경에서 서울로 돌아온다. 

하지만 남편 안막은 사회주의자로써 평양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위문공연 경력으로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고, 매우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 나름대로 자신은 민족문화를 위해 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속죄하는 마음으로 코리안 발레를 만들겠다고 하자, 언론은 ‘이제는 미제의 앞잡이가 되려 한다’는 자극적인 기사를 낸다. 


또한 아직 조선에서는 무용을 기생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평양에는 남편 안막이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는 국가적으로 예술인을 육성했기 때문에 그녀는 평양으로 떠나고자 마음먹는다. 


이승만은 그녀에게 떠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썼으나 그는 평양을 택한다. 






김일성은 그녀에게 평양 최대의 기생집이던 동일관을 내 주었고,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개소한다. 


맨 앞 인물이 위에서 설명한 김백봉. 그녀와 남편은 안막-최승희 부부와 달리 1.4 후퇴 때 월남하게 됨. 




최승희 공연을 관람하는 저우언라이. 

그녀는 사회주의권 곳곳에서 큰 공연을 하고 다님. 




그녀의 딸 안성희도 무용가로 매우 잘 나감. 


소련에서 열린 모스크바 무용 콩쿨에서 집시춤으로 1등을 하고, 북한에서 공훈배우가 되며 어머니와 함께 세계를 누빔. 


 


소련 이곳저곳을 누비며 공연을 다녔던 시절


주요 당간부들은 모두 만나고 다녔음. 

또 북소 합작영화의 안무를 맡아 공산권에서 큰 히트를 하게 됨. 





19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되었으나 그녀는 금새 복귀했음. 여기에는 중국 저우언라이의 지원도 있었다고 전해짐. 


하지만 애초에 공산주의 사상에 별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점차 위기에 빠지게 됨. 


공산국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에 사상과 계급성을 담을 것을 요구하는데, 그녀의 안무에는 이러한 성향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며 비판받기 시작함. 


또한 그녀는 콧대가 매우 높고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는데, 조금만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게 있으면 김일성 집무실에 쳐들어가서 항의를 했고 서로 고성이 오가며 싸운 일도 잦았다고 함. 


게다가 당시 일본에서는 최승희를 몇 번 초청했지만 북한 정부는 허가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방북한 일본 사회당 인사에게 공연을 하고 싶다고 무단으로 말을 거는 등 말썽을 일으켰음. 


그녀는 결국 1964년 이후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숙청된 것으로 전해짐. 





하지만 1980년대 김일성이 ‘그래도 최승희의 무용이 최고였다’라는 발언을 하며 일가족이 모두 평양으로 돌아오고 복권되기 시작함. 


그리고 1990년대 초 출간된 김일성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승희를 크게 치켜세우면서 공식 복권되었음. 그리고 2003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음.